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24년 주보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2024년 6월 2일(나해)

모든 2 2024. 6. 19. 21:44

 

갈산리공소(모산성당) / 그림 안종찬(바오로), 2022년

 

 

 

+ 마르코 복음 14,12-16.22-26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무교절 첫날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가서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 두 사람을 보내며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가거라. 그러면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를 만날 터이니 그를 따라가거라. 그리고 그가 들어가는 집의 주인에게, '스승님께서 내가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음식을 먹을 내 방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하여라. 그러면 그 사람이 이미 자리를 깔아 준비된 큰 이 층 방을 보여 줄 것이다. 거기에 다 차려라."

 

  제자들이 떠나 도성 안으로 가서 보니,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그대로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니 모두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

 

  그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산으로 갔다.

 

 

<말씀의 향기>

 

안될걸 알긴 허지만........그래도.......  - 송준명 프란치스코 둔산동 주임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입니다. 이날은 우리 신앙의 기본을 이루는 7성사 중, 가장 으뜸 성사요, 교회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거룩한 미사의 근간을 이루는 성체성사를 되새기는 가장 중요한 축일 중 하나입니다. 이 뜻깊은 날, 우리는 성체 성사의 의미를 기억합니다. 성체성사의 의미는 “감사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감사함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과 피를 온전히 우리에게 주시어 태초에 있었던 하느님과 인간의 사랑의 관계가 온전히, 완전히, 영원히 회복됨에 대한 감사함입니다. 우리는 종종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에게 가장 감사했던 일과 날들을 기념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온 마음을 다하고 그 마음이 드러나는 행동으로 감사함을 표시합니다. 사실 아무리 진실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그것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모습으로 드러내려 한다 해도 그 안에 진심을 담지 못하면 어색해질 뿐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런데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께 깊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정말, 정말로 성체성사를 세워주신 예수님께 진정 감사하고 계십니까?

 

  미사 5분 전 고해실을 나서 제의방으로 향하면 아직 휑하게 비어 있는 성전 좌석이 눈앞에 들어옵니다. 5분 후 다시 그 자리에 서면 어느샌가 꽉 차있는 신앙의 신비를 목격합니다. 목소리에 힘을 주어 복음을 읽고 강론을 합니다. 여지없이 4번째 줄 자매님이 3분 후 주보를 펼칩니다. 강론소리가 더 커지는 걸 막기 위해 고개를 숙입니다. 이제 성가책은 필요가 없습니다. 핸드폰만 열면 성가책이 나오니 편리해도 너무 편리합니다. 하지만 카톡도, 메신저도 여지없이 성가책과 함께 등장합니다. 성가도 부르고 문자도 하고 일석이조입니다. 저기 8번째 줄에 앉아 계신 형제님, 봉헌성가할 때 들어와 다리 꼬고 앉아서 핸드폰하고 계신 분인데 영성체하러 나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듭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어김없이 적중합니다. 영성체 성가는 늘 오르간 독주로 이어지고 아멘 소리는 들리지 않은 지 오래요, 그 아멘을 대체해 버린 목례하는 영성체, 무릎을 구부리는 영성체, 두 발자국 떨어져서 배달하라는 영성체 그리고 묵언수행의 영성체가 일반화된 우리 성당의 모습입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공지사항에 얘기할까 말까 수없이 망설이지만, 이야기하면 꼰대라 말할까 봐, 이야기하면 화냈다 얘기할 까봐, 이야기하면 잔소리한다 투덜댈까 봐 또 여지없이 좋은 게 좋은 거지, 성당 나오는 게 어디야라고 스스로 위안하며 사목자로서 하지 말아야 할 불의한 타협을 시도합니다.

 

  진정 신앙인이 성체성사를 대하는 것이 감사함의 의미를 담고 있다면, 그것이 마음을 담은 행동으로 드러나면 좋겠습니다. 지금과는 좀 다른 모습으로 바뀌고 달라지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목숨까지 바치셨는데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사실 안될 거라는 거 알긴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이야기해 봅니다. 조금은 바뀌어 보....자....고....좀...제....발!!!

 

 

 

대전교구 관련 포교성성(현, 복음화부) 자료 소개 4

1948년 6월 14일 서울대목구장 노기남 주교가 서울에서 포교성성으로 보낸 서한

 

  서울대목구장 노기남 주교는 주한 교황순찰사 패트릭 번 몬시뇰을 통해서 성좌의 새로운 결정이 공포되었다고 전하였다. 아울러 충청남도에 새로운 지목구가 설립되었 고, 그 새로운 지목구의 서리로 라리보 주교가 지명되었다 고 알렸다.

