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시작은
어머니로부터 옵니다.
성모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신
예수님께서 탄생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모성월」
김택민 신부(2013)
+ 요한 복음 14,23-29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말씀의 향기>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 예수님을 사랑하세요? -김성태 요셉 신리성지 주임
1846년 임치백은 감옥에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식의 집전자는 김대건 신부였고, 둘은 모두 수인(囚人)이 된 상태였다. 누추한 감옥의 초라한 예식이라도 천사들의 찬송가만큼은 하늘을 온통 울렸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하루는 판관이 임치백 요셉에게 묻기를 '십계명을 대어 보라' 하였단다. 낯선 기도문이 아직은 입에 붙지 않아 서툰 것이 당연할진대, 판관이 조롱하며 비난하자 요셉이 이와 같이 대꾸하였다. "자식이 유식해야만 부모에게 효도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내 비록 무식하지만 천주께서 내 아버지이심을 잘 알고 있소이다." 자신의 대답처럼 요셉은 천주를 아버지로 여기며, 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순교로 고백했다.
성경은 '계명'과 '말씀'을 같은 뜻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탈출기에서 하느님의 말씀들이 십계명으로 드러난 것을 보면 당연한 이치라 하겠다. 그러니 계명을 따르는 것은 말씀을 지키는 것이고,복음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곧 "나(예수님)를 사랑하는 일"이다. 기도문과 계명들을 입버릇처럼 외고, 성경을 열심히 공부해서 말씀의 뜻을 충분히 깨달으려는 노력이 그래서 귀한 것이다. 다만 우리의 힘만으로는 그 깊이를 다 헤아릴 수 없다는 겸손함을 간직하면서, 이 귀한 노력들이 실현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것이 오늘 복음이 말하는 평화가 아닐까. 적당한 타협으로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그런 평화가 아니라, 사랑이 실현됨으로써 그분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현실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순교자는 평화를 누리고 있다. 비참한 모양으로 목숨까지 빼앗기는 치욕을 겪었어도 거기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그분의 말씀을 지켜 가기로 다짐을 하자. 뜻하지 않게 닥쳐오는 어려움이 우리의 희망까지 장악하지 못하도록 성인들의 모범과 전구에 의탁하도록 하자.
청소년 바로보기(23)
교회 밖의 청소년 사목 ①
그동안 저는 우리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청소년 사목을 어떤 관점에서 해야 하는가? 라는 입장에서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이제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서 어떻게 청소년 사목을 해야 할 것인가?라는 시각에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교회 안의 청소년 사목도 대책 없는 상황에서 교회의 울타리 밖을 넘본다는 것이 주제 넘는 생각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다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본다면 울타리를 생각하는 모습에 먼저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또한 오늘날 우리 청소년들의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대 사회적인 청소년 사목 활동은 매우 중요한 요소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과거, 그러니까 지금부터 대략 30여 년 전 즈음에는 청소년 사목에 대해서 가톨릭교회가 이렇게까지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본당에서 여름 캠프만 하더라도 선교 효과가 충분히 있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때는 교회가 충분히 있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때는 교회의 청소년 활동 프로그램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 그 정도 수준의 청소년 활동 프로그램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하지만 지금은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청소년 활동 프로그램보다 우리 사회의 청소년 활동 프로그램이 크게 성장을 하였고 이제 교회의 수준을 뛰어 넘어 저만치 달려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동안 우리의 청소년 사목에 대한 시각이 '우리 성당을 찾아온 청소년들에게 무서을 제공할까?'라는 시각에 맞추어져 있었다면 이제 우리의 시각은 '우리 성당은 우리 지역 청소년들에게 무엇을 제공할까?'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청소년 선교의 가능성을 여는 시각의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가톨릭 사회복지가 일찌감치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이 세상의 가난하고 소외받는 모든 이들을 위해 오늘날처럼 훌륭한 모습을 갖추었듯이 청소년 사목 역시 그러한 시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많은 준비를 해야 합니다. 뒤늦게서야 하느님의 섭리라고 느끼고 있지만, 우리 교구는 합덕 유스호스텔의 설립을 기점으로 2008년에 '재) 대전 가톨릭 청소년회'라고 하는 청소년 법인을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청소년 법인의 개념도 잘 모르고, 운영방법도 모르는 상황인데 더군다나 청소년 사목국의 업무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법인의 존재는 저에게 야속하기까지 했었다는 고백을 해 봅니다. 하지만 우리 교구가 왜 오랜 시간 동안 청소년 수련 시설 하나 운영하지 못했던가? 하는 이유를 청소년 법인 운영을 통해 요즘은 느끼고 있습니다.
