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22년 주보

연중 제15주일 2022년 7월 10일(다해)

모든 2 2022. 7. 10. 18:05

 

신례원성당 수철리공소

충청남도 예산군 수철길 630(예산읍 수철리 10-2)

 

 

+ 루카복음 10,25-37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그때에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말씀의 향기>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 유덕준 라파엘 세종 정바오로 주임-

 

  “누가 저의 이웃 입니까?”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군지를 깨닫는 것, 그리고 사랑해야 할 이웃에 는 아무런 경계가 없음을 깨닫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경계를 넘어 사랑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모든 이를 진심으로 아무 경계없이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경계와 편견들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자신이 알아들은 것이, 혹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틀과 가면이 더 큰 것을 보지 못하고, 더 나은 것을 듣지 못하고, 더 성숙한 것을 행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사제와 레위인이 이에 해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그 당시에 엘리트들이었고 제단에서 봉사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거룩함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던 이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상처 입고 죽어 가는 이들을 자신이 배운 것에 따라 혹은 자신의 고정관념에 따라 만지지 말아야 할 속된 것으로 판단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들은 강도를 예방하는 일들은 경찰이 해야 하고, 환자를 돌보는 일은 의사가 해야 하기에 자신은 그 일과 무관하다고 외면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그릇된 고정관념 때문에 그들은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알면서도 그것을 실천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그릇된 판단에 대해 오늘 복음에서 그들은 “길 반대편으로 가버렸다.”고 표현을 합니다. 구원의 길과는 반대되는 길을 택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에게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자신의 생각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던 것으로 부터 깨어나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자신의 자아를 확장하는 것, 거짓된 자아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 참된 자아를 발견하는 것, 자신의 뜻보다는 다른 사람의 선을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영적인 성장에 이르는 길이요,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율법교사도 사제도 레위인도 모두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제 아는 것만이 아니라 실천이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주님의 자비를 나누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사랑을 전하도록 걸음을 재촉합시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교구 전담 사목을 소개합니다

 

세종충남가톨릭사회복지회

 

  얼마 전 모 본당으로부터 후원을 받게 되었다. 결론 이 후원이라면 그 시작은 인식이었다. 모든 법인에 공공성과 투명성 등을 이유로 사외이사를 선임하게 되어 있는데 공교롭게도 가까운 본당의 사목위원분들을 모시게 되었다. 법인이사회의를 진행하면서 법인의 여러 시설에 대해 소개해 드렸는데 적잖이 놀라워하셨다. 그리고 여러 시설에 대해 설명을 요구하셨다. 당연히 지적을 위한 물음이 아니라 대사회적인 교회의 역할과 활동에 대한 호기심들이었다. 본당 사회복지분과에서 일하면서도 교회가 어떤 시설을 운영하고 지원하는지에 대해서는 들어볼 기회가 많지 않았다고 하셨다. 그래서 시설들과 공동체에 대해 설명을 드리니 직접 방문하고 싶다는 의지를 보이셨다. 몇 개의 시설을 방문해 보시고는 바로 후원으로 이어졌고 쌀 2톤이 법인사무실 앞에 놓여지게 되었다. 그리고 여건이 된다면 잊지 않고 후원하겠다는 의지도 밝히셨다.

 

  교회에서 이런 시설을 운영하는지 몰랐다. 그래서 도와야겠다는 분들이 있는 반면에 이런 것까지 ‘나랏돈’을 받아가면서 교회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도 시설의 장으로 있으면서 그런 고민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교회기관과 전혀 관계가 없는 회의를 다녀보면 나의 신분이 자리를 대신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좌불안석이었다. 시간이 지나기만을 바랐는데 언젠가부터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해 어떻게 지원하는 것이 좋을지 혹은 사회에 필요한 정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탁상공론으로 끝날지언정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교회의 역할이라 고 생각했다. 전문성만을 요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사람이 사는 일을 살피는 일이다. 그런 생각과 판단이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그런 의지는 사업으로 이어졌다. 밖에서 보는 교회의 모습은 아직까지 긍정적이었다. 가톨릭이라면 투명하고 공정하게 운영할 것이라는 기대는 사회 전반에 흘러있다고 느껴졌다. 나 역시도 교회를 등에 업고 장애인에 대한 사업을 늘려가게 되었고, 공동체 모임도 만들게 되었다.

