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3년 주보

예수 부활 대축일 2013년 3월 31일(다해)

모든 2 2021. 5. 25. 12:23

「그리스도 우리의 빛」 홍정수 신부(2013)

"영광 스러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빛은 저희 마음과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소서."

 

+  요한복음 20,1-9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 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씀의 향기>

 

예수님의 사랑 "부활을 향하여" - 박성민 요한 금구 둔포 주임

 

  "알렐루야~~ 예수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왜 맨 먼저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을까요? 우리 신앙인들은 이 점을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빌라도, 헤로데, 가야파, 병사들, 그 많은 군중들에게는 아예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도 한참 뒤에야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여기에도 분명히 주님의 배려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또한 당신의 사랑은 어떤 것인가를 말씀해주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즉, 주님의 사랑은 해코지하는 사랑이 아니라, 진실된 사랑이라는 것.

 

  만약 당신의 배반한 사람들, 즉 제자들 또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군중들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예수님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쥐구멍이라도 찾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당신이 너무나도 사랑하기에 곧바로 만나고 싶지만, 그들이 오해할까 봐 아니 깜짝 놀랄까 봐 만남의 준비 과정을 만들고 계셨던 것입니다. 끊임없는 사랑을 보여주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께서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순간까지도 당신의 따뜻한 사랑을 보여주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톨릭 신앙의 핵심은 바로 이 부활 신앙입니다. 이 부활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남'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말만으로는 약간 부족한 듯합니다. 왜냐하면 잠시 숨이 끊어졌다가 다시 살아나는 소생이나, 죽은 몸이 딴 몸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환생이라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확한 의미는 '완전히 죽은 사람이 신비로운 몸을 띄고 살아나, 다시는 죽지 않는 것'을 바로 부활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부활한 예수님은 바로 참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 되며, 바로 이 점이 우리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이 부활을 향해서 늘 움직여야 합니다.

 

부활을 믿고 사는 신앙인들은 잘못된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욕심, 나태함, 이기심, 시기, 질투 등등.. 우리를 다시 살리지 못하는 것들에서 벗어나 나의 모습을 다시 새롭게 바꾸도록 합시다. 언제나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예수님 안에서 따뜻한 사랑을 느끼며 그 사랑을 전하며 살아가는 참다운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청소년 바로보기(18)

 

청소년 신앙 교육의 목표(6)

 

  세 번째는 계명 교육은 어떤 목표를 세우고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부분입니다. '십계명을 외워라! 그리고 고해성사를 준비할 때, 성찰의 기준으로 삼아라!' 흔히 하는 계명 교육의 형태입니다. 저 역시 어렸을 때, 그렇게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은 고해성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십계명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죄를 짓고 참 쉽게 빠져나갈 수가 있고, 반대로 이를 묵상 속에서 풀어서 해석하면 숨 쉬는 게 다 죄인데, 어떻게 십계명을 기준이라 할 수 있을까? 하는 것 말입니다. 우리는 과연 계명 교육을 성찰의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 배우는 것일까요? 사실 계명 교육을 할 때에는 자녀들이 보다 큰 시각으로 계명을 이해하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신앙인들이 계명 교육의 목표를 잘 이해한다면 적어도 오늘날 이렇게 심각한 가치관의 혼란을 경험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사실 계명에는 신앙인이 세상을 살아가며 반드시 가져야 할 기준! 신앙인으로서 가져야 할 올바른 가치관이 정확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것이 십계명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계명 교육의 목표는 뚜렷해집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살아가게 만들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계명 교육의 목표인 것이죠!

