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따르라」 고효준. 대전가톨릭 사진가회(2012)
"나를 따라라"(요한 21,19)
+ 요한복음 21,1-19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는데, 이렇게 드러내셨다.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갈릴래아 카나 출신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그분의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다.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하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다른 제자들은 그 작은 배로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 그들은 물에서 백 미터쯤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물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 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들이 아침을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하고 대답하자,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자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하고 말씀하셨다.
<말씀의 향기>
부활! 그 뜨거운 사랑 -박상균 세례자 요한 배방주임
신학생 시절 자주 읽던 「야곱의 우물」이라는 잡지에서 그리움이라는 주제로 쓴 글을 읽고 감동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내용은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작가가 말하는 그리움은 대충 이러했습니다. "그리움은 애절함이요 사무침이다. 그리움은 사랑의 또 다른 아픔이요 사랑하는 님에 대한 긴 한숨이다. 그리움이 있어 사랑을 하는 것이고, 그리움이 있어 사랑하는 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10년이 넘은 글이자만 너무 감동스러워 따라 스크랩을 했으나, 이사를 많이 다니는 직업상 지금은 마음 한 구석에서만 가금 꺼내 읽습니다. 오늘 베드로의 심정은 그리움으로 가득 차 보입니다. "주님이십니다."라는 말에 눈물을 흘렸을 베드로는 달려가 주님 앞에 섭니다. 살아서도 사랑의 주님이었고, 죽음 앞에서도 사랑의 주님이셨고, 되살아나서도 사랑의 주님은 사랑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주님 생전에 몰랐던 사랑은 이제 기나긴 회심의 길을 그분만이 완전하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은 베드로가 무슨 언변으로 주님을 맞이 할 수 있겠습니까? "와서 아침을 먹어라, " 고된 일을 끝내고 어머니 같은 사랑을 보여 주시는 주님! 마치 어머니가 자식에게 정성어린 밥을 먹이시는 듯한 주님의 모습에서 제자들에 대한 섭섭함이나 원망을 찾을 수 없습니다. 자신을 밥으로 내어주신 분이 밥을 지어주시니 실로 형언할 수 없는 눈물만이 나올 뿐입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에 걸쳐 물으보시는 이 질문은 내가 보여준 사랑대로 살 수 있겠니?라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베드로의 눈물, 주님께 그렇게 죽음까지 함께한다고 맹세까지 한 그였기에 다른 사도들과는 다르게 들렸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감정이라면 감히 사랑한다는 말조차 할 수 없었겠지만 지금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진심과 후회 그리고 뜨거운 사랑의 현실에 대한 눈물일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사랑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이토록 애절한 마음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데 누가 그 무게를 잴 수 있으며 길이를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천둥벌거숭이와 같이 철없기만 한 우리의 신앙을 주님 앞에 내어 드릴 수 있겠습니까? 다만 주님 앞에 부복하여 감사의 찬미만 드릴뿐, 그리고 조금이라도 그 사랑을 따라 할 수 있게 성령께 힘을 주십사 기도할 뿐입니다. 우리의 보는 행위가 모두 주님의 이름으로 하여질 터인데, 어찌 감히 나의 것을 가지고 사랑을 운운할 수 있을까요? 항상 감사하고, 기도하고, 기쁘게 살아가는 것이 주님 사랑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길이라 묵상해 봅니다. 아멘.
청소년 바로보기(20)
주일학교 교사와 청소년 사목 ①
이제 주일학교를 담당하는 교리 교사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현재 대전 교구 주일학교 교사 수는 매년 큰 변동이 있고, 또한 자료 수집 과정에 다소 과장된 부분이 있어서, 정확한 숫자 파악은 어렵지만 현재 대전교구에서 활동하는 교사는 대략 초등부 주일학교 교사 800여 명, 중. 고등부 교사 450여 명가량이 됩니다. 이를 대전 교구 본당 수와 학년 수에 맞추어 보면, 유치부, 초등부는 한 학년에 1명의 교사가 겨우 배정되는 실정이고, 중. 고등부는 안타깝게도 한 학년당 1명씩 배정되기 위해서는 대전 교구에서 약 300여 명의 교사가 부족한 상황입니다.
교사 수급문제는 우리 사회의 가치관 및 청년 실업 문제, 오랫동안 지속된 신앙 교육 과정에서의 문제 등 그 원인이 다양하기에 우리 모두의 많은 관심과 노력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일부 본당에선 노력이고 자시고간에 당장 본당에 청년들이 없으니 어떡하랴?라는 말씀을 하시기도 합니다. 너무나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우리 주일학교 교리 교사들을 바라보면 때로는 교구 청소년 사목국장으로서 무기력해지는 느낌도 받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는 노릇이며 우리가 할 수 한 최대한의 노력을 위해 우선 공감대를 형성하자는 의미에서 먼저 교리 교사들이 겪는 어려움부터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대전 교구뿐 아니라 전국의 주일학교 교리 교사 평균 수명은 사실 2년이 채 되질 않습니다. 이는 그만큼 이 활동이 어렵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죠. 우선 청년 교사의 경우를 보면 그들은 여느 청년들과 다름없이 학교나 직장에서 우리 사회 만연된 경쟁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한 주간을 보낸 후에, 토요일이나 주일에 개인의 휴식 시간을 포기하고 어린이, 청소년들을 위해 봉사를 합니다.
