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 서 있는가? 우리는」 오세정 신부(2013, 전주 전동성당)
"가운데 서시며"(요한, 20,19)
+ 요한복음 20,19-31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말씀의 향기>
믿는다는 것? 행동하는 것! "앎 믿음 실천" -송준영 프란치스코 봉산동 주임
오늘은 하느님의 자비 주일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2000년 4월 30일 마리아 파우스티나 수녀를 시성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특히 기념하길 당부하셨고 이에 교회는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를 특히 기념하길 당부하셨고 이에 교회는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정하였다. 하느님의 자비.. 자비란 본지 하느님의 속성 중 가장 잘 알려진 속성이거늘 새롭게 기념하는 날까지 정하여 그 의미를 상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전 세계 몇십억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고 있음에도 아직 세상은 기아와 불의, 폭력과 범죄, 부정, 부의 편중이 만연하기 때문이다. 이를 타개할 근원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용서에 기반한 자비하심밖에 없기에 오늘 교회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세상에 퍼지도록 기도한다.
오늘 복음은 주님 부활을 목격할 때 같이 있지 않았기에 대명사로 불리운 사도이다. 다른 사도들이 주님 부활을 목격할 같이 있지 않았기에 주님 부활을 믿을 수 없다고 강하게 주장한 까닭이다. 하지만 토마 사도의 입장에서 부면 그 말이 이해가 간다. 토마 사도에게 있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모신 스승의 결말은 십자가 죽음의 패배였다. 강력하고 멋진 성공을 기대했는데 씁쓸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실패만이 남았다. 그러기에 그는 주님께 대한 강력한 불신을 드러낸다.
토마 사도의 이 모습은 현대인을 닮았다. 자신이 보지 않고 느끼지 않은 것은 알 수 없고 믿을 수 없다 이야기하는 현대인들, 그리고 이 모습은 신앙인들에게도 종종 드러난다.
하지만 토마 사도와 오늘 우리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토마사도는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자 자신의 모든 의심을 버리고 그 유명한 신앙 고백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을 외친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바쳐 이 말을 증거하고 믿음을 행동으로 옮긴다.
우리도 늘 아멘이라는 '믿습니다'를 외친다. 미사 중 자주 아멘으로 응답하고 기도 때마다 아멘을 외운다. 하지만 우리의 아멘은 입으로의 말일분 행동으로는 잘 실천되지 못함다. 결국 우리는 토마 사도와 달리 증거 하지 못하는 행동하지 못하는 믿음을 살고 있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믿는 것이고 믿는다는 것은 행하는 것인데 우리는 알지만 잘 믿지 않고 믿지만 행동이 없는 경우가 너무 많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복음이 전하고 있겠는가!
은총의 사순시기를 보내고 주님의 새로운 부활을 맞이했지만 여전히 나는 행동이 부족한 믿음, 믿음이 없는 지식을 살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 보도록 하자.
부활의 기쁨이 익어가는 하느님의 자비 주일,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청하고 있다면 그 자비하심을 내가 먼저 실천해보는 그런 시간이 되도록 스스로 변화하여 나 역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신앙고백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도가 되도록 하자.
청소년 바로보기(19)
청소년 신앙 교육의 목표(7)
네 번째는 '기도 교육은 어떤 목표를 가지고 할 것인가? 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기도문을 외워라!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삼종기도, 식사 전 후 기도..'"기도에는 염경 기도가 있고, 묵상기도가 있고, 관상 기도가 있는데 그 내용은.." 아마 한 번쯤 들어 보신 기도 교육의 방법들일 겁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에게, 언젠가 받았던 그 기도 교육을 통해서 지금 현재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해 본다면 아마 대부분은 '주요 기도문'을 외우고 있다는 것에 멈추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러고 보면 예비자 교리반이나 첫 영성체 교리반 등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우리의 기도 교육 형태는 '주요 기도 문'을 외우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기도를 왜 가르치는지 그 목표를 잘 이해하고 있다면 그저 '주요 기도문'을 외우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물론 '주요 기도문'을 외우는 것이 기초적인 기도 교육임이 분명하고 또 그렇기 때문에 그런 기도문을 외우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기도 교육을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주요 기도문'을 외우게 한 다음에 이루어져야 하는, 그다음 단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다음 단계는 바로 나는 언제, 어떤 상황에 기도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일 것입니다. 사실 기도 교육의 목표는 '주요 기도문'을 외워서 필요한 상황에 잘할 수 있게 만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상황들, 다시 말씀드려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과 인격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주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이 만나는 모든 유혹을 이겨 나아가는 신앙인이 되도록 해 주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기쁠 때나 슬플 때, 심지어 화가 나 있을 때조차도 하느님과 인격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능력이 갖추어져 있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기도할 줄 아는 훌륭한 신앙인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지금까지 저는 우리 가톨릭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리의 큰 맥락들, 다시 말씀드려 신경, 성사, 계명, 기도 교육에 대해서 그 교육의 목표가 무엇이었던가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던 이유는 청소년들의 신앙 교육의 첫 번째 장소는 주일학교의 교실이 아니라 바로 가정이며, 첫 번째 교사는 주일학교 교리 교사들이 아니라 부모님들이기에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가 신앙 교육의 첫 번째 교사임을 인식하신다면 당연히 교육에 대한 목표를 가지고 계셔야 한다는 생각으로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박진홍 신부. 청소년사목 국자-
<미사 속 숨은 보화>
예물 기도의 내용과 구성
예물 기도는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신분이나 구원 업적을 표현하는 호칭(전능하신 하느님, 자비로우신 하느님, 주님 등)과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를 통해 은총을 구하는 공동체의 간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른 주례 기도(본기도, 영성체 후 기도)에 비해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문체가 자유로운 편입니다.
