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3년 주보

성령 강림 대축일2013년 5월 19일(다해)

모든 2 2021. 7. 6. 16:37

성령의 삶의 위안」 김진 신부

"일 할 때에 휴식을, 무더위에 시원함을, 슬플 때에 위로를"(성령 송가 中)

 

 

+ 요한복음 20,19-23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말씀의 향기>

 

숨을 불어넣어 재창조하시는 주님 "성령을 받아라" -황인기 베드로 성령 봉사회 새얼센터 보좌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나서 맨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그(예수께서)는 그들의 얼굴에 숨을 불어넣으셨다."(요한 20,22 참조) 사람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영혼에 그 지체들을 주신 분은, 진흙 더미에서 올라오고 불결한 것들을 끊어 버린 그들의 얼굴에 숨을 불어넣으신 바로 그분이십니다.(아우구스티누스[요한복음 강해] 중)

 

  오늘 복음의 장면은 창세기 2장 7절의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는 말씀을 연상시킨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생명의 숨을 다시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 하신다. 숨(Ruah)은 성령을 나타내는 단어 중 하나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창세기에서 나오는 그 숨, 성령을 우리 호흡에 불어넣어 주시며 우리를 '재창조'하심으로써 본인 사명의 의미를 일깨우신다.

 

  우리는 세례와 견진으로 이 새 생명의 숨을 받았고, 다시 주님은 -특별히 언급하고 싶은 것은-고해성사를 통해서 계속 새롭게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는 '재창조'의 일을 우리 안에서 반복하신다. 이렇게 한 호흡으로 숨을 쉬는 우리는 한 성령을 받았기에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하고 외칠 수 있고 ( 로마 8,15 참조) 같은 아빠, 아버지를 둔 우리는 서로를 형제, 자매로 부른다. "우리는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1 코린 12,13)

 

  성령을 받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신바람이 나지 않고, 현실 타령을 하면서 신앙과 현실은 다르니 적당히 하는 것이 상식이 되어 버리고 사람들 눈치 보며 주님이 목숨 바쳐 선물하신 자유로운 '내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근본적으로 성령과 함께하는 삶을 누리지 못하는데 그 이유가 있다. 수많은 해결방법이 있고 조금만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면 고민이 풀리는 혜택(?)을 누릴 수도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것, 고해성사에 대한 믿음의 회복, 진지한 성찰과 고백에 있어 개방성 또는 솔직함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신 숨을 불어넣어, 성령으로 '재창조'하시는 가장 중요한 현장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체성사의 은총을 누리는데 가장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불어넣어 주신 숨, 곧 성령을 받아 숨 쉬는 우리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의 재발견이다.

 

 

청소년 바로보기(25)

 

교회 밖의 청소년 사목③

 

  사회복지도 마찬가지겠지만 교구의 청소년 법인이 각종 청소년 시설을 많이 운영한다고 해서 '대사회적인 청소년 활동을 잘한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대사회적인 가시적 효과와 사회 참여의 의미는 있으나 만약 운영 능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무리하게 운영을 할 때에는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습니다. 대사회적인 청소년 활동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본당 공동체가 어떻게 활동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사실상 이는 곧 청소년 선교와 매우 관련이 깊은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최근 대두되고 있는 학교 폭력에 우리 본당은 우리 지역 청소년들을 위해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가? 또는 왜곡된 우리 사회의 성문화가 우리 청소년의 정신 건강을 해치고 있는 상황에 우리 본당은 우리 지역 청소년들을 위해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저는 여기서 주목을 해 봅니다. 사실 이 모임은 성당에 오는 아이들의 간식을 챙겨주기 위한 모임이 아니라 청소년들의 영적인 건강을 위한 전반적이고 또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청소년들을 죽음의 문화로 몰아가고 있다면 가장 먼저 피켓을 들고 지역 사회의 정화를 위해 뛰어들 수 있는 분들은 바로 가톨릭의 어머니들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때로는 본당에서 지역 청소년들을 위해 작은 도서관을 운영할 수도 있을 것이고, 때로는 본당이 지역 청소년들의 건전한 놀이 공간을 제공할 수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시각에서 저는 최근 국가에서 시행하는 국제 청소년 성취 포상제에 우리 가톨릭 교회가 참여한 것을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흔히 레드오션이라고 불리는 경쟁의 정점에 있는 대한민구 청소년들에게, 세상을 넓게 보고 청소년이 청소년답게 성장하게 해 주기 위해 2008년부터 국가가 도입한 이 프로그램에 가톨릭에서는 전국 7개 교구가 연합하여 조규만 주교님을 회장으로 '한국 가톨릭 청소년 단체 협의회를 구성하였고, 2011년 5월에 당시 여성가족부와 양해각서를 체결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이제 각 본당에서는 일정 교육만 받으면 '국제 청소년 성취 포상제'의 본부를 만들 수가 있게 되었고, 본당이 본부가 되었을 때에는 가톨릭 신앙을 가진 청소년뿐만 아니라 지역 청소년들도 교회의 도움을 받아 이 프로그램에 참여를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대사회적인 청소년활동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으며 가톨릭 정신이 무엇인지를 적극적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청소년 선교는 매우 시급한 문제이지만 그것은 가톨릭 교회가 우리 사회 청소년들에게 감동을 줄 때 가능한 것임을 먼저 인식해야 합니다.