하지만 그들도 지난날 체계적인 신앙 교육을 받지 못했기에 교리 교사로서 충분한 자질을 갖추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실 알지도 못하는 교리를 주 일정 시간을 내어 공부하고, 그것으로 아이들 앞에 서서 가르친다는 것은 너무나 큰 부담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현재 한국 교회 안에서 교리 지식이 부족한 교사들이 짧은 시간에 연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사용 교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인식하는 교리 교사의 수준은 마치 신부님이나 수녀님들이 가지고 계신 교리 지식수준으로 높게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당장 눈앞에 있는 아이들을 가르칠 교사가 부족한 상황에 이것저것 따질 겨를도 없이 투입되는 주일학교 교리 교사들이 2년 정도 활동을 한 후에 한계에 부딪히며, 의욕을 잃고 포기하는 것은 이미 시작부터 예정된 문제인 것이죠. 사실 현재 활동하는 교리 교사들은 너무나 훌륭한 희생을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박진홍 신부, 청소년사목국장-
미사 속 숨은 보화
감사기도 : 미사 전례의 중심과 절정
감사기도는 미사의 중심과 절정을 이루는 장엄한 기도입니다. 「미사 총 지침」에 "감사기도, 곧 감사와 축성의 기도에 이르러 그 중심과 절정에 이른다. 사제는 백성의 마음을 기도와 감사로 하느님께 드높이도록 권하고 그들과 함께 공동체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를 바친다. 이 기도의 뜻은 전 공동체가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하느님의 위대하신 업적을 찬양하며 제사를 봉헌하는 것"이라고 명확히 그 중요성과 가치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기도는 사람의 심장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심장의 활동으로 사람이 활동하고 살아가듯이, 감사기도는 미사 전례에 생명력을 줍니다. 또한 감사기도는 지성소와도 같습니다. 지성소는 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곳으로 대사제만이 일 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는 하느님 현존의 핵심 장소입니다. 감사기도 역시 그리스도의 인격을 드러내는 사제가 전 공동체를 위하여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가장 중요한 주례기도입니다.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13) -최동일 신부. 사무처 차장
제1편-제2부-제2장 -제4절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셨다."
모두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반대사들의 고발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고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다. 예수님의 죽음이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에게 주었던 충격은 매우 컸다.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라 믿고 모든 희망을 걸었던 분이 십자가 위에서 힘없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어찌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모든 것이 끝난 듯이 보이는 이 죽음을 그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했을까?
예수님께서는 평소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마르 10,45)고 말씀하시면서 본인 스스로를 '하느님의 고통받는 종'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하셨다. 여기서 '하느님의 고통 받는 종'은 이사야 예언서에 등장하는 인물로 하느님께 대한 충실한 신앙 때문에 박해받는 예언자이다. 그는 모든 이의 죄를 끌어안고 이로 인해 고통받지만, 그 덕분에 모든 이에게 빛을 가져다주는 인물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박해를 받고 죽음을 당하는 것은 모든 이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속죄하는 것임을 미리 밝혀주셨다. 그러므로, 비록 예수님을 고발하고, 죽인 이들은 수천 년 전 이스라엘 땅의 특정 인물들이지만, 그 죽음의 원인은 그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크든 작든 죄에 속박되어 있는 모든 이에게 있다.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이가 누가 있겠는가! 그러니 결구 모든 세대, 모든 이가 예수님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예감하시고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저녁만찬을 하셨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셨는데 특별히 빵은 당신의 몸으로, 포도주는 당신의 피로 내어 주심으로써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는 것임을 알려주셨다. 또한 이 죽음은 당신이 피하지 못해 당하는 죽음이 아니라, 스스로의 자유로 선택하는 죽음이라는 것 또한 밝혀 주셨다. 그리고 이 저녁 식사를 기억하여 행하라는 명하심으로써 당신의 희생을 우리가 끊임없이 기억하고 기념 하도록 성체성사를 제정하셨다.
이상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이 결코 실패나 끝장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이루어진 신비요. 선물임을 알 수 있다. 인류 역사상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반전이 있을까? 죄의 결과인 죽음이, 그것도 가장 잔혹한 형벌인 십자가 죽음이 하느님의 가장 큰 은총이요 사랑의 징표가 되다니 말이다. 이처럼 하느님의 권능과 사랑은 가장 약하고, 가장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의 죽음 안에서 완전히 드러났는데, 여전히 우리는 희망을 힘있고 약삭빠른 이들이 모여 있는 저 크고 화려한 궁전에 두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깊은
믿음과 사랑
차고 넘침에
감사기도드립니다.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 > 2013년 주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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