 

  노기남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이 서울대 목구를 떠나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들이 새로운 지목구에서 좋은 선교의 열매들을 맺기를 바랐다. 하지만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아직 새로운 지목구로 출발하지는 않았고, 가능한 한 빨리 새 지목구 서리 라리보 주교와 협의하여 새 지목구를 구성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최근에 존경하는 패트릭 번 몬시뇰을 통해 교황청의 또 다른 새로운 결정이 공포되었습니다. 이는 충청남도에 새 로운 지목구를 설립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드리앙 라리보 주교를 새로운 지목구의 지목구장 서리로 지명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자비로운 (프랑스) 선교사들을 떠나 보내야 해서 슬픔에 잠기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롭고 더 큰 효율성으로 한국 교회를 위해 가장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새로운 지목구가 세워졌기에 설렙니다. 선교사들은 아직 새로운 지목구로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새 지목구를 설치하려면 가능한 한 빨리 새 관리자와 모든 것을 준비해야 합니다.”

포교성성 역사문서고

Nuova Seria, vol. 1649(1947-1949), rubr. 36-2, prot. 2759/48, f. 525-526.

 

  이 내용에 이어지는 주제는 주한 교황순찰사에 관한 것이다. 노기남 주교는 포교성성에 주한 교황순찰사 패트 릭 번 몬시뇰이 가능한 한 빨리 대주교로 축성되고, 그가 주한 교황사절 또는 교황특사로 임명되기를 요청했다. 곧 한국은 독자적인 정부를 갖게 될 것이니, 지금이 교황 청이 한국 정부에 교황사절이나 교황특사를 둘 수 있는 적절한 시기라고 보았다. 이를 통해 한국 국민에 대한 교 황청의 권위도 더 커질 수 있다고 여겼다. 그렇기에 노기남 주교는 한국 교회의 선익을 위해 번 몬시뇰을 대주교로 임명할 것을 제안했다.

-권영명 안드레아 신부 내포교회사연구소 부소장-

 

 

 

가톨릭 신자로서 알아야 하는 <미사> 82.

 

미사 해설 – 마침 예식(5) : 파견 (2)

 

  윤진우 세례자요한 신부 사목국 부국장 마침 예식이 끝나면, 사제와 부제는 입당할 때와 같이 제대에 깊은 절을 하고 제단에서 내려와 봉사자들과 함께 제단 앞에서 깊은 절을 하고 퇴장행렬에 들어갑니다. 특별한 날에 공동 집전 사제가 있거나 공동 집전 사제가 많은 경우에는 본당 사정에 따라 전례 예 절 책임자가 퇴장 예식을 진행, 안내해야 합니다. 퇴 장 행렬은 봉사자부터 순서대로 하며, 주례사제는 마 지막에 퇴장을 합니다.

 

  파견성가에 대한 지침은 「성음악 지침」 65항에 제 시되어 있습니다.

  “사제의 파견 다음에 파견 노래를 부를 수 있다. 파견 노래는 미사 전례를 통하여 받은 하느님의 은총을 기뻐하며 바치는 감사의 노래, 사도직과 봉사에 관한 주제나 전례 시기와 해당 성월에 적합한 노래, 그 축일의 신비를 반영하는 노래를 부르고, 필요하다면 이를 기념하는 공동체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

 

  미사 안에 봉헌되는 성가의 모든 부분도 그렇지만, 특별히 파견성가가 갖는 의미, 그리고 파견성가를 선택하기 위한 기준에 대해서도 우리가 분명히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파견성가를 마친 후,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교우들이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과 같은 공동 기도를 바치지 않아야 합니다. 사목구 주임의 판단, 본당 공동체원들의 지향에 따라 공동 기도문을 바칠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미사가 종결되었다는 의미로의 강복과 파견을 퇴색시키고, 나아가 일상에서 계속되어야 할 전례의 정신과는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을 숙지하여, 우리 본당 공동체에서, 특별히 본당에서 전례 봉사자를 맡고 있는 분들과 사목구 주임과의 논의를 통해 그 본연의 정신을 살아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파견성가를 마치고 모든 예절이 끝나고 교우들이 성전을 빠져나올 때, 성당 안에서 교우들끼리 인사나 악수를 나누며 소란스럽게 하는 일을 종종 보게 됩니다. 이런 행동은 성당 안에 잠시 머물며 침묵을 지키고 기도를 하는 이들에게 결례를 범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미사가 끝나고 퇴장을 바로 하는 것보다 조용히 성체 앞에 머물며, 하느님의 집을 미사가 끝나도 기도하는 집으로 남겨두는 것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자세입니다. 교우들끼리의 인사는 성전에서 물러나와 밖에서 인사와 대화를 나누고, 성전에서는 침묵 속에 기도하고, 성체 앞에 머무르는 이들의 공간으로 지켜주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겨진 사명이자, 합당한 자세임을 되새겨보았으면 합니다.