미사 속 숨은 보화
감사기도의 역사 2: 초대교회의 형식
초기교회(1~2세기) 시대에는 감사기도의 기본 구조가 베라카의 양식을 따르지만, 형식에 크게 얽매이지 않고 주례자가 정착하여 바치는 자유기도의 형태였습니다. 2세기 이후 일정한 규범이 생기지만, 약 4세기까지는 일반적인 규범 안에서 자유로운 기도를 바쳤으리라 추정됩니다.
히뽈리또의 「사도전승」을 통해 감사기도의 기본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교와 공동체의 대화(감사기도 서문)-감사송(그리스도의 구원업적에 대하여)-성찬제정문 -기념과 봉헌(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위하여)- 성령기원(교회의 일치)-마침 영광송. 이처럼 형태는 오늘날과도 비슷하지만, 그 내용은 주례자가 자유로이 바쳤으리라 여겨집니다.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16) - 최동일 신부.사무처 차장
제1편-제2부-제3장-제9절 :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를 믿나이다"
근래에 실시된 전 국민 대상 통계조사에 의하면 주요 종교들 대부분의 경우 그 신자들이 어느 정도씩 감소되었으나 가톨릭만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처럼 가톨릭이 꾸준히 성장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여러 가지 자선활동이나 봉사활동, 교육, 의료 사업 등을 통해 가톨릭교회가 사회 안에서 좋은 이미지를 쌓아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가톨릭교회가 직면하는 커다란 도전 또한 존재한다. 바로 종교적 개인주의이다. 애써 교회에 소속되지 않아도 스스로 하는 기도와 선행으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사회를 위해서는 좋은 것이나, 개인의 구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닌 것으로 여긴다. 과연 이것이 옳은 것일까?
교회는 어느 순간 우발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하느님께서 그 마음 안에 영원으로부터 이미 교회를 계획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심으로서 장차 모든 민족들로 이루어질 교회에 대한 징표가 되게 하셨으며,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특별히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서 교회는 실현되었다. 또 성령강림 때 성령의 내리심에 의해 교회는 세상에 널리 드러나고 공표되었으며, 마침내는 종말의 때에 그 완성을 이룰 것이다. 이처럼 교회 자체가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기에 교회를 따로 떠어놓고는 결코 구원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교회는 단순히 세상이 한 조각이 아니라,그 자체로 신비이다. 왜냐하면 교회라는 눈으로 보이는 현실 안에 성령께서 존재하고 활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레네오 교부는 "교회가 있는 곳에 하느님의 영이 또한 계신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이 계신 곳에 교회와 온갖 은총이 존재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교회로 하여금 설립자라 할 수 있는 예수님에 대해 단순히 기억을 간직하고 예수님과 생생한 만남을 이루며, 거기서 빛을 얻게끔 한다.
그리스도 한 분만이 구원의 중재자이시고,그리스도의 모든 구원은 당신의 몸인 교회를 통해 주어진다. 그러므로 이러한 교회 안에 속한 우리들은 구원으로 향하는 유일하고 훌륭한 배에 탄것과 같다. 그러나 이로써 끝이 아니다.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에게는 이 교회 밖의 다른 이들을 교회로 이끌어 올 선교의 사명이 있다. 이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사명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 재촉되며, 성령으로 인도되는 교회는 세상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진리로 안고 구원되기까지 끊임없이 선교할 것이며, 여기서 교회의 정체성이 드러날 것이다.
청보리밭 사이로
피어나는 희망처럼
우리의 소망과 기도
날마다 커가는
우리들의 믿음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 > 2013년 주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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