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3년 주보

설 연중 제5주일 2013년 2월 10일(다해)

모든 2 2021. 5. 23. 12:44

「축복」 홍정수 신부(2013)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 루카 복음 12,35-40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은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말씀의 향기>

 

하느님의 품을 준비하는 사람 "하느님의 품은 따뜻한 마음" -박진홍 요셉 청소년사목국장

 

  설날입니다. 만약 우리 어린이들에게 설날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그림으로 그려 보라고 한다면 거의 대부분 활짝 웃는 표정을 그릴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긴 어린이들의 생각만이 아니라 한국사람 대부분의 마음 안에서 설날은 그처럼 행복한 이미지로 인식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멋들어진 한복과 선물 보따리를 가득 안고 고향을 찾는 활짝 웃는 얼굴, 또 반가운 표정으로 가족들을 맞이하는 부모님들의 모습 등 말입니다.

 

  하지만 설날은 꼭 그런 이미지만 있는 건 아니지요, 극심한 교통체증 속에서 좁은 차 안에 갇혀 짜증을 낼 법도 하고, 특히 올 해는 연휴가 짧아서 더 그렇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선물, 준비, 부모님 용돈 준비가 힘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날'하면 '행복하다'라고 하는 이미지가 크게 자리를 잡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건 '고향'이라고 하는 이 매력적인 단어가 주는 이미지가 아닐까요? 두 팔을 벌려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그 품에 대한 그리움이 우리들의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설날은 정말 삶의 현장에서 힘들게 살아온 이들의 지친 마음을 위로해 줄 따뜻한 '품'이 있는 날입니다. 그러면서 저는 신학교를 추천해 주신 신부님의 말씀 한 마디가 떠오릅니다.

 

  "명절 오후! 텅 빈 성당에 머물며,혹시라도 성당을 찾아오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사제가 되기를 바란다."

  명절 오후,가족과 함께하지 못하고, 따뜻한 품이 그리워 예수님을 찾아오는 의롭고 아픈 이들을 두 팔 벌려 안아줄 준비를 하라고 신학생 시절에 해 주신 그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참으로 멋진 고향이 늘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교통체증이 아무리 심해도 그 한가운데를 뚫고 달려가면 그리운 고향이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 수많은 아픔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한가운데를 뚫고 용감하게 달려가면 두 팔 크게 벌려 우리를 안아줄 하느님 나라가 있다는 믿음이 얼마나 행복한 믿음인가? 그러한 믿음이 우리 안에 살아있다면, 우리는 지치고 힘들어하는 우리 이웃에게도 그 품을 전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 이기에 더욱 아픈 이들에게 고향과 같은 사람, 하느님의 품을 보여줄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이 말씀이 신앙인으로서 설 명절을 맞이하는 우리들에게 더욱 풍요로운 설 이야기를 해 주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청소년 바로 보기(11)>

 

이 시대 아파하는 청소년 ⑥

 

 사 회의 가치관이 중심을 잃어버리면 그 사회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그 사회가 스스로 중심을 잃어버린 것인지, 스스로 혼란에 빠진 것인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이유는 서로가 가진 것을 나누어서 모두가 행복하기 위한 것이지, 어느 특정인만이 행복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모두가 행복하기 위한 지향을 가진 가치관을 소중하게 지켜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말씀을 드린다면 이 시대 청소년들에게 가슴 깊이 새겨져야 하는 가치관은 치열한 경쟁에서 이기고 살아남는 이가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경쟁의 논리가 아니라 서로가 도우며 사랑하며 살아갈 때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사랑의 논리인 것입니다. 그것이 기준이 될 때, 그 기반 위에서 이 시대 청소년들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 아파하고 있는 청소년들의 모습을 보면 하나같이 왜곡된 가치관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입은 상처를 싸매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가끔씩 후배 신부님들로부터 본당에서 청소년사목을 하다가 청소년을 자녀로 둔 부모님으로부터 "우리 아이 대학 못 가면 신부님이 책임지실 거예요?"라는 질문받으면 뭐라고 답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을 때면 숨이 막히고 가슴에 못이 박히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어떤 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라, 그 질문을 하시는 분들은 도대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계시는 걸까? 그 가치관이 얼마나 많은 청소년들을 죽음의 문화로 몰아가고 있는지 아시기는 아는 걸까? 하는 생각 때문에 그렇습니다.

 

  토요일이나 주일에 청소년들과 함께 장난을 치고, 깔깔깔 웃으며 지내시는 젊은 신부님들이 대학 진학을 책임질 수 없다는 말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아이의 영혼이 하느님 나라를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도대체 누가 책임을 진다는 말입니까?

