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의 사명」 황영준 신부(2010, 분당 요한성당)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8)
+ 요한복음 10,27-30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말씀의 향기>
예, 여기 있습니다 - 장우석 사무엘 성소국장
"예, 여기 있습니다."
2013년 3월 4일 대전가톨릭대학교 대성당에 입학미사가 한창 절정에 이를 무렵, 외마디처럼 울려 퍼지던 새내기 신학생들의 응답입니다. 주님께서 불러주신 이 길을 열심히 걸어가겠다는 신념과 의지가 큰 목소리로 표현되어 대성당에 울려 퍼졌습니다. 이 응답 앞에 대성당을 가득 메운 신자들은 한편으로 대견한 그들의 모습에 가슴 뿌듯해하고 다른 한편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나서는 이들을 위해 더 많은 후원과 기도를 약속드리는 모습이었습니다.
1993년 3월 23명의 신학생들이 제1회 가톨릭대학교(성 요셉 대신 학교)에서 입학미사를 봉헌하였고 이 미사를 통해 대전가톨릭대학교가 개교하였습니다. 수많은 교구 신자들의 기도와 후원으로 신학교와 신학생들이 대전교구의 새로운 도약을 알리는 첫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올해로 개교 20주년을 맞이한 신학교에 우리 교구는 신입생 신학생 5명을 입학시켰습니다. 이 소식은 교구 주교님들을 비롯한 교구 사제단 그리고 교구 신자들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매년 성소자 수가 감소하고 있어 우려하고 있던 일이 설마 하던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그동안 성소개발에 미진했던 우리 모두에게 아주 큰 양심성찰의 시간을 갖게 하였습니다.
이 소식은 우리 교구민 모두에게 아주 큰 소식입니다. 무엇보다도 '교회의 심장'으로 불리는 신학교에 입학하는 신학생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교구의 미래가 불투명해진다는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가 사는 세상은 황금만능주의로, 하느님에 대한 무관심과 냉대가 판을 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때에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일할 일꾼들이 줄어든다는 사실은 참으로 심각한 상황입니다. 물론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 교구를 위해 보내준 이 선물에 감사와 흠숭 그리고 그리고 찬미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지만 성소개발에 관한 우리의 태도에는 큰 변화가 있어야 할 때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교구민 모두가 이제는 멀리서 바라보는 방관자적 태도나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소극적 태도를 떠나 하느님과 하느님의 나라, 교회와 세상을 위해 자신의 일처럼 임하는 소명적인 태도와 적극적인 태도로 성소계발을 위해 온 마음과 정서와 힘을 다해 주님께 "예, 여기 있습니다."라고 응답해야 할 때입니다.
청소년 바로보기(21)
주일학교 교사와 청소년 사목②
언젠가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캠프의 준비 과정부터 마무리까지 약 두 달가량을 함께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캠프라는 소문을 듣고 그 특별함을 만나보고 싶어서였습니다. 하지만 처음엔 그다지 특별한 프로그램도, 장비도, 운영 능력도 발견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런데도 매번 프로그램이 끝날 때마다 감동에 찬 얼굴로 울기까지 하며 떠나는 청소년들을 보면서 도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더라구요! 그러던 어느 날 밤 바닷가에서 혼자 시무룩하게 앉아 있는 수사님을 발견하고는 다가가서 무슨 걱정이 있냐고 물어봤다가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외어도 이름이 안 외워져요! 저는 살레시안이 될 자격이 없나봐요!" 긴 한숨과 함께 내뱉는 그 말속에서 저는 2박 3일씩 여덟 차례나 진행되는 그 캠프에서 매 차수 참여하는 300여 명의 이름을 매전 다 외우고자 하는 살레시오회원들의 놀라운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진행되는 상황을 유심히 보며, 매 프로그램 사이에 틈틈이 아이들과 말뚝박기, 농구시합 등을 하며 아이들의 이름을 정확히 하나하나 부르고 계신 놀라운 체험이었고 그러면서 청소년학을 공부하면서 교수님께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청소년들이 마음 놓고 놀 수 있는 놀이는 없습니다. 청소년들은 이 사회의 경쟁구도 안에서 공부가 아닌 다른 것을 하는 시간 자체를 이미 스트레스로 느끼고 있습니다. 어린이의 경우는 보모님과 함께 놀 때, 어느 정도 해방감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만 자신에게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가 부모가 아니라 이 사회라는 것을 인식할 때가 되면 더 이상 마음 놓고 놀 수 있는 놀이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캠프 안에서 아이들이 느끼는 해방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적어도 가톨릭 교회에 몸답고 있는 청소년이라면 신부님, 수녀님, 수사님이 사회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인식을 하기 때문이며, 그들과 함께 놀 때에는 내가 지금 노는 것이 죄가 아니라는 인식을 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요! 저는 이것이 청소년과 함께하는 이 시대 예수님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러면서 그 역할을 이제 교리 교사들이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사실 본당에서 신부님 수녀님만으로는 도저히 그 많은 청소년들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아이들이 신부님 수녀님으로부터 느끼는 그 더 높은 가치를 교사들에게서도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겠지요. 그것은 결국 우리 모두가 교리 교사들에게 부여해 주어야 할 우리의 과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박진홍 신부. 청소년사목국장-
