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32
아침밥을 해먹고 우리 가족은 행장을 꾸렸다. 그날은 정월 대보름이었다. 이참에 찾아간 곳은 선덕여왕릉이었다. 토함산 쪽으로 붙은 벌판 가운데 나지막이 올라와 있는 낭산(狼山)의 오롯한 소나무 숲길을 따라서 걸어 올라가면 한적하게 솟아오른 봉분이 있는데, 그게 선덕여왕의 능이다. 경주의 다른 고분들처럼 거창하게 관리되지 못한 채, 인적이 드문 산속에 방치된 듯한 느낌이다. 길을 안내하는 입석조차 없었던 것을 근처에 있는 토봉사 절집 사람들이 민원을 넣어 그나마 제대로 길이 열리게 되었다고 한다. 첨성대며 황룡사를 지었고 삼국통일의 기틀을 놓았다는 여왕인데도, 현대를 사는 신라인들은 이 묘역을 별로 돌보지 않았다. 토봉사라는 암자에 사는 보살님 이야기가 “아마 여자라서 홀대받는 것 같다”고 했다.(지금은 주변이 많이 달라진 모양이다)
여왕의 능이 있는 자리가 도솔천이고 산 아래 사천왕사(四天王寺) 자리가 있는데, 이는 여왕이 미륵신앙을 섬겼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정토종이라고 밝히는 토봉사 주변 마을은 참 아늑했고 햇볕이 따뜻했다. 그 길로 원효대사가 살았다는 분황사를 찾아가 아이랑 사진도 찍고 놀았다. 오후엔 한옥 민속마을인 양동마을까지 다녀왔는데 이곳은 바람이 몹시 불어 집에 돌아와선 낭산과 분황사에서 얻은 에너지가 바닥났는지 그냥 팔을 베고 누워 버렸다.
사진출처=pixabay.com
달집 앞에서 무엇을 빌어볼까
아늑하고 바람 없는 땅에서 봄볕을 받으며 정다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요즘 좀 쓸쓸하고 사는 게 ‘어렵다’ 느껴지는 모양이다. 객지에서야 항상 사람이 그리운 법이지만, 일이 잘 풀릴 때는 잊고 산다. 그러다 일이 좀 꼬인다 싶으면 넋두리하고 치댈만한 사람을 부르게 되는 모양이다. 지금 여기 경주엔 옛사람 원효 같은 분 아니계신가, 싶다.
저녁밥을 지어먹고 남산 동쪽 통일전 앞 들판으로 나가 보았다. 달집 태우기를 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사전에서 찾아보니, 달집은 정월 대보름에 대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짚, 솔가지, 땔감 등으로 덮고 달이 뜨는 동쪽에 문을 내서 만든 것이다. 달집 속에는 짚으로 달을 만들어 걸고 달이 뜰 때 풍물을 치며 태운다고 한다. 달집을 태워서 이것이 고루 잘 타오르면 그해는 풍년이 들고, 불이 도중에 꺼지면 흉년이 드는데, 달집이 타면서 넘어지는 쪽의 마을은 풍년이 들 것으로 점친다. 또한 달집 속에 넣은 대나무가 불에 타면서 터지는 소리에 마을의 악귀들이 달아난다고도 한다.
달집을 태울 때 남보다 먼저 불을 지르거나 헝겊을 달면 아이를 잘 낳고, 논에서 달집을 태우면 농사가 잘된다고 한다. 무주 살 때도 달집 태우는 곳에 달려가서 술 한 잔 얻어먹곤 하였는데, 통일전 앞에 달려가 보니 벌써 행사를 마무리하고 들판엔 우리 식구밖에 없었다. 사람은 없어도 불꽃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바람이라도 불면 후익 하고 불길을 하늘로 쳐올리곤 했다. 보름달이 밝은 하늘 아래 들판에 우리 식구 세 사람만이 둘러서서 소원을 빌었다.
아이에게 소원을 물으니 말을 타고 싶다고 한다. 페가수스도 타고 싶다 했다. 결국 둘 다 대지와 하늘을 달리는 말인 셈인데, 아무래도 올해는 아이에게 말을 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줘야 하겠다. 마침 토함산 자락에 말을 키우는 목장을 한 군데 보아둔 곳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키우는 모양인데, 그 집 아이들이 말을 타는 걸 본 적이 있다. 아이는 전북 진안 마이산에서 겁 없이 혼자서 말을 탔던 경험이 내내 남아 있는 모양이다. 아내는 손으로 할 수 있는 기능들을 많이 배우고 싶은 모양이다. 들판에서 달을 보았으니, 이젠 산 위에서 달을 보자고 아내가 제안하였다. 그래서 그 길로 석굴암에 올라가 보름달을 맞이하였다. 아랫녘보다 바람이 차가웠지만 오히려 기분은 상쾌하였다.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민중가요를 듣다-그날이 오면
토함산을 오르내리며 자동차 안에서 음악을 들었는데, 며칠째 자동차 카세트 안에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테이프가 꽂혀 있었다. 얼마 전에 짐 정리를 하다가 불쑥 튀어나온 것인데, 요즘은 대중가요보다 <꽃다지〉와 같은 이른바 ‘민중가요’라고 부르던 노래들이 마음에 잘 스며들어온다. 대중가요란 대개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지만, 민중가요는 그런 개인적 차원을 뛰어넘는다. 우리 모두의 사랑에 대하여 노래한다.