-윤진우 세례자요한 신부 사목국 부국장-

 

 

성지를 걷다_지석리성지(3)

 

3. 지석리성지 

 

 1866년 병인박해 때, 박해의 칼날이 교우촌을 덮쳐왔고, 손선지 베드로 성인과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성인은 결국 12월 3일 포졸의 손에 붙잡히게 되었다. 두 성인은 혹독한 형벌 속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았고, 결국 12월 13일 하늘나라로 가는 기쁨 속에서 처형되었다. 두 분의 무덤은 전주교구 천호성지에 있으며, 두 분 모두 1984년 한국을 방문한 요한 바오로2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지 관할 본당인 홍산 성당에서 성인의 유해를 만나볼 수 있다. 2021년 9월 손선지 베드로 성인의 유해, 2022년 10월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성인의 유해가 홍산 성당에 안치되었다. 제대 뒤편, 감실 아래의 유해대 안에 두 분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으니, 순례객들은 지석리 성지의 순례 전후로, 성당을 방문하여 참배할 수 있다.

△ 손선지 베드로 유해 △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유해

 

 

이충무의 숨은 행복 찾기(81)

 

하되, 하지 않고

 

  유명한 화가가 되기 위해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림 그리는 일에만 정진하는 성실한 제자에게 스승이 어느 날 물었습니다.

 

  “그대는 어떤 그림을 그리려고 그리 열심인가?”

  “단순하되 초라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하지 않으며 웅장하되 거만하지 않고, 섬세하되 산만하지 않은 그런 그림입니다.”

 

  잠시 후 스승이 다른 질문을 던졌습니다.

 

  “혹시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런 사람들을 본 적 있는가?”

  “어떤 사람들 말입니까?”

  “서두르되 성급하지 않고, 느긋하되 게으르지 않으며 유쾌하되 경박하지 않고, 과묵하되 답답하지 않은 사람 말일세.”

 

  아무리 생각해 봐도 주변 어디에서도 그런 사람을 만난 기억이 없기에 혹시 스승님은 그런 사람을 본 적 있는지 여쭤 보았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그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런 일은 실로 불가능한 일이지. 그림도 마찬가지야.”

  “그럼, 저는 헛된 꿈을 꾸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건가요?”

  “그렇지는 않아. 단지, 난 자네가 좀 더 자네의 일을 즐기길 바랄 뿐이네.”

  “무슨 말씀이신지...”

  “생각해 보게. 밤이되 너무 어둡지 않길 바라는 사람과 어둡되 밤이 지나면 빛이 올 것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 중에 누구의 하루가 평온하겠나?”

 

  제자는 다음 날부터 그림을 그리는 표정도 한결 더 평온해졌고, 붓놀림 또한 더 과감하고 자유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되 하지 않고’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하면서 하지 않을 것을 조금씩 줄여나가는 과정 자체가 기쁨인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먹어갈수록, 경험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균형을 잃고 점점 더 한쪽으로 치우치는 사람으로 변해가는 제자신의 모습을 종종 발견할 때가 있습니 다. 성격 탓인지, 노력 부족 때문인지, 인격이 성숙하지 못해서인지 그 원인을 자꾸만 자기 자신에게 찾으면 찾을수록 마음의 평화는 점점 멀어져 갑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밤이되 너무 어둡지 않길’ 바라는 그런 무모한 강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습니다. 대신 밤이어도 빛이 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어두움마저 품에 안아 보렵니다. 주님은 완벽한 균형을 완성한 우리가 아니라, 한 발 한 발 균형을 향해 걷는 걸음이 늘 깃털처럼 가벼운 우리를 더 어여삐 여기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충무 바오로 극작가, 건양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