 

-박진홍 신부. 청소년사목국장-

 

 

미사 속 숨은 보화

 

감사기도의 역사 4: 감사 기도문의 다양화

  오랫동안 하나의 단일 양식으로만 바쳐지던 감사 기도문에 대해 19세기에 이르러 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로마 전문을 개정해야 한다는 전례학자들의 주장이 있었지만 우리 교회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다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날 때까지도 미사 경문에 쉽게 손을 대지는 못했습니다.

  이후 전례 개혁이 일어나 1965년부터 모국어로 기도를 바치게 되었고, 1968년 네 가지 양식의 감사기도문과 여덟 가지 감사송이 제정되고, 1970년에 수정된 감사기도문과  82가지 감사송이 수록된 미사경본이 출판되었습니다. 이밖에도 어린이 미사용 감사기도와 화해 미사용 기도 등 다섯 가지의 감사 기도문이 더 채택되면서 감사 기도문을 오늘날과 같이 다양한 형태로 쓰고 있습니다.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18) -두한 신부.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제2편 -제1부-제1장-제2절 :성사

 

  우리의 전례생활은 주로 성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영적으로 성장하고 생명의 양식을 얻으며, 죄를 용서받고 영육 간에 치유를 받습니다. 또한 교회에 봉사하도록 불리고 부부간의 일치를 이룹니다. 이처럼 성사는 우리의 삶을 영위하면서 신앙을 보살펴주며 성장시켜 줍니다.

 

  그렇지만, 성사는 백일잔치나 결혼식과 같은, 특별한 날을 기억하고 서로 기쁨을 나누기 위한 단순한 행사나 축하식일 수 없습니다. 성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의 표징들로써, 이 표징들을 통해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베풀어지기 때문에, 성사를 통해 구원의 확신을 얻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럼,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위해 당신의 은총을 마련하셨을까요? 하느님께서는 우주만물과 우리의 양심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온전히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면서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을 알게 되고 그분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셨기에 이제는 더 이상 예수님을 눈으로 뵐 수는 없지만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성사에 참여하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또한 성사 안에 그리스도께서 일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세례를 주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시고, 미사의 희생제물이 되시어 당신 자신을 봉헌하시며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성사를 실질적으로 주관하시기 때문에, 성사가 교회의 의향에 따라 거행되면 사제의 개인적인 성덕과 관계없이 하느님의 은총이 베풀어집니다.

 

  그러하고 성사가 우리의 자세와 별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사를 통한 은총은 모두에게 내리지만 성사가 맺는 결실은 그것을 받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습니다. 사제는 교회의 예식에 따라 정성껏 집전하고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고, 성사에 참여한 이들은 그리스도를 잘 맞이할 수 있도록 신앙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이렇게 성사는 신앙을 전제할 뿐만 아니라 말씀과 표징들로 신앙을 기르고 굳건하게 합니다. 그래서 모든 성사는 신앙의 성사들이라고 합니다.

 

  교회에는 일곱 가지 성사 곧,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고해성사, 병자성사, 성품성사, 혼인성사가 있습니다. 이제 세례성사부터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

내 영혼 맑게

채워주시고

험한 상처 씻어주시어

밝은 웃음 웃게 하여 주소서.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