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24년 주보

연중 제12주일 2024년 6월 23일(나해)

모든 2 2024. 7. 1. 17:01

 

마산공소(한산성당) / 그림 안종찬(바오로), 2024년

 

 

+ 마르코 복음 4,35-41

 

<도대체 이분이 누구 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어 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교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 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말씀의 향기>

 

섭리를 바라보는 시선 - 김성태 요셉 내포교회사연구소 소장

 

  내포, 너른 들에서 나고 자란 선생님은 천주를 두려워한다고 했다. 그의 두려움은 광활한 들판의 변화무쌍에도 불구하고, 정연한 질서로 조화를 이뤄가는 대자연의 신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게 천주의 섭리라는 걸 선조들은 알고 있었다.

 

  그 시절엔 혹독한 가뭄이 흔하게도 찾아왔다. 다 자란 모를 내지 못한 농부의 가슴은 말라서 갈라진 땅만큼이나 깊이 패고 아렸을 것이다. 교우들은 그때마다 비를 청하는 9일 기도로 천주께 의지했다. 제아무리 메마른 하늘도 기도 끝에 다가온 ‘베드로·바오로 축일’에는 영락없이 비를 주셨다고 했다. 세상을 대하는 선조들의 태도와 그를 기억하는 선생님의 표정에서는 섭리에 대한 경이로움과 신뢰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 장마철이라 비가 오는 게 아니라 내리는 비에 천주의 뜻이 담겼노라고 그들은 굳게 믿고 있었다.

 

  그 들녘의 봄은 바람이 항상 모질게 일었다. 바람이 거세게 몰아칠수록 순교자의 자취가 더욱 생생하게 아른거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병인년 이른 봄, 착한 목자 다블뤼를 실은 배는 거센 역풍에 밀려 내포를 떠나가지 못했다. 바람이 막아 세운 선교사의 마지막 발자취는 천주께서 ‘가라’ 하신 세상의 끝이 아니었을까. 그는 여기서 순교자가 되고, 성인이 되었다.

 

  슬픈 봄바람을 다시 생각한 것은 한 교우의 혼잣말 때문이었다. ‘아, 바람이 불어야 할 텐디.’ ‘바람은 왜 불어야 한대요?’ ‘그래야 논을 갈쥬.’ 이른 봄엔 바람이 모질게 불어야 한단다. 바람이 불어야 언 땅이 녹고, 녹은 땅이 굳고, 굳은 땅은 쟁기로 깊이 갈아 씨를 뿌릴 수 있다. 어느 바람은 곡식을 주고, 어느 날의 바람은 나그네의 길을 막고, 그 바람은 다시 순교자를 내었다. 바람이 슬픈 게 아니라 바람에 깃든 천주의 뜻이 새로운 소명을 그에게 부여한 것이다. 바람을 내신 천주께서는 그 의미까지도 섭리하시는 까닭이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 는가?’(마르 4,41)

 

  거센 바람과 성난 파도, 큰 물과 메마른 대지까지 천주 하느님의 섭리 속에 있다는 복음의 진리를 선조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나고 살고 죽고, 하루하루 일어나는 일들이 중요한 건 일의 크고 작음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오늘 다시 주어진 일상에 진지하고 성실하자고 다짐하는 것은 선조들처럼 오직 천주만을 두려워하고 싶어서다.

 

 

해외 선교지 몽골, 그곳은

 

선교하지 못하는 선교사

 

 

  ‘선교하지 못하는 선교사’ 뭔가 이상한 말입니다. 몽골은 직접 선교가 금지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길거리에서 가톨릭교회를 홍보하고 초대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몽골사람들이 신앙생활을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든지 자신이 믿고 싶은 종교를 스스로 선택해서 찾아가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성경 은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4)라고 합니다. 선교가 금지된 나라에서 어떻게 선교사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선교가 금지되어 있는 나라, 몽골에서 선교사라는 이름으로 벌써 10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어떻게 해야 선교를 잘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당 앞마당에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매일 저녁 함께 식사하면서 친밀감을 쌓아가다 보니 어느덧 20여 명으로 신자들이 늘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은 아이들이 언젠가 성당 안에 들어와서 기도하는 모습을 그리게 됩니다. 본당 주변을 다니며 사람들을 만날 때도 혹시 언젠가 우리 본당 신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깁니다.

 

  몽골에서 외국인으로 지내다 보면, 한국사람이 몽골까지 와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많은 사람이 궁금해하며 물어봅니다. 그때마다 제 신앙생활을 설명할 기회가 되는 것도 반갑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신부라고 이야기하면, 아내도 자식도 없이 불쌍하게 혼자 산다고 많은 사람이 안타까워합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오히려 제가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지 자신있게 이야기하곤 합니다.

