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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는 길목에서

봄이 오는 길목에서/한승구 수업을 마치고 십여 리의 길을 걸어 집으로 향하던 멀고도 먼 기억을 떠올린다. 그날의 하늘은 분명 연분홍 꽃 빛깔 화사한 햇살이 연분홍 꽃비가 되어 쏟아져 내리는 듯한 어느 따뜻한 봄날이었다. 인적 없는 십여 리의 시골길을 따라 늘어 서 있던 까만 전봇대의 전선 위로 이름 모를 작은 새 한 마리 소년은 그 새의 울음소리를 따서 비비새라 불렀다. 산골의 적막함 때문이었을까. 휘파람을 부는 듯한 가늘고 짧은 새 소리가 유난히도 처연하여 아득한 절망이 담긴 슬픈 소리로 느껴졌었다. 소년은 작은 새가 날아갈 때까지 한참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연분홍 햇살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나의 과거 지향적 성향은 추억도 재산인 양 자주 끄집어내어 보곤 한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끄집어낸 기억 ..

꿈/한승구 혹시 나는 누군가의 꿈을 두고 허황된 꿈이라 섣부른 말을 하지는 않았을까 그 꿈 하나가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 가치를 지녔는지도 모른 채. 먼 어느 날 나는 하늘의 달을 따기로 했다. 허황된 꿈이라 여기지 않았다. 다만 어떻게 딸 것인가 하는 문제만 있었을 뿐. 하늘과 가까울 수 있는 산을 올라야 하고 높은 나무를 타고 올라야 한다. 산은 험했고 나무를 오르는 일도 쉽진 않았다. 기어이 달을 땄지만 높은 하늘의 달은 아니었다. 이후로도 나의 '달 따기'는 이어졌지만 내가 꿈꾸는 달은 멀고도 높았다. 이제는 안다. 내가 가진 달들이 비록 작고 초라해 보일지라도 삶이라는 바구니에 담겨 있는 그 달빛이 내 삶의 여정을 밝혀주고 있다는 것을. 꿈을 꾸는 것만으로 그친다면 꿈을 잃은 불행과 다를 바 없겠..

희망

희망 /한승구 어느 날이었던가. 내 가슴으로 난 창가에 작은 새 한 마리가 담겼던 날. 곳곳에 그늘을 숨긴 굴곡진 삶 속에서 한 마리의 새를 기다리는 간절함으로 우리는 세상을 살아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새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지만 더디고 먼 시간이어도 어쩌면 짙은 열정의 냄새를 좇아 다시 찾아올 것이다. 누구나 간직하고 있을 새 한 마리의 의미. 뜨락의 나목이 겨울을 보내며 봄을 꿈꾸듯 깊은 절망 속에서도 빛이 되어 줄 수 있는 그 새는 희망이다. 서당 한승구 동국대학교에서 불교미술을 전공하고 중요 무형문화재 제118호 이수자로서 단청, 개금,사찰벽화, 불화와 함께 통도사, 은혜사, 옥천사 등에 고승진영을 봉안하였고 국내외에서 18회의 개인전 및 초대전을 가졌다. 현재 경남 고성의 작업실에서 후학지..

고독과의 대화 /민병도

고독과의 대화/민병도   어제도 오늘도 생각지도 못한 손님들이 화실로 찾아왔다. 이제는 예기치 못한 손님을 맞는 일에도 길이 들여져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요즈음 찾아오는 이들은 대개 눈 덮인 풍경을 만끽하며 마음의 여유를 찾고자 하는 화가들이거나 글 쓰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반가운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대접은 차 한 잔 내어 놓는 것이 전부지만 가끔씩은 이렇게 눈 덮인 창 밖 풍경을 다식 대신 덤으로 내어놓기도 한다.  ​몇 잔의 차를 나누는 동안 손님들의 옷깃에 묻혀온 도심의 이야기들이 다 소진되고 나면 한결같이 ‘혼자서 적적해서 어떻게 사느냐’는 걱정을 쏟아놓는다. 아마도 ‘적적’하지 않느냐는 물음은 ‘외롭지 않느냐’라는 물음의 조심스러운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물음에는 딱..

돌을 읽다/민병도

돌을 읽다/민병도 저문 날 강에 나가 징검돌을 건너다보면세상 어떤 문자도 범접 못한 경전이 있어누군가 물속에 숨어 지줄지줄 읽어 주었다​꽃이 피고 새가 울고 달이 지고 날이 새고바람에 흔들리느니 차라리 생살 깎아시간의 지문에 갇힌 깊은 고요, 환하다​보지 않고 듣지 않고 알지 않고 말하지 않고날마다 길을 버리면 스스로 길이 되나밑줄 친 행간에 감춘 한숨마저 읽었다  시평  꽃이 핀다. 단단하게 다물었던 입술이 살짝 벌어지는가 싶었는데, 붉은 기를 머금은 이파리들이 몸을 일으킨다. 미심쩍은 듯 주춤거리던 행동이 어느 순간 자신감이 붙었는지 활짝활짝 몸을 뒤로 젖힌다. 화려한 자태, 카메라가 당겨 놓은 시간의 속도가 꽃의 생명을 더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영상은 꽃의 절정을 보여주고 나서 순간 거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