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흥동 옛 성당 내부(1957년)
대흥동본당은 1984년 교구 설정 이래 줄곧 '주교좌 본당'이었다. 그럼에도 1963년 원조를 받아 지금의 성당을 짓기 전까지 낡은 목조 성당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자료 제공:내포교회사연구소(041)362-5028
+ 루카 복음 9,23-26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말씀의 향기>
신앙이 무엇입니까? -최용상 바오로 대전가톨릭대학교 사무처장
+ 찬미 예수님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교자들은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이 신앙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놓았습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무엇이기에 목숨까지 내어놓은 걸까요?
순교자들은 박해를 피해 산속 깊이 척박한 땅을 일구고,부족한 양식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며 힘겹게 지냈습니다. 부모들은 굶주린 자녀에게 자신들이 배운 기도와 교리를 가르쳤고 먼저 세상을 떠난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신앙을 전했습니다. 신앙을 전하기 위해 삶을 인내하고,가르치고,기도하고,신앙의 모범을 보여주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을 부모의 기도와 신앙의 모범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성직자의 공소 순방소식이 전해지면 미사에 참례하고 성체를 모시고 고해성사를 하기 위해서 하루에 100여 리(40km)걷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추위나 더위도 이 신앙의 행보를 방해 할 수 없었습니다. 이 행보에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했습니다. 신앙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하게 됩니다.
순교자들은 교리를 실천하기 위해 가난한 이들에게 재산을 기꺼이 내놓았습니다. 노비를 풀어 주며 그들을 가족처럼 대하고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더구나 가족을 건사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과부와 고아들을 거두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신앙으로 끈끈히 연결된 교우촌은 어떤 기근이 와도 끼니를 거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순교자들은 성사에 대한 열망,가정 안에서의 신앙교육,또한 이웃에 대한 자선과 사랑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직접 실천했습니다.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물어보게 됩니다. 순교자들만큼은 아니지만 한 번이라도 신앙에 열정적이었던가? 단 한 번도 열정적인 적이 없으면서 감히 신앙인의 삶에 대해 실망하거나 후회하지는 않았는가?
박해 없는 시대를 사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봤으면 합니다. 제가 서두에서 "신앙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대부분 한 번쯤은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던진 적이 있으실 겁니다. 그리고 이 질문의 답은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라 신앙을 열망하고 신앙에 열정적인 모습으로 살 때 찾게 될 거라 믿습니다. 우린 열망하고 열정적일 수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신앙의 피를 물려받은 우리기에 그 열망과 열정의 피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via의 시선(나는?)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한주간의 글-
"효율성의 규범에 더 단단히 매달릴수록,우리가 떠맡을 과제는 더 적어진다." 책을 읽다가 잠시 머물은 글입니다. 성과를 요구하는 사회에서 그리고 도전보다는 실패에 대한 예감이 더 무겁게 여겨지는 사회에서,효율성은 자신을 숨길 수 있는 효과적인 마술입니다. 우리 사회 아니 우리 교회는 사랑과 봉사의 가치를 전하면서도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 이뤄져야 하는 성장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과 봉사를 위해 갖춰야 하는 지식과 이에 따른 성공은 자랑하지만,지식만큼의 무지와 성공만큼의 실패에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더 작게 일하고 더 많이 얻고 싶습니다. 아니 적당히 일하고 되는 것만 하고 싶습니다. 되는 것은 이미 공동체에서 이뤄지는 일들이고 검증된 일들이어서 실패 확률은 적습니다. 또한 쉬지 않고 일했으니 비난받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찾지 않습니다. 우리시대에 필요한 일들이 무엇인지 묻지 않습니다. 사람은 적당하게 비난받지 않을 정도까지의 악을 행하면서 스스로 자신이 선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이만 하면 됐지"라며 악한 사람으로 손가락질 받지 않을 정도의 행위를 통해 스스로의 선을 주장하는 사람들,그런데 왠지 그들과의 만남이 지겨워집니다.
내가 무엇에 기여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의 의도를 통제할 수 있고 다른 이들에게 과시하지 않으며 다만 그들에게 온전히 기여하겠다는 마음을 잊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사실 나는 내가 누구에게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찾고 누려야 하는 나의 몫이 아닙니다.
효율성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숨이 찹니다.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할 일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커지기 때문입니다.
동물원을 탈출한 퓨마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본성과 다르게 취급받았던 생명,인간의 눈요기를 통한 잠시의 쾌락을 위해 저당잡힌 삶을 살았던 그가 그를 가뒀던 철창의 문턱을 넘었습니다. 잠시의 시간,그가 누렸을 자유를 느껴봅니다. 그 자유의 대가가 죽음이라는 궁극의 실패라 할 지라도 본성이 억압당한 채 우리 안에서 죽을 운명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안전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지 아니면 예정된 실패를 향해 걸어갈지... 선택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지혜를 청하는 오늘입니다.
행복 낱말 사전 4
# 가로등
가로등은 홀로 서 있어도 반갑습니다. 그 하나의 존재만으로도 어두운 모퉁이를 돌아선 사람들에게 충분히 위안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로등 불빛은 눈부시지 않아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밝아서 고마운 빛이 아니라,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중에도 가로등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한사람만으로도 충분히 반갑고,그 한 사람의 따뜻한 마음만으로도 밤길을 헤쳐 나갈 것 같은 위로를 받게 되는 사람들 말입니다.
세상이 어둠에 잠길 때 그들이 하나둘 가로등이 되어 불을 밝히고,그 길을 따라 우리는 주님을 향해 묵묵히 걸어갑니다.
# 충돌
충돌은 속도감이 있을 때 발생합니다. 속도감이 전혀 없는 것끼리 부딪히게 될 때,그것을 충돌이라 부르지 않고 접촉이라 부릅니다.
충돌은 부피가 크면 클수록 그 결과가 더 심각합니다. 부피가 작은 것끼리 부딪히면 상처가 최소화되지만,부피가 큰 경우의 충돌은 돌이킬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만듭니다.
타인과 충돌하지 않고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속도를 늦추고 부피를 줄여가면서 충돌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노력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사람끼리 충돌 없이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 조금은 천천히 자신부터 성찰하고,마음 안의 불필요한 짐을 덜어 내는 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
모든 교우들과 천국에서 만나
영원한 삶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내 입을 여러분의 입에 대어
사랑을 친구(親口)합니다.
1846년 8월
부감목 김 안드레아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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