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탕자」 변윤철 신부 (구에르치노作,1619, 미술사 박물관, 빈)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 15,32)
+ 루카 복음 15,1-3.11-32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그때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말씀의 향기>
부전자전(父傳子傳)??? "하느님을 담은 사람이 되십시오." -신인수 안드레아 금산 주임
오늘 듣는 예수님의 비유 말씀은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합니다. 이야기 전체를 지배하는 아버지의 따뜻한 모습과 돌아왔지만 무언가 개운치 않은 작은이 들, 그런 행동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큰아들, 돈만 있으면 행복할 줄 알았지만 그 돈이 영원히 자기 소유가 될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은 작은아들,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많지 않습니다. 그때 떠오른 것은 아버지의 빵(돈)입니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는 작은아들의 고백은 빵 때문이 아닌지.. 억울할 것 같은 큰아들, 그런데 더 억울한 것은 아버지입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살았지만 내적으로 보면 함께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염소 한 마리조차 아버지의 눈치를 보아야 했던 큰아들은 아버지를 인색한 뒷방 노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아버지의 눈치를 보아야 했던 큰아들은 아버지를 인색한 뒷방 노인으로 만들었습니다. 큰아들에 의하면 아버지는 아들을 종으로 부려먹으면서도 베풀 줄 모르는 구두쇠입니다. 이런 두 아들을 지켜봐야 하는 아버지는 어떤 원망이나 꾸중도 하지 않으십니다. 묵묵히 존재하실 뿐입니다.
관연 작은아들과 큰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진정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받아들였을까요(참된 회개)?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빵이 아니라 그 사랑에 감사하게 되었을까요? 큰아들은 집으로 돌아가서 동생의 생활을 아버지와 함께 기뻐했을까요? 아버지를 인색한 뒷방 노인으로 만든 자신의 잘못을 아버지께 고백할 수 있었을까요?
관연 작은아들과 큰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진정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받아들였을까요(참된 회개)?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빵이 아니라 그 사라에 감사하게 되었을까요? 큰아들은 집으로 돌아가서 동생의 생환을 아버지와 함께 기뻐했을까요? 아버지를 인색한 뒷방 노인으로 만든 자신의 잘못을 아버지께 고백할 수 있었을까요?
이 비유 말씀이 전달된 상황으로 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은 세리들이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비방하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태도가 바뀌지 않았음은 우리가 잘 아는 바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실패하신 걸까요? 그들의 태도를 바꾸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작은아들과 큰아들의 매듭지어지지 않은 회개는 우리에게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작은아들이며 큰아들인 우리는 진정으로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하며 살고 있는지요? 나의 이익에 하느님을 이용하고 있지 않은지, 내가 스스로 그리고 만들어 낸 하느님을 섬기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으로 표현되는 아버지의 모습만을 확고하게 보여주실 뿐 두 아들의 모습을 열어 놓으십니다. 그런 아버지를 만나 우리들이 삶으로 응답해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 말씀의 종착지는 어디일까요? 두 아들 참된 회개를 했더라 일까요? 아닐 듯합니다. 두 아들이 자식을 낳았는데 그들이 망나니였더라. 그런데 그들은 자기 아버지처럼 그들을 대하더라 아닐까요? 우리 회개의 종착지는 아버지가 되는 것 아닐까요?
<청소년 바로보기(15)>
청소년 신앙 교육의 목표(3)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크게 네 가지 큰 주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신경, 성사, 계명, 그리고 기도입니다. 사실 우리 가톨릭 교회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 네 가지 큰 주제를 우리 신앙인들에게 가르쳐 왔습니다. 전국에서 사용하는 어린이, 청소년들 교리 교재나 예비자 교리 교재를 보더라도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있는 이 네 가지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교회가 가르치라고 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내용을 가르쳐 왔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걸 배운 우리 신앙인들은 어떻게 그 내용을 인지하고 있는 걸까요? 대부분의 신앙인들에게 가톨릭 교회의 교리에 대해서 질문을 하면 기억나는 게 없다고 말씀들을 하지만, 사실은 이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담겨 있는 내용의 골자는 기억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왜냐하면 거의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신경 부분에서 사도신경을 외우고 있으면, 성사 10 계명을 외우고 있으며, 또 기도 부분에서는 주요 기도문을 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가르치라는 내용의 골자를 가르쳤고 그 내용이 신앙인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지난주에 말씀드렸듯이 교황님의 교서에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을 배우고 익히면 신앙인이 된다' 고 하셨는데, 무엇이 문제가 되었던 것일까요?
