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변윤철 신부(2012) 성탄, 서천 어메니티 복지마을 세례식)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 루카 복음. 3,15-16.21-22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렸다.>
그때에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말씀의 향기>
우리가 바라는 지도자 "사랑하는..마음에 드는.." -박재준 토마스 하기동 주임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시고,공생활을 시작하신 것을 기념합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 예수' 께서는 이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삶을 시작하십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내 마음에 든 아들이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셨습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선 나의 안정된 삶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광야로 나아가 혹독한 시련을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버리셨습니다. 포기할 수 없고 지켜야 하는 모든 것들을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진실한 마음을 전하셔야 했습니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고, 성실하게 공정을 펴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세상에 전하셔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부러진 갈대가 되고, 깜빡거리는 심지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공정하지 못한 세상에 하느님의 공정을 선포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아 곧 구세주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을 '구세주'라고 믿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위해서,공동체를 위해서 내가 가진 것을 버리지 못합니다. 지켜야 할 것,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세상을 위해서,진리와 정의를 위해서 자신을 포기한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민주화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이웃을 위해서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놓은 이태석 신부님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분들처럼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서로 자신의 것을 어느 정도 포기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말입니다.
얼마전 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새로운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진정 그러한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며 진정으로 노력하는 지도자의 길을 걷기를 애타게 기도합니다.
<청소년 바로보기(7)>
이 시대 아파하는 청소년(2)
엊그제 제가 존경하는 원로 신부님께서 지난번에 제가 쓴 '청소년 이미지에 대한 편견(4)'에서 저의 실수를 지적해 주셨습니다. 제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8.15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고 잘못 쓴 것이 있습니다. 지면을 통해 사과드립니다. 그런데 사실 전화를 받고 잘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보다는 오히려 저의 글을 관심 있게 봐주시는 신부님의 마음을 느끼며 행복했습니다. 신부님 사랑합니다.
여기서 잠깐 이야기의 화제를 돌려서 1900년대 초에 영국에서 활동했던 여성 심리학자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on)의 연구 내용을 이야기해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직접 공부한 것은 아니고 제가 좋아하는 어느 상담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던 대상관계 이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다른 공부는 겁나게 못하는데, 청소년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머릿속에 쏘옥 쏙! 들어가서 지워지지를 않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참 신기합니다.
우리는 음식을 먹을 때, 그 음식을 통해 필요한 영양소를 섭취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영양소만을 따로 먹지는 않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요.. 예를 들어 우리 몸에 필요한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 같은 영양소를 직접 가루로 만들어서 씹어 먹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통해 그 음식 안에 있는 영양소를 간접적으로 섭취하게 된다는 것이죠. 만약 음식에 문제가 있으면 그 안에 아무리 훌륭한 영양소가 들어있다 하더라도 섭취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현상이 청소년들의 정신 건강에도 비슷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비유를 들자면 정신건강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하는 영양소입니다. 그런데 청소년들은 그 사랑을 직접 섭취하는 것이 아니라, 칭찬이나 따뜻한 대화, 행복한 기억이라고 하는 음식을 통해 그 안에 담긴 사랑을 섭취하는 것이지요.(계속)
-박진홍 신부. 청소년 사목국장-
<미사 속 숨은 보화>
성찬 전례 : 신자들의 미사, 봉헌미사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는 성찬 전례를 "신자들의 미사", "봉헌미사"라고 불렀습니다. "신자들의 미사"라고 불린 이유는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말씀 전례가 끝이 나면 세례를 받지 않은 예비신자들은 자리를 비우고, 세례를 받은 신자들만이 미사에 남아 성찬예식을 계속 진행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 사자상 제자가 재현되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영하는 성찬 전례에 대한 교리를 예비신자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상황에서 불필요한 오해를 주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봉헌미사"라고 불린 것은 이 전례가 교우들의 예물 봉헌에서 시작하고 감사기도에서 십자가의 제사가 재현되면서 참된 제물이신 그리스도가 봉헌되기 때문에 붙인 명칭입니다.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2) -최동일 신부. 사무처 차장
제1편 - 제1부-제1강 하느님을 깨달을 수 있는 인간
인류는 끊임없이 기술을 혁신시켜왔고, 거대한 건축물을 세워왔으며, 문화와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왔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이런 발전에 만족할 수 있는가? 과연 우리가 그토록 애써서 이루고자 하는 이 모든 성장들은 그 최종 목표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끊임없이 발전한다는 그 사실 자체에 그저 우리는 만족하며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이 질문은 결국 인간은 무엇 때문에 사는가?라는 인간 존재 자체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다. 일상적으로 살아가면서 이런 질문들은 우리들의 관심을 크게 끌지 못한다. 세상의 온갖 복잡한 것들에 마음이 분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마치 어떤 이가 목적지도 없이 아무 기차나 올라타서 그저 창밖의 풍경에 매료되어 창밖만 바라보다가 결국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 왜 왔는지도 모른 채 종착역에 내려서 당황해하는 것과 같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시작은 인간 존재의 이유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하여, 인간은 그 기원도 하느님이요 그 목적지도 하느님이라는 것이 그 답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반드시 하느님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을 맺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의 이런 본성을 가리켜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인간은 종교적 존재'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처럼 인간은 하느님에 의해, 하느님을 향해 창조된 존재이기에 모든 인간은 어떤 특별한 종교의 가르침을 통하지 않아도 스스로 의 사고 능력으로 하느님에 대해 완전히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알 수가 있다. 대표적으로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러한데 이를 이성적으로 알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이다. 외부적으로는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보면서 그 모든 것들과 그것들을 움직이는 질서를 지워준 창조주로서의 하느님의 존재를 알 수 있다. 내부적으로는 우리 안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양심을 심어주신 분, 무한한 행복에 대한 갈망을 심어주신 분으로서의 하느님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우리가 제대로 사고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요소들이 매우 많으며, 하느님에 대한 진리는 우리 인간의 사고 범위를 무한히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스스로의 사고 능력으로 하느님에 대해 알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나 지극히 한정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하느님에 대해 보다 더 잘 알기 위해서는 이성을 넘어서 신앙으로 받아들여지는 하느님의 계시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렇게 모든 인간은 종교적 존재로서 각자가 타고난 능력으로 하느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와 종교가 다르거나, 아직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세상 모든 사람들과도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출발점을 마련해 준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서릿발 성성한
이 시간
내 영혼 맑게 씻어
청청한 내일을
살게 하소서
글. 그림 이순구 ((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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