 

  오늘날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최고의 가치를 '돈'에 두고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청소년들에게 최고의 가치는 '보다 나은 대학', 청소년들에게 최고의 가치는 '보다 나은 직장', 하지만 결국 그 끝에는 '돈'이라는 가치가 기다리고 있지요! 물론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너무나 소중한 가치라는 것을 부정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최고의 가치가 아님을 인식하자'는 것입니다.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될 때, 나약한 인간은 윤리를 무시한 경쟁 사회를 자신도 모르게 받아들이게 되고 그 안에서 가치관의 혼란을 체험하게 됩니다. 청소년들에게 대학입시보다 소중한 가치이고, 청년들에게 취직보다 우선 되어야 하는 더 소중한 가치가 바로 '이웃사랑'이며 '하느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 기준이 명확해야 계명을 살아가는 참 신앙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교육을 통해서 하느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우리 청소년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박진홍 신부. 청소년사목국장-

 

<미사 속 숨은 보화>

 

예물 기도 :

봉헌된 예물 위에 바치는 기도

  예물 준비 예식은 사제의 기도와 교우들의 응답으로 끝나게 됩니다. 사제가 바치는 예물 기도는 초기 교회 로마 전례 안에서 유일한 예물 준비 과정이었기에, '봉헌된 예물 위에 바치는 기도'(Oratio super oblats)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9~10세기를 지나면서 봉헌기도의 방식이 변화되었습니다. 당시 감사기도는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지성소와 같은 역할을 했기에, 감사기도를 위한 준비로써 사제가 홀로 조용히 침묵 중에 바치며 묵념 기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 현대에 이르러서는 예물 기도도 사제가 바치는 주례 기도라는 점에 더 중점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제가 바치는 주례 기도는 온 공동체가 함께 듣고 한 마음으로 기도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하기에 소리 내어 바치는 기도로 환원되었습니다. 현재 예물 기도는 100여 개의 기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11) - 최동일 신부. 사무처 차장

 

제1편-제2부-제2장-제2절 :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활동하시던 당시에도 그러했지만,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는 참으로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한다. 예수님을 한 명의 훌륭한 스승이요 예언자로 보기도 하고, 시회혁명가로 보기도 한다. 혹은 신비주의자나 명상가로 보기도 한다. 이외에도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색채들이 예수님의 정체성에 덧칠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님을 어떤 분이라고 고백했을까? 우리는 예수님께 붙여진 두 가지 중요한 호칭들을 살펴봄으로써 이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다.

 

  첫 번째로 '그리스도'라는 호칭이다. 그 뜻을 직역하면 '기름 부 음 받은 이'라는 의미이며, 이는 '메시아'라는 히브리어 명칭을 희랍어로 번역한 명칭이다. 이스라엘 안에서 '메시아'라는 호칭은 주로 왕들에게 붙여졌다. 이는 그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권한을 지닌다는 의미로 기름으로 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다윗 왕이고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가문에 대대로 왕권을 물려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외세에 의해 지배를 받는 시기에도 다윗 가문의 후손에서 이스라엘 왕국을 새롭게 재건할 메사아가 나타날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 당신은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스스로에게 붙이는데 조심스러워하셨다. 왜냐하면 이 용어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오해하게 만들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그리스도'는 우리를 정치적으로 가 아니라, 죄의 속박에서 해방시켜주는 구원자라는 참뜻이 밝혀졌고,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신자들의 고백은 점차 '예수 그리스도'라는 예수님의 고유한 이름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른 이들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로 불리게 되었다.

 

  다음으로는 '주님'이라는 호칭이다. 구약 성경에서 '주님'은 하느님을 지칭할 때 고유하게 쓰이는 용이이다. 그런데 아랍어를 사용하던 팔레스티나의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이 '주님'이라는 용어가 예수님을 지칭하는 호칭으로 사용되었다(1 코린 12,3:로마 10,9)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이렇게 예수님은 '주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것은 예수님이 곧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이 누리시는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주권과 똑같은 그 주권이 예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기도 중에 우리가 자주 부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매우 짧지만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교회의 오랜 신앙이 담겨 있는 매우 중요한 호칭이다.

 

 

주여

빛을 주소서

빛을 주소서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