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3년 주보

사순 제3주일 2013년 3월 3일(다해)

모든 2 2021. 5. 25. 09:42

「회개」황영준 신부(2012,이스라엘)

"주님이 말씀하신다. 회개하여라,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복음 환호송)

 

+ 루카 복음 13,1-9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다.>

 

바로 그때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서 알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보게,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그렇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말씀의 향기>

 

회개,인상 쓰지 말고 신나게!  "구원의 열매맺는 회개의 삶"  -김용태 마태오 서천주임

 

  내가 있는 서천은 '회개'의 고장이다. '회'도 있고, '개'도 있다. 사순시기에 생각하는 회개란 것도 이와 같은 것이라면 참 ㅊ유쾌하겠지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떠올리는 회개는 그렇게 유쾌해 보이지 않는다. 일단 머리에 칙칙한 재부터 뿌리고 시작하는 사순시기의 회개란 고행, 엄숙함, 절제 등의 말들을 떠올리게 한다. 듣기에 마음 편한 단어들이 아니다. 왠지 웃음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분위기이다.

 

  오늘 복음 내용 역시 그런 분위기가 느껴진다.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열매 맺지 못하면 잘라 버리겠다." 진지하게 받아들일라치면 상당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내용들이다. "회개해! 안 그러면 죽는 수가 있어!" 뭐 이런 거다.

 

  그러나 회개란 것이 꼭 이런 걸까? 그렇다고 한다면 회개란 것은 죽지 않기 위해 무서움 때문에 마음에도 없으면서 하는 수 없이 하게 되는 그런 것일 수 있지 않은가.

 

  다시 한번 오늘 복음을 찬찬히 훑어보자. 오늘 복음에는 '회개'와 관련하여 '멸망'이란 말과 함께 '열매'라는 말이 등장한다. 여기서 멸망이란 말보다 열매라는 말에 더 주목해 보자, 이때 우리는 회개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려 볼 수 있다. 즉 회개란 멸망하지 않기 위해 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를 맺기 위해 하는 그 무엇이란 것이다. 다시 말해서 회개란 죽지 않기 위함이 아니라 참으로 잘 살기 위함이며, 어둠으로부터 멀어짐이 아니라 빛을 향해 나아감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회개하는 삶이란 나쁜 짓 하지 않는 삶이 아니라 더 큰 선을 실청하는 삶이다. 남을 해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남을 살리는 것이고, 도둑질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 주는 것이며, 거짓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결국 사순시기 우리가 이야기하고 주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그 회개란 멸망할까 봐 벌벌 떨며 공포에 사로잡혀 행하는 소극적 선택의 그 무엇이 아니라 부활에 대한 기대와 희망에 찬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투신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회개란 인상 쓰며 하는 것이 아니고 활짝 웃으며 하는 것이다.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신명 나게 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우리의 멸망을 원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생명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시며 기다려 주신다. 그러나 주님은 기다려 주시지만 우리의 몸은 예전 같지 않다. 회개도 힘 있을 때 하는 거다. 지금이 바로 회개의 때이고 그래서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이다. 지금 신나게 회개하자!

 

<청소년 바로보기(14)>

 

청소년 신앙 교육의 목표(2)

 

  청소년들에게 신앙 교육을 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 죽 위한 것이며, 신앙생활을 오늘날 그들을 뒤덮고 있는 온갖 왜곡된 가치관 속에서 그들이 생명의 길을 선택하며 걸어갈 수 있도록 해 주는 가장 올바른 방법입니다.

 

  문제는 그들에게 신앙을 전해 주어야 할 이들이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저 신앙생활이란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으면서,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때로는 그것이 세상에서 잠시 잊혀져도 막연한 생각으로 때로는 그것이 세상에서 잠시 잊혀져도 세상을 살아가는데 별 지장이 없는 것처럼 느끼고 있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만약 신앙생활을 이렇게만 이해한다면 몇 년 동안 이어지는 주일학교의 신앙 교육은 정말 시간 낭비로 느껴질 겁니다. 왜냐하면 '주일미사 빠지지 않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는 데는 1시간이면 충분할 테니까요! 하지만 신앙생활은 한 인격을 변화시키는 과정입니다. 모든 인간이 반드시 가야 할 길을 올바로 걸어갈 수 있도록 해 주는 삶이며 주님께서 목숨을 바쳐 마련한 길을 걸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 교육은 우리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교육 과정임을 부모들이 먼저 인식해야 합니다.]