저는 여기서 신앙 교육의 목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무엇을 구체적인 목표로 생각하며 가르쳤던가 하는 반성문입니다. 물론 큰 목적은 신앙인으로 살아가게 한다는 것이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신경의 내용을 가르치는 구체적인 이유가 무엇인가?'와 같은 구체적인 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막연한 목표는 교리에 대해서도 막연한 지식만을 남기게 만듭니다.
저는 먼저 어린이, 청소년들의 신앙 교육을 담당하는 첫 번째 교사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마치 우리 신자들은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모든 신앙 교육을 주일학교 교사들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사실 그 첫 번째 신앙 교육을 담당할 교사는 다름 아닌 가정의 부모들인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먼저 부모들이 가톨릭 교회 교리의 각 부분에 대한 학습 목표를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기본적인 학습 목표를 가지고 자녀들에게 신경과 성사, 그리고 계명과 기도에 관한 교육을 가정에서 먼저 하고, 이 부분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내용을 주일학교의 과정 안에서 하나하나 정립시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럼 가정에서 해야 할 가톨릭 교회 교리의 각 부분에 대한 학습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박진홍 신부. 청소년사목국장-
<미사 속 숨은 보화>
정화 예절(손 씻음): 내적 정화
유대인들은 식사 자체를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라고 여겼습니다. 곧 식사는 신성한 예식으로 간주되어 조상 전통에 따라 식사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최후 만찬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도 그들의 정결례 관습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미사 중에 손을 씻게 된 근본적인 동기는 사제가 교우들이 가져온 예물을 받아 제대에 놓으면서 자연히 손이 더러워졌기 때문이지만, 후에 교부들은 이 손 씻는 예절에 사제가 지녀야 할 내적 정화의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시편 25편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것처럼 사제는 손을 씻으며 기도합니다.
"주님,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없애 주소서."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8) - 최동일 신부. 사무처 차장
제2부-제1장-제1절-제2단락-'성부':삼위일체
이번 주부터 살펴보게 될 가톨릭 교회 교리서 1권 2부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알려주신 계시의 진리들을 하나하나씩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이는 하느님께서 직접 밝혀 주신 사실들이므로 우리는 이를 의심하지 말고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중에서 가장 첫 번째로 우리가 살펴볼 것은 삼위일체의 신비이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우리가 믿어야 할 하느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내용이다. 또한 하느님의 다른 모든 신비들이 삼위일체의 신비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우리가 스스로 생각해냈거나 다른 어떤 것에서 단서를 얻어 추리해낸 것이 아니다. 이 신비는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알려 주셨고 이를 신앙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알게 되는 진리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까지는 한 분이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존재는 알았어도 그 하느님이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 계신다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성자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활동하시는 모습과 이런 예수님의 모든 업적들 안에 함께 활동하시는 성령의 모습을 직접 보고 체험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이 삼위일체의 하느님이심을 알게 되었다. 즉, 하느님은 한분이시지만 홀로 계신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서로 구분되는 위격들이 서로 사랑으로 완전히 하나 되는 일치의 관계 안에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많은 이들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매우 어렵고 추상적인 교리로만 여기고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은데, 사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이론적인 교리라기보다는 우리의 삶과 직접 관련된 신비이다. 하느님의 깊은 내적 신비를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다 보니 다소 전문적이고 추상적인 용어들이 사용되어 어렵게 보이지만 사실 삼위일체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는 사랑의 신비이다.
사랑을 한 마디 말로 정의하려 한다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체험으로 알고 있다. 사랑을 한 번도 받지도 , 주지도 못한 이는 없지 않은가! 사랑하는 이들을 보면 분명히 서로 다른 인격체이지만, 사랑을 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 주고 점차 하나가 되어가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런 사랑의 내어 줌을 통해 서로 다른 위격인 성부, 성자, 성령이 일치하여 한 분의 하느님을 이루시는 삼위일체의 신비이다. 이처럼 삼위일체의 신비는 사랑의 신비이므로 어렵고 딱딱한 교리가 아니라. 삶으로 살아야 하는 구체적인 신비인 것이다.
온 누리에
내리신 생명
따스한 호흡으로
태어납니다.
하나 둘 셋...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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