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3년 주보

연중 제4주일 2013년 2월 3일(다해)

모든 2 2021. 5. 23. 12:11

「경탄」 김진 신부(2013)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루카 4,22)

 

+ 루카 복음. 4,21-30

 

<예수님께서는 엘리야와 엘리사처럼 유다인들에게만 파견되신 것이 아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또 엘리사 예어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말씀의 향기>

 

은총의 말씀  "지금 이루어지는 말씀" -김민희 바오로 보령 동 대동 주임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은총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듣고 읽고 쓸 때마다 내 마음이 기뻐지고, 묶여 있던 것들이 풀어지고,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만날 때마다 이처럼 놀라운 은총을 선물로 받습니다.

 

  말씀은 언제나 우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집니다. 말씀의 은총은 내일도 아니고 앞으로 받을 것도 아니며 바로 오늘 말씀을 듣는 이에게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우리는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시대가 아니라 말씀을 듣는 그 자리에서 말씀이 이루어지는 놀라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말씀이 완성되는 시간은 언제나 오늘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는 사람의 태도가 올바르지 않고, 진실하지 않다면, 말씀의 완성은 다음으로 미루어질 것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말씀 자체를 보지 않고, 예수님의 성장환경과 출새신분만을 봅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선입견과 편견에 말씀이 가리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은 그들 사이를 뚫고 들어갑니다. 그들이 선입견과 잘못된 생각들을 낱낱이 드러냅니다. 말씀의 빛 속에서 숨겨져 있던 어둠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의 놀라움이 어느새 불편함과 분노로 바뀝니다. 곧바로 이어지는 말씀에 대한 부정과 핍박, 은총의 말씀이 또 한 번 버려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은 꿋꿋하게 그 한가운데를 지나, 말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이들에게 다시 다가갑니다.

 

  이처럼, 말씀은 늘 우리를 '선택'으로 인도하는 쌍날 칼입니다. 빛 속에 드러난 내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불편함과 분노로 애써 나를 감추며 그 빛을 다시 몰아내는 것도, 언제나 내 선택의 몫입니다. 은총의 말씀이 가져오는 기쁨과 불편함을 함께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체험한 사람만이 세상의 두꺼운 편견과 욕망의 그물 한가운데를 뚫고 복음을 선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루어지는 말씀의 놀라움을 세상에 담대하게 전하는 복된 증인이 됩시다! 아멘.

 

 

<청소년 바로보기(10)

 

이 시대 아파하는 청소년⑤

 

  오늘날 우리 청소년들이 만나는 이 시대의 환경에 대해서 저는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이런 비유를 들곤 합니다.

 

  예을 들어 우리 사회는 1,000명의 청소년들에게 목적지를 향해 힘차게 달려가라고 이야기를 하고는 저마다의 꿈을 가지고 힘차게 달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청소년 여러분, 목적지에는 생존할 수 있고, 나머지 998명은 이 사회에서 도태되는 것입니다." 마치 의사나 검사, 판사사 되지 않으면, 우리 사회에서 낙오자가 된다는 식의 표현인 것이죠! 만약 이 새빨간 거짓말을 청소년들이 사릴로 인정한다고 할 때, 달리기를 하고 있는 우리 청소년들에게는 어떤 현상이 나타날까요? 선두 그룹에서 달리기를 하는 몇 명의 청소년들은 그 두 자리의 가능성을 생각하며 달릴 테지만..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왜 이런 달리기를 하고 있는지 그 목적지나 의미를 잃어버리고 그야말로 의미 없는 습관적 달리기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존재를 다른 이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특히 청소년 시기에는 더 그렇겠죠! 결국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다른 형태의 자기표현이 나타나게 됩니다. 경쟁에서 다른 이를 이기는 것이 우선 과제라고 이야기하는 사회이기에, 폭력이 경쟁에서, 외모의 경쟁에서, 가지고 있는 물건의 경쟁에서나마 이기고 싶어 하는 이들도 등장하며, 그런 갖가지 경쟁들에서 돌파구를 찾지 못해 정신적 질환으로 관심을 청하는 이들도 생겨납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 여기 있어요. 나 좀 봐주세요!"라고요.

