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 쓰여진 신앙 이야기

황새바위 순교성지(1)

모든 2 2021. 2. 2. 12:16

 

 

 

황새바위순교성지(1)

참수 처형으로

대표되는 순교성지

 

  황새바위순교성지는 참수 처형으로 대표되는 순교성지이다. 공주는 내포와 더불어 천주교 전파가 가장 활발했던 곳이며,조선시대 충청감영이 있었기에 천주교인들이 가장 많이 처형된 곳이다. 사학죄인으로 잡힌 천주교 신자들이 배교를 거부할 경우 사형 판결 권한을 위임받은 관찰사의 명령에 따라 제민천변의 본류와 제민천의 지류가 만나는 모래사장으로 공개처형지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지금까지 자료조사를 통하여 발굴된 순교자는 총 337명으로 이는 한국 최대의 기록으로 여겨진다. 황새바위순교성지에서 기리고 있는 순교자로는 성 손자선 토마스,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복자 이국승 바오로,김원중 스테파노, 청양 정산에서 순교한 이도기 바오로이다.

 

  복자 이국승 바오로(1772-1801는 1772년 충청도 음성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충주로 이주해 살았다. 충주에 전해진 천주교 신앙을 듣게 된 바오로는 이 새로운 종교를 철저히 배우려고,경기도 양근 땅에 사는 권일신 프란치스코를 방문해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여 신자의 본분을 지키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이러한 그의 변화를 보고,은총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했다. 1795년 을묘박해 때 체포되었으나,너무나 긴장하고 두려워 배교의 말을 하고 풀려났다. 하지만 자신이 배교한 것을 곧 뉘우쳐 보속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그의 부모는 이런 그의 삶을 잘 알지 못하여 결혼을 끈질기게 권유하였지만,한 차례의 배교를 경험한 그는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하고자 그 권유를 거절했고,집을 떠나 서울로 가서 살았다. 서울에서 독신생활을 하며 온전히 착한 일을 하는 데만 정성을 다할 수 있었다. 그의 독실한 삶을 보고 차츰 주변 사람들이 관심을 두게 되었고, 그는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며 따뜻한 사랑으로 이웃의 어려운 일에 헌신하였다. 교우들은 그의 모범을 보고 따랐으며, 외교인들 가운데 그의 행실을 보고 천주교를 선봉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고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포도청으로 압송되면서도 이 바오로는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이 바오로는 형벌과 문초를 받는 동안 여러 차례 배교를 하고 이를 철회하는 일을 반복하게 되었따. 하느님께서는 이 바오로의 진심을 알고 계셨기에,그가 여러 차례 유감을 느끼도록 한 뒤에야 신앙을 굳게 증언하고, 사형 선고를 받는 데 필요한 힘을 내려주셨다. 형조에서 그는 "지난 10년 동안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이미 고질병 같이 되었으니,비록 형벌을 받아 죽는다고 할지라도 신앙을 지키는 마음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일찍이 충주에서 체포되었을 때에는 혹독한 형벌을 이기지 못해서 '마을을 바꾸겠다.'는 뜻으로 말하고 석방되었지만,이는 저의 본마음이 아니었습니다."라고 최후 진술을 하였다. 결국 1801년 7월 2일 사형 판결을 받고 충청도 공주로 이송되어 순교하였다. 순교 후 그의 조카들이 시신을 거두어 공주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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