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변모」홍종렬.대전가톨릭사진가회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9,35)
+ 루카 복음 9,28-36
이 말씀을 하시고 여드레쯤 되었을 때,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일,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는 소리가 났다.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말씀의 향기>
신수가 훤하다 -김광호 요셉 반석동 주임
예전에 알고 있던 사람을 오랫동안 보지 못하였다가 최근에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의 달라진 모습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럼 이럴 때 무엇이라고 인사를 하겠는가?
그전보다 훨씬 예뻐졌다면 아마도 어딘가 성형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어디서 수술했어?" 라고 물어볼 것 같다.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면 "어디 명품이야?" 라고 물어볼 수도 있다. 지금은 잘 쓰지 않지만 "신수가 훤하다" 라고 말문을 열고 '무슨 좋은 일이 있었어?" 라고 물어 보지 않았을까? 이 말을 사전적으로 해석하면 '드러나 보이는 사람의 겉모양이 밝아졌다' 는 뜻이다. 얼굴,몸,지니고 있는 옷이나 액세서리 등 모든 것이 그전과는 달라 보이며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니 변화의 오묘함을 빛이 난다고 표현한 말일 것이다.
수술을 하건 명품을 걸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신수가 훤해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해서 신수가 변하는 것 같지도 않다.
근본적인 것을 "마음"이라고 한다. 마음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중에서 현대에서 사용할 수 있는 말로 바꾼다면 아마도 자신에 대한 긍정,자긍심,또는자기애,자기 정체성 등의 의미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일을 통하여 자신을 긍정하는 면이 생기고 경제적으로 나아졌다는 점을 통하여 자신을 꾸밀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이며, 수술이라는 조금은 극단적인 방법을 통하여 자신을 콤플렉스를 제거함으로써 자기애와 정체성을 확립할 기회를 가졌던 것은 아닐까?
성경은 예수님의 모습을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말로 하면 신수가 훤해진 것이다. 이를 '거룩한 변모'라고 줄여서 이야기 한다.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냈으며 하느님께 속하였을 때의 모습을 드러내 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언제나 일을 마치시고 나서 홀로 기도하셨다. 홀로 기도하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세상과 떨어져 온전히 하느님께 머물러 있는 시간이 아니겠는가? 그럴 때에 언제나 자신의 본모습과 함께하지 않았을까?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있는 시간,그분 안에 머물러 있는 시간만큼 행복한 시간이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는 부족하기에 때로는 사람들로부터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심어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머물러 있어서는 허탈한 경험만 할지도 모른다.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으 자녀가 되었음을 말하는 우리에게 그분의 사랑을 받는 것만큼 소중한 것이 있을까?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당연히 신수가 훤할 것이다. 비록 우리의 모자람으로 그 끈을 놓쳐 절망하기도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분의 우리를 기억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곳에서부터 우리의 희망이 시작한다는 것을...
<청소년 바로 보기(13)>
청소년 신앙 교육의 목표(1)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언젠가 고등학교 1학년쯤 된 여학생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열이 펄펄 나도록 아픈 네가 잠결에 눈을 떴을 때,네 곁에서 밤새 너를 지켜 주시는 예수님과 눈을 마주치면 어떤 느낌이 들겠니?" 그러자 그 친구는 지체 없이 대답을 했습니다. "겁나게 무서워요!" 포근한 이미지의 예수님을 상상하던 저에게는 솔직히 당혹스런 답변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답변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더라구요! 사실 당시 그 친구가 대답한 '무섭다'라는 표현의 의미는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 있는 부족하고 죄 많은 인간의 모습을 표현한 그런 복잡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공포 영화에 나오는 귀신이난 범죄자의 얼굴을 상상한 표현이었습니다. 지금 그 친구의 입장에서 제가 다시 한 번 상상을 해 보면 그럴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날 잠을 자다가 눈을 떴는데,어두운 방에 턱수염이 수북한 외국 남자가 머리를 풀어 헤치고 피를 뚝뚝 흘리고 서서 나를 보고 있다면... 그야말로 공포 영화가 따로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여러 청소년들에게 해 보면 하나같이 공감을 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어쩌다가 청소년들 사이에서 이런 모습이 된 것일까요?
