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12.17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생
1969.12.13 사제서품(예수회 소속)
1992. 5.20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 보좌주교 임명
1992, 6.27 주교 서품
1997. 6. 3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 부교구장 임명
1998. 2.28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 대교구장 임명
2001. 2.21 추기경 서임
2013. 3.13 교황 선출
2013. 3.19 즉위식
제266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탄생에 감사드리며, 새 교황님을 위해 기도합니다.
+ 루카 복음 22,14-23,5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시간이 되자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자리에 앉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파스카 축제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다 이루어질 때까지 이 파스카 음식을 다시는 먹지 않겠다."
예수님께서 잔을 받아 감사를 드리시고 나서 이르셨다.
"이것을 받아 나누어 마셔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제부터 하느님의 나라가 올 때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마시지 않겠다."
예수님께서는 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사도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예수님께서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그러나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지금 나와 함께 이 식탁에 앉아 있다. 사람의 아들은 정해진 대로 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넘기는 그 사람!"
사도들도 자기들 가운데 그러한 짓을 저지를 자가 도대체 누구일까 하고 서로 묻기 시작하였다. 사도들 가운데에서 누구를 가장 높은 사람으로 볼 것이냐는 문제로 말다툼이 벌어졌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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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떤 하녀가 불 가에 앉은 베드로를 보고 그를 주의 깊게 살피면서 말하였다.
<말씀의 향기>
"호산나!"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군중의 이기심 예수님의 참사랑 -오종진 베드로 복수동 주임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반긴 것은 수많은 군중들의 환호였다. 누가 그들에게 강요한 것도 아닌데 스스로 그렇게 열광적으로 환호했던 것을 보면 이 순간 그들의 마음속에는 참으로 큰 기쁨과 희망과 담겨 있었음에 틀림없다. 과연 이들의 환호 속에 담겼던 그 기쁨은 어떤 기쁨이었을까? 아마도 자신들의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에서 비롯된 희망이 아니었을까? 지긋지긋한 현실 속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이라는, 자유와 해방을 선물해 줄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이 이들을 이토록 열광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호산나를 외쳤던 이들의 입에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는 분노에 가득 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무엇이 이토록 이들을 분노하게 만들었을까?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아마도 이때 이들의 마음을 가득 채웠던 감정은 실망감이었을 것이다. 뭔가 해줄 줄 알았는데, 그래서 목이 터져라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했는데 정작 예수님은 자신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그들은 이런 분께 희망을 걸고 환호했다는 것이 분하고 억울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실망감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는 부분노의 외침으로 터져 나왔다. 이런 군중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배우자나 자녀들이 내 기대를 채워주고 내 뜻대로 따라줄 때, 우리는 행복을 느끼며 그들에게 마음을 채우지 못할 때 우리는 어김없이 분노와 짜증 섞인 원망을 늘어놓으며 무섭도록 공격을 가한다. 호산나를 외치던 입으로 죽이라고 소리 지르던 군중의 모습이 우리 안에서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다. 군중들은 예수님이라는 존재 자체를 환영했던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기대를 채워줄 하나의 도구로 환영했을 뿐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이런 태도로 가족들을 만날 때, 나는 결코 가족들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내 뜻을 존중하고 따라줄 그 어떤 도구로 가족들을 만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관계 속에서 배우자나 자녀들은 또 다른 예수님이 되어 무거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고통을 아파하기 전에, 오늘 나와 함께 살아가고 예수님께 십자가를 지우고 있는 모습을 먼저 발견해야 하지 않을까?
<청소년 바로보기(17)>
청소년 신앙 교육의 목표(5)
두 번째는 우리가 성사를 배우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부분입니다. 사실 우리가 성사를 배우는 목적은 7 성사의 종류와 개념을 외우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사 생활을 하는 데에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문제는 성사 생활입니다. 성사 생활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선 성체 성사가 이루어지는 미사를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저는 가끔 우리 신자들로부터 '이상하게 미사 시간에는 잡념이 많이 생긴다'는 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주의력 결핍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미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모습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사실 우리는 미사 시간에 오랫동안 익숙했던 용어들을 들으면서 그 내용을 마치 이해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예를 들어 미사 시간에 신부님께서 "형제 여러분, 구원의 신비를 합당하게 거행하기 위하여 우리 죄를 반성합시다."라고 하셨을 때, '구원의 신비'라는 용어나 '합당하게 거행한다'라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이해하시는 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또한 미사 중에 예수님이 나타나시기 전과 후에 기도의 흐름이 어떻게 바뀌는지, 빵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예수님께서 그 빵을 쪼개시고 나누어 주시는 그 기도의 흐름 안에서 성체를 모시기 전에 왜 주님의 기도를 바치고, 왜 평화의 인사를 하는지 제대로 이해를 하시는 분 또한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 신앙인 중에 대부분은 미사 시간에 어떤 기적을 만나게 되는지 느끼지 못한 채, 이 엄청난 기적의 순간을 그냥 넘어가곤 합니다.