 

  사실은 모두가 피해자인 것이다. 목적지에 먼저 도달한 친구들도, 무의미한 달리기를 하는 친구들도 모두 우리 사회에 만연된 잘못된 가치 속에 피해를 보고 있는 피해자들이라는 것이죠. 사실 목적지에는 두 자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2,000여 개의 자리가 있다는 것을 우리 청소년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돈의 논리로 따지자면 우리 사회는 정말 두 자리만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랑과 행복의 논리로 본다면 이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의사, 검사, 판사, 학자, 상인, 일용직 노동자, 또는 예술가로서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자신과 이웃을 아프게 만드는 이들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시대가 청소년에게 가르쳐 주어야 할 것은 의사, 검사, 판사가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과 이웃을 행복하게 만드는 이가 되는 것이 목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이런 엉터리 경쟁을 누가 왜 부추기고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미사 속 숨은 보화>

 

포도주에 물을 섞음: 신성과 인성의 결합

  빵의 축복기도를 바친 다음 사제나 부제는 성작에 포도주를 붓고 소량의 물을 섞습니다. 포도주에 물을 섞어 마시던 고대의 관습이 그대로 예식에 들어온 것인데, 교부들은 여기에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①그리스도의 늑방에서 흘러내린 피와 물 ② 교회와 성사 ③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④ 하느님의 신 그리스도와 피조물인 인간. 사제는 이런 의미를 담아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간인 신자 공동체의 결합을 상징하는 기도문을 바칩니다. "이 물과 술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4)  -최동일 신부. 사무처 차장

 

제1부-제1장-제2절 하느님 계시의 전달

 

  하느님께서는 계시를 통해서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또 당신의 계획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이 계시는 역사를 통해서, 특별히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통해서 점차적으로 이루어지다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전히 이루어졌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 자체가 사람이 되신 분이시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요 예수님의 행적은 곧 하느님의 행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듣고 봄으로써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분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가림움 없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 중에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직접 듣고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듣고 볼 수 있을까? 그것은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지는 신앙의 유산을 통해서이다.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제자를 특별히 선발하였고 그들과 함께 하시면서 수많은 말씀과 행적을 하셨다. 이 12명의 제자들은 사도들이라 불리었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특별한 권한과 소명을 주셨다. 그것은 바로 사도들이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직접 듣고 목격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들 그리고 성령의 영감에 의해 깨달은 예수님에 대한 진리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예수님은 직접 목격한 사도들에 의해 형성된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우리는 '사도전승'이라고 부른다. 이런 사도전승은 다음의 두 가지 방식으로 전달되었다.

 

  1) 사도들의 설교나 가르침, 행동의 모범을 통해 전달(성전).

  2) 사도들이나 그 측근의 제자들이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한 글을 통해 전달(성경)

 

  사도전승이 두 가지 전달 방식인 성전과 성경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 둘은 모두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똑같은 샘에서 기원되며, 세상 모든 이를 구원하고자 하는 같은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둘은 모두 같은 성령의 작용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긴밀성이 있다. 따라서 이 둘 중 무엇하나 가 더 높거나 낮은 것이 아니라, 둘 다 똑같이 중요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님이 직접 목격자인 사도들 또한 세상을 떠날 시점이 다가오게 되었다. 이에 사도들은 후계자로 주교들을 두고 자신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전해받고 성령에 의해 깨달은 진리들을 전해줌으로써 이것이 세상 끝날까지 전해지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전해지는 성경과 성전을 두고 수많은 해석과 입장들이 교회 내에 있어 왔고 그중에는 잘못된 해석도 많았다. 그러므로 이런 수많은 목소리들 가운데 무엇이 진정한 계시의 메시인지를 분별해 내는 일이 매우 중요한데, 예수님께서는 이 권한을 교황님, 그리고 교황님과 일치하는 주교들에게 주셨고 이를 교도권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성전과 성경 그리고 교도권은 그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되며 서로가 서로를 비추며 계시의 전달을 이루는 핵심 요소들이다.

 

 

 

축복하소서

내 육신에 흐르는 땀과 피

밑거름 되어

아득하게 피어난

순리와 이치

 

글. 그림 이순구 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