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실성지
황무실의 첫 순교자 복자
이보현 프란치스코
황무실은 오래된 교우촌으로 충청도 내포지역에 복음이 전해진 초기인 1785년경부터 신자들이 거주하였다. 초기 신자로 알려진 유군명 시메온은 입교한 후 종들을 해방해 주어 일찍부터 하느님 안에서 평등을 실현한 인물이었다.
황무실의 첫 순교자로 기록된 이는 1773년 이곳에서 태어난 복자 이보현 프란치스코이다. 이 프란치스코는 부유한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어렸을 때 부친을 여의었다. 그는 조금 고집스럽고 난폭한 성격을 지녔기에 아무도 그를 억제할 수 없었다고 한다. 20세가 조금 넘었을 때,이 프란치스코는 고향 인근에 살던 황심 토마스에게 교리를 배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진리를 깨닫고 얼마 안 되어, 이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행동과 본성을 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혼인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지만,모친의 권유에 순종하여 혼인하였다. 그런 다음 교리를 자유롭게 실천하고자 황심 토마스와 함께 충청도 연산으로 이주해 살았고, 1795년 주 야고보 신부를 자신의 집에 모셔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교리에 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이 프란치스코의 열심은 날로 더해 갔다. 그는 보속과 고행에 열중한 나머지 산중에 들어가 힘들게 생활한 적도 있었다. 17957년 정사박해로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자,이 프란치스코는 박해를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가족과 동네 교우들을 격려하는데 노력하였다. 박해가 시작된 지 한두 해가 지난 어느 날,이 프란치스코는 머지않아 자신에게도 위험이 닥쳐오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온 동네 사람들을 불러 술을 대접하면서 "이것이 마지막 잔치"라고 말하였다. 과연 이틀 뒤에 포졸들이 연산 땅에 나타났고, 그의 고향 덕산을 담당하는 해미 관장에게 이송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았다. 형벌을 받으면서도 그는 "사람들의 기원이 태초에 그들을 창조하신 천주께 있으니,어찌 그분을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한나절 넘게 갖은 고문을 당하였지만, 이 프란치스코는 절대 굴복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장터로 끌려 나가 혹독하게 매를 맞았지만 목숨이 끊어지지 않자 망나니들이 그를 넘어뜨린 뒤 몽둥이로 불두덩을 짓찧어 죽게 하였다. 그때가 1800년 1월 9일,당시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100여 명의 신자가 거주했던 황무실 교우촌은 박해 중에 숨어서 활동하던 프랑스 선교사들의 안식처였다. 이곳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 중 메스트르(Maistre)신부와 랑드르(Landre)신부가 각각 1857년과 1863년 병으로 선종하여 이곳에 묻혔다. 황무실 교우촌은 1866년 병인 박해로 붕괴되어 다시 회복하지 못하였다. 이곳에 있던 메스트르,랑드르 신부의 묘는 1870년 합덕 성당으로 이장되었고, 2003년 다시 한번 대전교구 성직자 묘지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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