 

  "그건 나중에 해도 됩니다. 일단 우리 아이는 남들보다 성적이 떨어져서 눈앞에 있는 것이 급합니다." 많은 분들이 공부를 해야 할 때가 있고, 그 시기를 놓치면 안 된다고 말을 합니다. 저 역시 그 말에 공감을 합니다. 제발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지만 공부를 할 때를 말씀하시는 많은 분들의 경우, 공부 이야기가 아니라 경쟁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또한 '공부의 시기'가 중요한 것처럼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사랑의 시기'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청소년기는 사랑을 가슴에 담아야 할 가장 중요한 시기이며, 그 시기를 놓쳐서는 결코 안된다는 것입니다.  공부의 시기를 놓쳐서 평생 아파하는 이들보다 '사랑의 시기'를 놓쳐서 평생 아파하는 이들이 우리 시대에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박진홍 신부. 청소년사목국장-

 

 

<미사 속 숨은 보화>

 

잔 축복기도:

약속의 땅에서 누리는 행복과 생명의 잔

 

  사제는 포도주와 물을 섞은 잔을 축복하며 주님께 바칩니다. 포도주는 예수님 시대에 종교적 식사나 축제 식사 때에 마시는 음료였고, 축제가 아니더라도 가정이나 단체의 중요한 모임에서 흔히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이 포도주를 축제의 기쁨, 약속, 약속의 땅에서 누리는 행복, 생명, 희생 등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의미를 담아서 사제는 '기도합니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주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로 저희가 포도를 가꾸어 얻은 이 술을 주님께 바치오니 구원의 음료가 되게 하소서" 참고로 미사요 포도주는 포도 열매로 빚은 순수 자연 포도주 라야 합니다.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5)  -최동일 신부. 사무처 차장

 

제1부-제1장-제3절 성경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 담긴 책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규범이 되는 책이다. 성경은 비록 인간 저자에 의해, 인간의 언어로 쓰여졌지만, 그 모든 과정이 성령의 영감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성경의 진정한 저자는 하느님이시다. 따라서 그 가르침에 오류가 있을 수 없다. 이처럼 성경 자체는 구원에 관한 진리를 오류 없이 담은 책이지만, 성경을 읽는 우리가 올바로 읽지 않으면 성경의 가르침을 오해하고, 잘못  해석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성경을 읽는 가장 중요한 원칙은 성령의 도움을 청하며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기록하도록 저자에게 영감을 주신 분이 성령이므로,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역시 같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만 오해 없이 그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저자는 하느님과 동시에 또한 사람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이다. 물론 성령의 영감 속에 성경의 저자는 성경을 기록했지만, 그 과정 중에 성경의 저자가 살고 있던 당시의 사회적 환경이나, 언어, 문화, 문학 양식 등 많은 인간적 요소들이 성경에 담겨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역사적이고 문학적인 비평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이를 고려하면서 읽어야 한다.

 

  성경은 어느 날 갑자기 쓰여진 책이 아니라 1,000년  이상의 긴 시간에 걸쳐서 전해지고 쓰여져 지금 현재의 성경으로 최종 완성된 책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문서들이 저마다 성령의 영감을 받아 쓰여졌다면서 등장했다. 이에 교회는 성경이라 주장하는 수많은 문서들 중에 진실된 하느님의 말씀을 담은 참 성경과 거짓된 문서들을 구별할 필요성이 생겼다. 이는 교회가 사도들로부터 전해받은 신앙의 유산을 순수하게 지키고 후대에 전달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따라서 교회는 사도들로부터 전해받은 전승을 기초로 하여 어떤 문서들이 성경의 목록에 포함되어야 할지를 판단했고, 이렇게 하여 확정된 목록을 성경의 '정경'이라 부른다. 이 정경의 목록에는 구약성경의 46권과 신약성겨에 27권이 들어있다.

 

  구약성경에 세상 창조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 계시하시는 바가 기록되어 있다. 신약성경은 하느님의 외아들이요.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우리에게 완전히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가 기록되어 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결코 둘이 아니라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하나를 이룬다. 왜냐하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둘 다 같은 하느님의 말씀이며, 인간의 구원이라는 같은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은 구약성경 안에 숨겨져 있으며,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을 통해 드러난다. 따라서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에,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에 비추어 읽어야 한다.

 

 

 

사그락 사그락

그믐달 노 젓는 소리

 

멍! 멍!

옆집 강아지 화답 소리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