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딛고 있는 '그곳'에서부터」
강진영 신부(이스라엘 올리브 산, 주님 승천 경당)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 루카 복음 24,46-53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강복하시며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그리고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
<말씀의 향기>
신앙인의 네트워크 "사랑의 디지털 세상" -이재훈 세례자요한 홍보국장 교구장 비서실장
최근 인터넷, 트위터, 페이스북을 비롯한 스마트폰과 같은 디지철 소셜 네트워크(Digtal Social Network)의 발달로 전 세계가 하나의 사회관계망으로 연결되어 손쉽게 정보를 공유하고, 새로운 관계와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정보교환은 참된 소통이 될 수 있고, 새로운 관계는 우정으로 발전되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소셜 네트워크를 통한 '소통의 혁신'을 우려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대중교통 안에서는 물론이고, 친구와의 식사 자리에서도 각자의 스마트폰을 꺼내들고 다른 누군가와 끊임없이 대화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마주보고 앉은 사람과의 소통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의 소통이나 정보교류에 더 애착하는 현실에서는 진정한 대화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발빠르게 움직여야만 하는 세상 속에서는 진실이 왜곡되거나 버려지고, 자기를 위한 칭찬만이 취사선택되곤 합니다. 더욱이 알지 못하는 사람과의 깊이 있는 대화는 기대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사회 변화와 함께한 미디어 급격한 성장과 변화는 전세계인을 하나의 대가족으로 만들어 서로 소통할 수 있도록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이 밑받침되지 않는 정보매체의 발전은 사회를 병들게 만듭니다. 오히려 스마트폰과 같은 기기들을 이격적 만남과 사랑을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디지털 세상을 열어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연결되어 사랑의 삶을 사셨던 것처럼, 사이버 세상 안에 공존하고 있는 그리스 도인들은 생명을 사랑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사랑의 네트워크를 지향해야 할 것입니다.
청소년 바로보기(24)
교회 밖의 청소년 사목②
"와서 보아라!"(요한 1,39)
청소년 선교를 생각할 때마다 저는 예수님이 찾아온 첫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교회가 이 시대 청소년들에게 '와서 보아라!'하고 자신있게 말을 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을 해 보면,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집니다. 가지고 있는 진리를 볼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하는데, 문제는 "어떻게?"라는 것입니다. '해답은 분명히 교회가 가지고 있는데..'조금 엉뚱한 생각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청소년이라는 시각으로 볼 때, 우리 교회와 사회 사이에 설명하기 어려운 벽을 봅니다. 그 벽 바깥에는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이 있고, 그 벽 안에는 주일학교에 나오는 청소년들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고 있는 교회를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우리 교회가 그 벽에 문을 만들고 그 문을 통해 조금씩 세상과 소통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2008년부터 청소년 법인을 운영하면서 저는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YMCA, YWCA, 한국 보이스카웃 연맹, 한국 청소년 연맹, 흥사단 같은 각종 청소년 활동 단체들과 일부 종교 단체들이 얼마나 열심히 우리 사회의 건강한 청소년 활동을 위해서 고민하고 노력해 왔는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부정적인 요소도 있었지만 그건 극히 작은 부분에 속합니다.. 중요한 건 우리 가톨릭 교회가 대 사회적인 청소년 활동에 관해서 지나치리만큼 무지한 모습으로 서 있다는 것입니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다양한 청소년 수련원, 수련관, 유스호스텔, 청소년 문화의 집 등 각종 청소년시설들도 언제부터인가 민간단체에서 그 운영을 넘기고 있었는데, 그 이유 중에는 관공서에서 할 수 없는 부분, 다시 말해서 청소년을 바라보는 정신적인 요소가 꽤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훌륭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우리 가톨릭 교회가 간절히 그것을 원하는 우리 사회 앞에서 뭘 해야 할지 모르고 멍하니 서 있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교구에는 합덕에 '청소년 유스호스텔'과 유성구에 '청소년 문화의 집', 그리고 대전 동구에 위치한 '청소년 수련관'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세상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는 가톨릭 정신을 보여주기에는 너무나 힘이 부족합니다. 우리 교회가 최근 시작한 대사회적인 청소년 활동들은 이제 겨우 씨앗 몇 개을 뿌려놓은 상황입니다. 이 씨앗이 싹을 틔우고 무럭 무럭 자랄 수 있도록 우리 신자들의 많은 관심과 도움이 필요합니다. 적어도 '역시 가톨릭은 달라도 무언가 다르구나'하는 소리를 들어야 "와서 보아라!"라고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박진홍 신부. 청소년 사무국장-
미사 속 숨은 보화
감사기도의 역사 3 : 감사 기도문의 고정
4세기 이후 감사기도는 단일 양식으로 고정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동방교회에서는 지역에 따라 수십 가지의 다양한 양식이 존재하였지만, 로마 가톨릭은 일부 경문만 전례시기에 따라 변하고 대부분의 내용을 한 가지 양식으로 바치게 됩니다.
신학적인 의미에서 하느님께 정하신 변하지 않는 규범적인 기도라는 의미로 이를 로마전문이라고 부릅니다. 1545년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발표된 비오 5세의 미사 경본 안에는 오직 로마전문만 실려 있었습니다. 이 로마전문은 오늘날 감사기도 1 양식으로 남아있습니다. 기도문이 천년이 넘도록 변치 않고 그대로 이어져왔다는 사실은 감사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17) -김두한 신부.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제2편 - 제1부 - 제1장 - 제1절 : 전례
지금까지 우리는 제1편으로 사도신경을 따라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제2편에서는 성삼위 하느님께서 어떻게 교회 안에서 활동하시고 우리는 어떻게 참여하는지 전례, 특히 일곱 성사를 중심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는 성당에 가서 전례에 참석합니다. 매주 미사를 봉헌하고 고해성사를 보고 종종 세례식, 혼인식, 서품식에 참석하며 때에 맞춰 성무일도를 바치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전례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또한 우리는 때때로 전례의 수혜자처럼 전례 안에서 수동적으로 머무르고 안주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수록 전례의 의미를 올바르게 알고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전례란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의 일"(요한 17,4)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 가운데 가장 놀라운 사건을 그리스도의 파스카의 신비(죽음과 부활)입니다. 그 신비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례를 통해서 계속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그 신비로 초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례에 참여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일(사제직, 예언자직, 왕직)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또한 전례는 성삼위 하느님의 활동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성부 하느님께서는 전례 안에서 우리에게 은총을 내려주시고 우리는 전례를 통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성자 그리스도께서는 전례 안에서 파스카 신비를 나타내시고 실현하시며 현존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전례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준비시켜 주시고,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고, 그리스도의 신비를 이루어주십니다. 이처럼 우리는 전례 거행을 통해 성부, 성자, 성령으로부터 파스카 신비의 은총을 받습니다.
그럼 전례는 누가 거행할까요? 전례는 한마디로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체 전체가 거행합니다. 우리 모두는 각기 특별한 방법으로 각자의 소명에 따라 세례로 받은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례는 교회 전체가 거행하는 공동체적 예식입니다. 다만 특별히 전례에 봉사하도록 부름을 받아 성품성사로 축성된 주교, 사제, 부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직자와 함께 성령으로 하나 되어 각자의 역할에 따라 전례를 거행하는 것입니다. 만일 성직자 홀로 집행하고 단지 지켜보기 위해 전례에 참석한다면,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에 소홀히 참여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사제직은 전례거행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일상생활에서 기도하고 감사드리며 거룩한 삶을 증언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우리의 사제직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이 호흡과
맥박
복되소서
복되게 하소서.
글. 그림 이순구 (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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