세상의 가엾은 목숨들을 보듬어 주고, 세상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에 관하여 말하고 싶어한다. 나에 대해서 슬퍼하기보다 우리에 대하여 불쌍한 마음을 갖게 하고, 나의 성공을 바라기보다 더 나은 세상을 기다리게 만든다. 그건 아마 원효가 바라던 세상일 수도 있고, 미륵신앙이 고대하는 용화세계(龍華世界)일 수도 있겠다. 성서에도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다만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의 의로움을 찾으라고 말이다.
희한하게도 아내와 나의 의식의 흐름이 비슷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내는 지난 여름에 운전면허를 땄는데, 요즘은 아내 혼자서도 경주 시내쯤은 얼마든지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요즘 운전 중에 노래를 듣다가, 〈그날이 오면〉이라는 노래를 여러 번 반복해서 듣게 된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놀란 것은, 나 역시 요즘 운전하면서 그 노래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으며 감회에 젖곤 하였던 까닭이다. 내 개인적 문제로 고민할 때, 〈그날이 오면〉이라는 이 노래는 ‘개인적인 자아를 뛰어넘으라고’ 자꾸 부추기는 것 같다. 나를 넘어서야 사실상 온전히 내 문제도 더불어 해결된다는 이치일까
아아, 문익환 선생님
〈그날이 오면〉이라는 노래가 유난히 마음에 저며드는 이유는 또 있었다. 결국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것 또한 사람일 텐데, 그 노래를 들으면 항상 떠오르는 분이 문익환 목사님(1918.6.1-1994.1.18일)이다. 1987년 뜨겁던 6월,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던 민주화 투쟁의 한가운데서 먼저 이승을 떠난 열사들의 이름을 목이 쉬도록 줄줄이 부르시던 문익환 목사님은 그 후로 아예 목청이 달라지셨다고 한다. 그 간절함, 그 애타는 마음을 잊을 수 없다. 그때 불리던 노래가 그 노래였고, 1994년 정월에 그 분이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시는 길목에서, 그 영결식장 하늘에 하얗게 눈발이 날리던 때에도 이 노래가 불리었다.
한밤의 꿈은 아니리 오랜 고통 다한 후에
내 형제 빛나는 두 눈에 뜨거운 눈물들 한 줄기 강물로 흘러
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아, 피맺힌 그 기다림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자꾸만 되돌려 듣는 노랫말을 생각하며 ‘나를 넘어서자’고 다짐한다. 그럼 나를 넘어서는 방법은 무엇인가 더 맑아져야 한다. 강물은 흐르되, 그 물이 맑으면 바닥이 들여다 보인다. 탁한 물은 자기 몸을 드러내 보일 뿐 그 깊이를 알 수 없으며, 그 물밑에 가라앉은 그 어느 세상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맑은 물은 제 몸을 고집하지 않는다. 하늘빛을 파랗게 되비쳐 주거나 그 물속에서 노는 고기들과 바닥에 깔린 돌멩이며 물풀들을 대신 보여준다.
우리가 사람다워질수록 우리는 투명해진다. 가릴 것 없이 보이는 것 그대로 그 사람인 사람. 그 존재가 실상 든든히 서 있건만 없는 듯 사는 사람. 앞에서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뒤에서 배경이 되어줄 만큼 그릇이 큰 사람. 제 문제로 속을 썩이지 않고 세상의 고통에 더불어 아파하는 사람. 그 사람이 ‘맑은’ 사람일 것이다.
사심(私心)이 없어야 나를 넘어설 수 있다. 그걸 대의명분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앞장서는 바람에 구체적인 사람을 돌보지 않았던 시절이다. 맑은 사람은 명분이 아니라 진리 앞에 투명하다. 한참 먼 그 길을 가자고 생각한다. 그날이 오면, 그 노래를 읊조리며 이 생각이 한밤의 헛된 꿈만이 아님을 믿어 본다. 그래야 조금씩 발끝 옮겨 땅을 디딜 수 있겠다. 보름달이 아직도 밝다. 내 마음이 어두운 탓이다. 내속의 어둠을 밀어내고자 보름달이 응원하는 것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출처 : 가톨릭일꾼(http://www.catholicwork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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