고해성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해소를 들어갔다 나올 때, 부족한 인간이었던 자신이 고해소 안에서 어떤 큰 기적을 체험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하느님 나라의 성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되어 그 자리를 나오는데도, 그 안에서 스스로 무엇을 체험한 것인지 알지 못하고 그저 고해소를 마치 답답한 속을 털어놓는 상담소 같은 이미지로 인식하는 경우도 많이 봅니다.
성사는 지금 나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을 내 영혼이 직접 만나는 엄청난 기적입니다. 우리가 성사 교육을 받는 그 학습 목표는 그 성사를 통해서 우리가 체험하게 되는 그 은총이 무엇인지 알고,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사람으로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증거 하며 힘차게 살아가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성사생활은 자신의 삶 속에서 이 세상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을 직접 체험하고, 그 엄청난 감동의 힘으로 하느님 나라를 증거 하며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견진 성사를 받은 이가 증거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를 모르고, 혼인 성사를 받은 이가 혼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가끔 우리 신앙인들이 성사를 제대로 인식한다면 얼마나 큰 삶의 변화를 체험하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박진홍 신부. 청소년사목국장-
<미사 속 숨은 보화>
기도 권고의 응답: 미사를 드리는 이유
예물 준비를 마치 사제의 권고를 들은 교우들은 이렇게 응답합니다. "주님 사제의 손으로 바치는 이 제사가 주님의 이름에는 찬미와 영광이 되고 저희와 온 교회에는 도움이 되게 하소서."이 응답은 직접적으로는 예물 기도나 감사기도를 바치려는 교우들의 자세를 표현하지만, 더 크게는 미사 전체의 목적을 드러냅니다. 미사를 드리는 근본적인 목적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고, 교회와 인류에게는 구원을 베푸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 권고가 시작된 초기(8~9세기경)에는 이 응답이 존재하지 않다가 11세기부터 성직자와 봉사자들을 중심으로 응답하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차츰 교우들의 응답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10) -최동일 신부. 사무처 차장
제2부-제1장 -제7단락 : 타락
수년 전 동남아시아에 발생했던 쓰나미와 같은 어마어마한 자연재해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자연이 순식간에 무시무시한 악으로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하루에고 수차례씩 일어나는 온갖 범죄들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인간이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선하신 하느님께서 인간과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도대체 악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구약성경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당신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어주시는 계약을 맺으신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늘 이 계약에 충실하신 반면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이 너무도 쉽게 하느님과의 계약을 저버리고 다른 이방민족의 신을 숭배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됨을 체험한다. 이런 체험을 통해 이스라엘 미족은 악을 극복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이것은 우리가 본래부터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이고 이는 조상 대대로 그러하였다고 깨닫게 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체험한 죄에 대한 성찰은 곧 인류와 하느님 사이의 관계에 대한 관점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것이 창세기의 원죄 이야기가 성립된 배경이다. 즉, 태초에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축복하시고 그가 하느님께 자유롭게 순명함으로써 태초의 축복 안에서 하느님과의 사랑을 누리게 하셨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남요하여 하느님을 거스르는 원죄를 저질렀고, 이 원죄 이후에 수많은 죄들이 인류의 역사 안에 퍼져 들어오게 되었다. 하지만 당신의 약속에 충실하시며 자비로 우신 하느님께서는 죄에도 불구하고 늘 인간들의 곁에 계시며 구원을 약속하신다. 이것이 바로 구약성경의 창세기가 아담과 하와의 원죄와 그 이후의 자손들의 범죄의 이야기를 통해 악의 기운에 대해 상징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주위의 다른 이들과 어떤 유대관계를 맺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게 된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본인의 탓과는 무관하게 죄에 물들어 있는 세상 안에서 그 영향을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그 사실만으로 이미 죄의 강력한 지배하에 놓여 있으며 우리의 힘만으로는 이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우리의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 '원죄'라는 개념인 것이다.
이처럼 죄의 노예가 되어버린 우리의 운명은 어찌 될까? 인간은 참으로 가련한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죄의 힘이 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이보다 훨씬 더 큰 힘이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구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 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아볼 곳이다.
신비한 마음으로
걸어가던 그 길
환하게 이 길을
따라갑니다.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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