미사 속 숨은 보화
감사기도: Eucharistia(에우카리스티아)
감사기도의 명칭은 최후만찬 때에 예수님께서 빵과 잔을 손에 들고 바치신 감사와 찬양의 기도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하신 기도는 유대인들의 전통 기도인 "베리가"(유대 종교 축제 때 가장이 빵과 잔을 들고 바치던 찬양 기도)이지만, 초기 교회 때 사도들은 이 기도를 찬양기도라는 뜻으로 Eulogia(에 룰로 기아), 혹은 감사기도라는 뜻으로 Eucharistia(에우카리스티아)라고 부르기 시작하였고, 감사기도라는 명칭으로 정착되었습니다. 이 명칭은 미사 전례의 하느님의 구원 업적, 특히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을 기념하면서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예식임을 알려줍니다.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14) -최동일 신부. 사무처 차장
제1편- 제2부-제2장 -제5절 : "고성소에 내리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두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큰 사랑을 실천했던 인물이었으며, 정의를 부르지고 약한 이들의 권익을 대변한 한 명의 훌륭한 인물이었다고 인정하고 공경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까지 모두가 쉽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아무리 훌륭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은 한 순교자는 될 수 있을지언정 우리의 구원자는 될 수 없다. 따라서 구원에 대한 우리의 희망은 그저 헛된 망상으로 남아있을 것이며, 죽음이 여전히 우리의 운명을 지배하고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증거는 예수님의 시신을 모셨던 무덤이 비어져 있었다는 것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또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며 절망과 두려움에 빠져 숨어 있던 제자들이 어느 순간 돌변하여 확신과 용기를 가지고 군중들 앞에 나서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이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체험이 아니고서는 과연 그 무엇으로 제자들의 이러한 변화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부활은 그저 제자들의 헛된 바램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분명히 역사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하지만 부활 사건 자체를 눈으로 직접 목격한 증인은 아무도 없었으므로, 누구도 부활이 물리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알지 못한다. 부활이 분명히 역사 안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지만, 부활 자체는 역사나 자연법칙을 뛰어넘어 신적인 영역에 속하는 사건임이 여기서 드러난다. 예수님께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지만, 그 다시 살아나심은 죽지 인전에 지녔던 지상에서의 생명으로 돌아감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이것이 어떤 차원인지 직접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비유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씨앗이 땅에 떨어져 싹을 틔우면 여기서 아름다운 꽃이 피어난다. 그런데 여기서 이 꽃은 그 아름다움의 차원이 씨앗과는 비교 할 수 없이 높은 경지에 있다. 아무리 씨앗을 이리저리 살펴봐도 꽃의 형태를 찾아볼 수 없지만, 분명 그 씨앗에서 아름다운 꽃이 핀다. 이처럼 지금 이 지상에서의 생명이 씨앗과 같다면, 부활 후에 누리게 될 생명은 이 씨앗에서 피어날 아름다운 꽃과 같다 하겠다.
예수님께서는 죄의 결과인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 역시 당신처럼 부활하여 영원히 하느님 안에서 참된 생명을 누릴 길을 열어주셨다. 예수님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부활한다는 것이다! 너무나 엄청나서 실감이 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부활 이야마로 우리의 진정한 희망이며, 이 희망이 있기에 우리는 그 어떤 시련 앞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꿋꿋이 신앙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은 나의 목자
저희는
아쉬울 게 없어라.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 > 2013년 주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활 제6주일(생명주일) 2013년 5월 5일(다해) (0) | 2021.07.02 |
---|---|
부활 제 5주일 (이민의 날)2013년 4월 28일(다해) (0) | 2021.07.02 |
부활 제3주일 2013년 4월 14일 (다해) (0) | 2021.07.01 |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주일) 2013년 4월 7일(다해) (0) | 2021.05.25 |
예수 부활 대축일 2013년 3월 31일(다해) (0) | 2021.0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