 

  오래 우리는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선포하신 신앙의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교황님께서 선포하신 교서 '신앙의 문'의 내용에서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대한 강조를 눈여겨봅니다. 교서에서는 이 교리서가 이천 년 교회 역사에서 받아들이고, 지키고, 제공했던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하였고, 또 이를 통해 교회가 신앙에 관하여 신자들에게 신앙생활에서 확신을 갖도록 해 준다고 하였습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가톨릭 교회 교리서 안에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이 담겨 있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내용을 배우고 익히면 신앙인이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신앙교육의 현장을 보면서 저는 황당한 발견을 합니다. 왜냐하면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담겨 있는 내용을 우리는 예비신자 교육 과정이나 주일학교 신앙 교육 과정 안에서 분명히 가르쳤는데, 왜 그걸 배운 이들이 냉담자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난 몇 년간 제가 사목방문을 다니면서 수집한 자료를 분석해 보면, 이것이 한눈에 보입니다. 대전교구에서 교적 상의 초등부 어린이 중에 신앙생활을 하는 어린이는 51%, 중고등부는 21%, 청년은 7%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한국에 있는 거의 모든 교구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나타나는 데이터입니다. 무슨 교육 과정이 배우면 배울수록 교회를 떠나는 형태로 나타나는지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교회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그것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걸까요? 저는 이에 대해서 우리의 신앙 교육 과정에 대한 반성을 해 봅니다.

 

-박진홍 신부. 청소년사목국장-

 

 

<미사 속 숨은 보화>

 

정화 예절(분향): 주님께 올리는 기도

  예물을 바치면 간청을 드린 다음 사제는 제단과 예물을 분향을 할 수 있습니다. 분향은 보통 대축일이나 위령미사에 쓰이곤 합니다. 분향을 하는 것은 사제를 통해 바치는 예물과 기도가  향과 같이 하느님께 올라가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오늘의 미사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봉헌되기를 청하는 기도를 했으면, 이 기도와 봉헌하는 예물이 하느님께 올라갈 수 있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라틴전례의 관습에 따르면 부제나 복사는 이때 사제와 교우들에게도 분향하는데, 이것은 곧 바치게 될 감사기도에 대비하여 사제와 교우들을 축성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분향이 이루어지는 동안 우리가 봉헌한 예물과 기도가 분향 연기처럼 하늘에 닿아 마침내 하느님께서 기꺼이 받아주시고, 축성해 주시기를 간절히 청해야겠습니다.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7) -최동일 신부. 사무처 차장

 

제1편 -제3장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응답(신앙 2)

 

  믿는 것과 아는 것, 즉 신앙과 이성은 인간을 진리이신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두 가지의 중요한 힘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신앙이란 비이성적인 것이며 이성을 사용할 능력이 부족한 유치한 사람들이나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사실 신앙에 받아들이는 계시의 내용들이 많은 경우 모호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신앙이 비이성적이고 유치한 믿음이어서가 아니라, 무한하신 하느님의 진리를 담은 계시를 우리의 제한된 이성으로 모두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성을 넘어서는 신앙으로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이성이 인간의 사고 능력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면 신앙은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에 대한 신뢰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신뢰에 바탕에 두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으로 받아들인 진리가 이성으로 받아들이는 진리보다 더욱더 확실한 진리임에 틀림없다. 어린이가 어려운 수학 문제를 자기 혼자의 힘으로 낑낑대며 풀어서 답을 구하는 것과  수학의 전문가인 선생님에게 물어보고 답을 구하는 것과 어느 것이 정답에 가까이 가는 길일까? 구원을 얻기 위해 반드시 얻어야 할 진리를 구할 때 그 진리를 우리의 유한한 이성에만 의지해서 구하는 것과 구원의 주관자이신 하느님께서 직접 알려주시는 대로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 중 어느 편이 더 그 진리에 가까이 가는 길일까? 당연히 신앙으로 하느님께 계시를 받아들이는 편이 진리에 가까이 가는 길이다. 따라서 결코 비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이성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표현해야 맞다.

 

  그렇다면 신앙이 이렇게 높은 경지의 것이니, 이성을 통해 이것저것 탐구하고 해답을 구하는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일까? 이 역시 결코 옳은 생각이 아니다. 이성 또한 신앙을 위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신앙을 통해 받아들인 계시의 내용을 우리는 이성을 통해 탐구하면서 그 신앙이 더욱 깊어지게 된다. 또 신앙의 내용을 다른 믿지 않는 이들에게 전하고자 할 때 우리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우리의 신앙을 표현해야 하고 이때에도 우리는 이성을 활용해야 한다. 따라서 신앙과 이성은 둘 중 어는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 아니라 둘 다 중요하며 반드시 필요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신앙과 이성(Fides et ratio」에서 신앙과 이성은 인간 정신이 진리를 바라보며 날아오르는 두 날개와 같다고 말한다. 두 날개 중 어느 한 날개라도 없거나 다친다면 새가 제대로 하늘을 날 수 없듯이 우리 역시 이성과 신앙이라는 두 날개 모두를 건강히 활용할 때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께로 날아오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