 

  때론 크신 하느님의 사랑 앞에서 제 자신이 게으르고 쓸모없는 사람처럼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선교사로 제자리를 지키고만 있어도 하느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일을 보게 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분의 자녀들이 하나둘 태어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 눈에는 말도 잘 못하는 쓸모없는 선교사처럼 보일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밝혀주는 작은 촛불처럼 쓰시려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작은 불빛을 밝혀봅니다.

-노상민 토마스 신부 몽골 선교-

 

 

 

전례 일반과 미사의 Q&A

 

3. 방송 미사에 대해서

 

성전에서 봉헌하는 미사와 방송 미사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2020년 2월,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의 확산으로 우리 모두는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고, 우리의 당연했던 일상은 멈춰버렸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 천주교 대전교구에서는 2020년 2월 20일, 공문을 통해 신자들에게 처음으로 교구 대책을 안내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상황은 더 악화되어, 정부의 위기대응 지침이 ‘심각’ 단계로 격상되었고, 주교회의에서는 ‘잠정적 미사 중단’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였습니다. 동시에 교구에서는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19에 따른 교구 후속 조치”라는 이름으로 구체적으로 준수해야 할 점을 안내했습니다. 특히, 교구장 공문을 통해 처음으로 “방송 미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라는 지침이 전달되었습니 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당시는 매우 어렵고 부득이한 환경이었습니다.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을 수 없었고,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조차 어려웠습니다. 그래서인지 성당을 찾아 미사를 봉헌하는 이들은 눈에 띄게 제한되었고, 대신 방송 미사에 참여하는 신자들이 늘었습니다. 물론 정부의 지침을 거슬러 무조건 성전에 와서 미사를 봉헌하라고 강요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성전을 찾는 것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편리한 방법인 방송 미사로 미사 참례를 대체하는 이들이 늘었다는 점은 교회가 마주한 지극히 현실적인 어려움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2020년 성모승천 대축일에 교황청에서 “기쁘게 성찬례로 돌아갑시다.”라는 서한을 발표합니다. 일부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커뮤니케이션의 수단들이 병약한 이들과 교회에 갈 수 없는 이들을 위하여 소중한 역할을 하고, 공동체 거행이 불가능한 이 시점에서 미사를 방송하는 훌륭한 역할을 해 왔지만, 어떠한 방송도 [신자들의] 직접적인 미사 참례와 비교할 수 없고 대체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방송은, 가상의 방식이 아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서 머무른다.’(요한 6,56)라고 참으로 말씀하신 강생하신 하느님과의 인격적이고 친밀한 만남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 내용은 부득이한 상황에 놓인 이들, 병약한 이들, 교회에 갈 수 없는 이들을 위해 방송 미사의 역할은 분명하지만, 직접적으로 참여하여 봉헌하는 미사와 비교할 수도 없고, 대체할 수 없다는 점을 재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방송 미사는 분명 신앙적인 부분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수단입니다. 그러나 성사로써 이루어지는 미사 봉헌을 직접적으로 대체할 수 없습니다. 성체를 받아 모시는 미사 참례와, 다른 이들이 성체를 모시는 것을 시청하는 미사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곧, 방관자적인 입장에서 미사를 시청하는 것과 함께 모여 기도하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미사를 봉헌하는 차이를 깨달아야 합니다. 성체를 직접 모시지 못하는 점에서 방송 미사가 가진 한계는 분명합니다. 2020년 교황청에서 발표한 서한의 제목을 다시금 기억하며 우리 “다시 기쁘게 성찬례로 돌아 갑시다.”

궁금한 질문은 tjubo@djca.kr 메일 발송해 주세요!

-윤진우 세례자요한 신부 사목국 부국장-

 

 

 

 

글로 만나는 성화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의 성모 마리아의 죽음

 

카라바조, 동정녀의 죽음, 1605-1606년, 루브르 박물관, 파리

 

  외경 중의 하나인 신학자 요한의 이야기에 따르면, 어느 날 동정녀 마리아의 마음은 아들을 다시 보고 싶은 형언할 수 없는 열망으로 가득 찼다고 한다. 그날 성모님은 많이 울었다. 그때 빛으로 옷을 입은 천사가 나타나서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인사했다: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이에게 복이 있나이다. 일어나 낙원을 만드신 이가 내게 주신 이 종려나무를 가져다가 사도들에게 주어, 네 앞에서 찬송을 부르게 하라. 사실, 사흘 안에 당신은 몸을 내려놓을 것이다. 보라 내가 모든 사도를 너에게 보내리니 그들이 너를 영광 중에 있는 곳으로 옮기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년)는 이탈리아의 화가로 서 명암 기법을 사용하여 17세기 회화에 큰 영향을 주었고, 수많은 위대한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그 가 1605~1606년에 그린 ‘동정녀의 죽음(Morte della Virgine)’이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맨발의 가르멜 수도회의 명령으로 의뢰되어, 로마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라 스칼라 성당(Chiesa di Santa Maria della Scala)을 위해 카라바조가 그렸지만, 그 수도 공동체의 호의를 얻지 못하고 거부당했다.

