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에 감춰진 그 마음] 67

진실과 중도

진실과 중도/한승구 "내가 지금 사리를 찾고 있는 중이라네" 목불을 태운 재를 뒤적이며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단하 선사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고 "목불에서 무슨 사리가 나온다는 말이오?" 라며 반문했던 혜림사의 원주스님, "단하소불(丹霞燒佛)" 이라는 이야기에 얽힌 내용이다. 단하천연(丹霞天然)은 당나라 때의 선중으로 평범하지 않은 기행(奇行)과 행적으로 알려진 고승이다. 보이되 실체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들리되 진실이 아닌 것은 거를 수 있는 눈과 귀를 가져야 한다. 올바로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는 인지능력을 갖추어야 함은 과거나 현재에나 다를 바 없다. 매이지 말아야 할 것에 구속되고 개인과 개인 간의 간극이 생기게 되고 양분된 진영이 생겨나 분열로 이어지는 작금의 형국이 단하 선사의 가르침에 ..

그 남자

그 남자/한승구 밤하늘에 어느 사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별이 빛나고 있었다. 별을 사랑하고 별을 그렸던 사내, 저 별들 중 어느 별에서 뜨거웠던 그 가슴으로 못다 이룬 꿈을 품고 있을 것만 같다. 깊고도 암울했던 그의 고독을 가늠할 순 없지만 절망의 순간에 더 이상 물러 설 곳도 비켜설 수도 없어 뜨거웠던 그 사내는 초연히 별을 향해 떠났으리라. 짧은 생애에 예술을 향한 열정을 담고 서둘러 떠나간 오래 전의 그 사내를 떠올리며 별을 보는 밤.

산골의 밤

산골의 밤/한승구 자신의 색깔을 뽐 낼 수도 드러낼 수도 없는 어둠이 내린 산골, 실루엣으로 드러난 산마루와 하늘이 맞닿은 무채색 풍경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속엔 점점이 빛나는 별이 있다. 밤길 거닐고 밤하늘 바라보는 것이 일상이 된 어느 때부터 별은 적막한 산골의 밤을 함께 지키는 유일한 벗이 된다. 아를강가에서 누군가처럼 빛나는 별을 캔버스에 담지 않아도 어둠이 내리면 절로 내려와 담기는 별, 그래서 밤이면 간간히 내 가슴은 별을 담은 캔버스가 된다.

출구

출구/한승구 수많은 자각의 시간 그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숙연한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데 걸린시간 육십년. 희망 한 점 갖는 것조차 사치인양 여겨졌던 절망의 순간들을 거쳐 비로소 미미한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을 인정하는데 걸린 시간 육십년. 현실이란 열차에 기어이 헤집고 들어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는데 걸린 시간 꽉 찬 육십년이다. 그 기나긴 세월을 보낸 후에야 애초의 내 자리란 없었음을 알게 되고 긴 세월 입고 있던 각질 같은 마음을 한 점 한 점 벗겨 낸다. 내 젊음의 세월은 미완의 그림이자 혼돈이었으나 이제 또다른 삶의 지평을 꿈꾸며 무거웠던 육십년을 내려놓는다. 출구를 향해 서툰 발걸음을 내딛는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봄이 오는 길목에서/한승구 수업을 마치고 십여 리의 길을 걸어 집으로 향하던 멀고도 먼 기억을 떠올린다. 그날의 하늘은 분명 연분홍 꽃 빛깔 화사한 햇살이 연분홍 꽃비가 되어 쏟아져 내리는 듯한 어느 따뜻한 봄날이었다. 인적 없는 십여 리의 시골길을 따라 늘어 서 있던 까만 전봇대의 전선 위로 이름 모를 작은 새 한 마리 소년은 그 새의 울음소리를 따서 비비새라 불렀다. 산골의 적막함 때문이었을까. 휘파람을 부는 듯한 가늘고 짧은 새 소리가 유난히도 처연하여 아득한 절망이 담긴 슬픈 소리로 느껴졌었다. 소년은 작은 새가 날아갈 때까지 한참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연분홍 햇살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나의 과거 지향적 성향은 추억도 재산인 양 자주 끄집어내어 보곤 한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끄집어낸 기억 ..

꿈/한승구 혹시 나는 누군가의 꿈을 두고 허황된 꿈이라 섣부른 말을 하지는 않았을까 그 꿈 하나가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 가치를 지녔는지도 모른 채. 먼 어느 날 나는 하늘의 달을 따기로 했다. 허황된 꿈이라 여기지 않았다. 다만 어떻게 딸 것인가 하는 문제만 있었을 뿐. 하늘과 가까울 수 있는 산을 올라야 하고 높은 나무를 타고 올라야 한다. 산은 험했고 나무를 오르는 일도 쉽진 않았다. 기어이 달을 땄지만 높은 하늘의 달은 아니었다. 이후로도 나의 '달 따기'는 이어졌지만 내가 꿈꾸는 달은 멀고도 높았다. 이제는 안다. 내가 가진 달들이 비록 작고 초라해 보일지라도 삶이라는 바구니에 담겨 있는 그 달빛이 내 삶의 여정을 밝혀주고 있다는 것을. 꿈을 꾸는 것만으로 그친다면 꿈을 잃은 불행과 다를 바 없겠..

희망

희망 /한승구 어느 날이었던가. 내 가슴으로 난 창가에 작은 새 한 마리가 담겼던 날. 곳곳에 그늘을 숨긴 굴곡진 삶 속에서 한 마리의 새를 기다리는 간절함으로 우리는 세상을 살아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새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지만 더디고 먼 시간이어도 어쩌면 짙은 열정의 냄새를 좇아 다시 찾아올 것이다. 누구나 간직하고 있을 새 한 마리의 의미. 뜨락의 나목이 겨울을 보내며 봄을 꿈꾸듯 깊은 절망 속에서도 빛이 되어 줄 수 있는 그 새는 희망이다. 서당 한승구 동국대학교에서 불교미술을 전공하고 중요 무형문화재 제118호 이수자로서 단청, 개금,사찰벽화, 불화와 함께 통도사, 은혜사, 옥천사 등에 고승진영을 봉안하였고 국내외에서 18회의 개인전 및 초대전을 가졌다. 현재 경남 고성의 작업실에서 후학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