기도 내용은 전례 시기나 축일의 의미를 반영하면서도 제대에 놓인 예물을 주께서 기꺼이 받으시는 참다운 예물로 성화시켜주시어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살게 해 달라는 청원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위치나 내용으로 보아 "예물 준비 예식"을 마감하고 곧 이어지는 감사기도를 준비하는 역할을 합니다. 교유들은 '아멘"이라고 응답함으로써 사제의 기도에 함께하게 됩니다.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12) - 최동일 신부. 사무처 차장
제1편-제2부-제2장-제3절 : "예수 그리스도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셨다."
원죄로 인해 모든 인간은 죄의 경향에 기울어져 있고 그 결과로 죽음이라는 결말을 앞두고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운명이라면 우리 삶의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야만 우리에게 죽음을 뛰어넘을 구원의 희망이 생긴다. 그리고 그 희망은 오직 예수님께로부터 나온다. 역사를 뛰어넘어 영원히 계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제2 격이신 성자께서 역사 속의 한 구체적인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나자렛 예수님이시다. 이 사건을 우리는 '강생'이라 부르는데,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이 사건은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당신 스스로를 낮추시어 인간이 되심으로써 우리 인간이 놓여 하느님과 같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강생의 사건은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당신 자신을 직접 주신 사건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강생은 하느님께서 우리들을 당신께로 영원히 불러 모으는 사건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들에게 주어진 소명이 얼마나 크고 소중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결코 죄의 나락에 떨어져 영원히 어둠에 머물 존재들이 아니라 하느님께 이끌려 그분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존재임이 강생 사건에서 드러난 것이다. 하느님이신 성자께서는 인간이 되심으로써 모든 인간들과 긴밀히 하나가 되셨고, 따라서 모든 인간은 그저 단순히 세상에 던져진 허무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과 긴밀히 하나가 될 존재라는 고귀한 가치를 지니게 된 것이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참된 하느님이요 또한 참된 사람이시기도 하다. 많은 이단들이 예수님의 신성만을 강조하고 인성을 등한시하거나, 반대로 인성만을 강조한 나머지 신성을 등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둘 중 어느 경우라도 결국은 하느님을 인간의 역사로부터 멀리 떼어 냄으로써 구원이 지니는 참 의미를 상실시킨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하느님과 인간의 긴밀한 결합에서 기원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인간의 긴밀한 일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 사이의 긴밀한 일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 사이의 중개자가 필요하고 그 중개자는 하느님과도 인간과도 완전하게 일치해 있어야만 하느님과 인간을 서로 완전히 일치시킬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중재자인 예수님은 완전한 하느님이요 완전한 인간이라는 지 중요한 진리를 교회는 그 초기부터 공의회 등을 통하여 소중하게 지켜왔다.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이 서로 사랑하여 하나를 이루는 것이 삼위일체의 핵심 의미라면 이러한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여 인간과 하나를 이루신 신비가 바로 '강생'의 신비가 아닌가 한다. 이처럼 사랑은 늘 내어줌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 안에 우리의 구원이 자리하고 있다.
주님은
언제나 저희 곁에
계시는 것을
믿습니다.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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