 

  가르멜회의 전통 안에 성모 신심이 존재했다. 수도 생활 자체를 성모 마리아께 맡기고 그리스도와의 일치의 신비를 생활화하는 데 그 소명을 가졌다. 카라바조는 이 작품에서 성모 마리아의 마지막 모습에 관한 거룩하고 신비한 모습을 생략하고, 오히려 가장 나약한 인간의 모 습으로 표현했기에, 복되신 성모님을 영성의 모범으로 삼는 가르멜 수도회의 관점에서 이 작품은 성인 모독이었다.

 

  부어오른 배, 노출된 발목, 동정녀의 더러운 발은 그녀의 거룩함과 일치하지 않는다. 전설에 따르면, 카라바 조는 테베레강에서 익사한 매춘부를 모델로 삼았으므로 뺨이 녹색을 띤다. 또한 카라바조의 전기 작가에 의하면, 카라바조가 사랑했던 고급 매춘부를 성모 마리아의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따라서 카라바조는 성모님의 모델로 매춘부를 삼은 것은 확실하다.

 

  카라바조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영원한 모성을 증언하고 싶었고, 그래서 죽을 때까지 임신한 것으로 묘사했다. 성탄과 같은 초라한 환경, 무거운 장례식장, 사도들의 태도와 성모님의 팔 사이의 완벽한 십자가 배열은 카라바조를 포용한 보로메오(Borromeo) 추기경으로부터 결합한 극빈자의 처지들을 암시했다.

 

  그리고 엉클어진 머리카락과 맨발을 드러낸 두 발은 성모님의 외롭고 슬픈 죽음을 암시해 주는 동시에, 그녀 또한 우리와 같은 존재이며 같은 상황에 놓인 인간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강렬한 빛이 성모님의 얼굴과 두 손을 비추고 있듯이, 거룩한 은총의 빛줄기는 평범한 우리에게도 똑같이 내린다는 것을 알려준다. 따라서 이 작품을 바라보는 우리가 “주님, 그녀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녀에게 비추소서.”라는 기도가 자연스럽게 떠올려진다면, 성모님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죽음과 구원을 한 번 더 묵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 작품에 대한 가르멜회의 거부, 이 작품으로 인한 로마의 수많은 고위성직자의 분노 그리고 카라바조와 관련된 살인으로 인해 그는 이주하여 망명 생활을 하게 되었다.

 

권영명 안드레아 신부

내포교회사연구소 부소장 겸 솔뫼 교구역사관 관장

 

 

 

1분 교리

 

Q-1) 성체성사란 무엇인가요?

A)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은총이 가장 큰 성사로서 천주교의 제사이며, 우리 영혼의 양식이 되는 성사입니다.

 

Q-2) 제병과 제주는 언제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되나요?

A) 성찬례 때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면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하신 말씀을 반복하는 순간에 빵과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됩니다.

 

Q-3) 영성체 준비는 어떻게 하나요?

A) 세례성사를 받은 신자만 성체를 영할 수 있으며, 고해성사를 받아 대죄가 없는 상태여야 합니다. 또한 영성체를 영하기 전 한 시간 전부터는 음식을 먹지 않도록 하는데, 이를 공복제(空腹齋) 혹은 공심제(空心齋)라고 합니다.

 

Q-4) 성체는 어떻게 받아 모시나요?

A) 왼손을 위로하여 성체를 받아 오른손으로 모시면 됩니다. 모시는 방법에는 성체와 성혈을 함께 모시는 양형(兩形) 영성체와 성체만 받아 모시는 단형(單形) 영성체가 있습니다.

 

 

기후변화위원회 보고서

 

+ 찬미 예수님 

 

  기후변화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양서류 40%, 산호초 33%, 해양 포유류 1/3 이상이 멸종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또한 2000년 이후 지구에서 매년 우리나라 전체 산림 면적과 비슷한 규모의 산림이 사라졌고, 동일 종의 유전적 다양성도 급격히 악회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생물 다양성은 대기 속의 공기와 식수를 정화하는 역할을 해 우리 삶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멸종의 주요 원인으로는 서식지 감소, 천연자원의 소모, 기후 변화, 환경 오염 등이 꼽혔습니다. 특히, 인간이 끊임없는 소비로 인해 대량 멸종이 진행되고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보고서는 앞으로 인류가 혁신적 변화를 꾀하지 않으면 생물 다양성과 생태계가 인간에게 제공하는 혜택은 2050년까지 계속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이번 보고서는 유엔 정부 간 기후변화위원회가 지난해 11월 지구 온난화의 재앙적 수준을 피할 수 있는 기간이 12년 미만이라고 경고한 지 6개월 만에 나온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기후변화위원회 보고서가 기후 위기를 정치적 의제로 내세운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 보고서를 통해 생태계 파괴 문제가 세계적인 의제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