문제는 예수님의 이미지에 대한 인식 과정입니다. 청소년 100명을 앉혀 놓고 그려보라고 하면 다를 비슷하게 그려내는 그 예수님의 얼굴! 멀 길고, 얼굴 갸름하고 코수염과 수북한 그 외국 남자! 도대체 누굴 상상하고 있는 걸까요? 어쩌면 예수님 영화에 나오는 미국인 주연배우 '제프리 헌터'(Jeffrey Hunter)나 '제임스 카비젤'((James Caviezel)의 얼굴을 그린 것이 아닐까요? 또는 예수님을 표현한 각종 작품들에서 간접적으로 만나는 이름 모를 모델의 얼굴을 그린 것은 아닐까요? 하긴 예수님의 이미지를 형화 배우의 얼굴이나 이름 모를 모델의 얼굴로 인식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라는 생각도 해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 교육을 하는 입장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건 조금 심각한 문제가 될 수가 있습니다. 어린이,청소년들 마음 안에 미사 중에 성체를 통해서 마나는 예수님의 이미지보다 훨씬 더 크게 영화 배우의 얼굴이 예수님으로 인식되어 있다고 할 때, 신앙 생활의 진정성이 많은 부분 왜곡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톨릭 교회의 교리는 사실 오늘날 영상 매체에 익숙한 우리 청소년들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경우 쉽게 설명하나고 하는 것이 시중에 나오는 영상 매체를 무분별하게 이용하여 엉터리 교육을 하게 되기도 하고,반면에 그런 오류를 피하기 위해서 신학 서적에 있는 표현을 그대로 가르쳐서 결국 아무도 알아 듣지 못한 채 관심 밖의 이야기로 만들어 버리기도 합니다.
-박진홍 신부.청소년사목국장-
<미사 속 숨은 보화>
정화예절(간청): "이 제사를 너그러이 받아들이소서."
정화예절의 시작에서 사제는 먼저 허리를 굽히고 이제 바치게 될 제사가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허리를 굽히는 것은 겸손되이 자신을 봉헌하고 섬기는 자세입니다. 사제는 자신이 거룩한 제사들 바치기에 부당함을 인식하고 겸손되이 뉘우치며,사제의 손으로 봉헌되는 이 거룩한 제사를 하느님께서 너그러이 받아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주 하느님,진심으로 뉘우치는 저희를 굽어보시어 오늘 저희가 바치는 이 제사를 너그러이 받아들이소서."
현재의 기도문은 1,000년경에 미사에 도입되었으며, "아자리아의 기도"(다니 3,39)를 기본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6) -최동일 신부.사무처 차장
제1편 -제3장: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응답(신앙1)
한 인격과 한 인격의 만남이 참된 만남이 되려면 한쪽 편만의 의지로는 불충분하며,상호간의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인격을 지닌 하느님의 계시에 대해 역시 한 인격을 지닌 인간편에서의 적절한 응답이 있어야 하는데,바로 이 응답이 신앙인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모습으로 하느님께 신앙의 응답을 해야 할까? 신앙의 응답은 모엇보다도 한 인간의 존재 전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전적인 순종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머리로는 이해하고 믿으면서 행동으로는 이와 전혀 다르게 행동한다면 이는 전적인 순종이 아니다. 따라서 올바른 신앙의 모습이라 할 수 없다. 우리의 말과 행동,생각과 의지 모두를 전적으로 하느님께 순종시키는 것이 참된 신앙의 응답이다.
또한 신앙의 응답은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모든 진리를 참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참된다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이유가 그 모든 것을 우리의 머리로 다 깨닫고 이해했기 때문은 아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머리로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하느님의 계시를 참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그 근거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계시의 주체이신 하느님이 진리 자체이시므로 결코 오류를 범하실 수도 우리를 속이실 수도 없고,따라서 그분의 계시 역시 진리일 수밖에 없다는데 그 근거를 둔다. 즉,하느님의 권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우리는 그분의 계시 또한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선물이요 은총이다.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시고, 성령께서 도와주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신앙의 응답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 6,44)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혹자능 '나에게 신앙이 없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나에게는 신앙이라는 은총을 주지 않으시셨기 때문이니 내게는 아무런 탓이 없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의 은총을 잘못 이해한데서 생긴 오해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이미 하느님의 은총 가운데 살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똑같은 태양을 매일 주신다. 비록 각자가 처한 상황이나 문화에 따라 경우에 따라, 그 은총이 우리 눈에 분명히 드러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는 있지만,신앙의 은총 역시 모든 이들에게 차별 없이 주어져 있다. 그러므로 신앙이 없는 이는 하느님의 은총이 없어서가 아니라,이난 편에서의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자유로운 동의 및 협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하느님의 은총인 동시에 인간의 자유롭고 책임있는 선택이기도 하다. (다음편에 계속)
사순(四旬)
우리의
몸과 맘을 비워내어
맑은 영혼
일깨웁니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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