 

  국가보조금, 시·도보조금으로 운영되는 시설이 많아졌다. 그리고 한국인의 특성인지 복지사업의 성격이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 빠르기와 촘촘함도 한 해 한 해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은 여전하다. 그것을 누가 해야 하는지를 판단하려고 하면 이미 늦었다. 생각이 늦으면 우리는 다른 곳에서 이유를 찾는 다. 교회는 공동체가 시작될 때부터 사회복지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정체성도 나눔에서 찾는다. 물론 약자를 위한 지원으로만 생각되던 복지가 지금은 많은 부분 문화와 여가로 대체되거나 혼용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교회 안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집중해야 하는지 인지할 때인 것 같다. 그렇다고 멈추거나 주춤해서는 안된다.

 

  교회의 사회복지는 교회의 본질이다. 관심이 있으면 보이고 보이면 실천하게 될 것이다. 작은 지면으로 전 하는 사회복지의 소식은 역시 사람 사는 이야기이고 사회적 약자로 통칭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다. 세종충남가톨릭사회복지회는 노인복지부터 시작해서 이주민복지, 장애인복지 등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더 구체적인 소식은 나눔터 소식지와 작은 후원으로 알 수 있기를 바란다. 

   -변창수 시메온 신부 세종충남가톨릭사회복지회 회장-

 

 

 

가톨릭 신자로서 알아야 하는 <미사>

 

14. 미사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 2

 

  미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주님과의 특별한 만남은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의 구조에서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주의 만찬인 미사 때에 하느님의 백성은 주님을 기념하여 미사성제를 봉헌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대행하는 사제를 중심으로 한자리에 모인다. 이 같은 지역적 교회 집회에서 ‘단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곳에는 나도 그들과 함께 있으리라.’ 하신 그리스도의 약속이 가장 뚜렷하게 실현되는 것이다. 십자가상 제사의 계속인 미사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단체 속에 실제로 현존하시며, 사제의 인격과 당신의 말씀 속에 현존하시며, 본체적으로는 온전히 성체의 형상 속에 현존하시는 것이다(로마 미사 경본 총 지침 7항).”

 

  로마 미사 경본 총 지침 7항에 의하면 미사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하느님 백성>, <한자리에 모이다>, <그리스도의 현존> 등이 언급됩니다. 곧, 미사의 구조에 는 이 세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리스도의 현존을 중심으로 봉헌하는 제사의 개념은 미사의 구조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이기도 합니다.

 

  “미사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 두 부분으로 구성되며, 이 두 부분이 긴밀히 연결되어 단 하나의 예배 행위를 구성한다. 미사 때에 하느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성체를 제공하는 식탁이 마련되며, 여기서 신자들이 교육을 받고 기력을 회복하게 된다. 그밖에 개회식폐회식의 예식이 첨가되어 있다(로마 미사 경본 총 지침 8항).”

 

  하느님 백성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리스도의 현존 (말씀과 성체)을 중심으로 봉헌하는 미사, 이러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미사의 구조는 하느님 백성들이 지금을 살아갈 힘을 얻도록 도와준다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모든 미사의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더보기

시작 예식 - 말씀 전례 - 성찬 전례 - 마침 예식

 

  오늘날 교회는 신자들이 함께 만나 하느님 말씀을 듣고 나눕니다. 그리고 성체를 함께 나누어 먹고 마십니다. 이러한 말씀과 성체를 통해 얻게 된 힘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신앙의 원동력을 제공합니다. 그렇기에 미사의 구조에 대한 이해 없이 단순히 미사 전례에 참여하는 것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갈증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미사의 구조는 우리에게 능동적인 참여를 돕기 위해 제시됩니다. 공동체가 미사의 구조에 따라 주님과의 특별한 만남을 인식할 때, 비로소 그 힘은 구체화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윤진우 세례자요한 신부 사목국 차장-

 

 

 * 교구 내 공소

 

신례원성당 수철리공소

 

  수철리(드르니, 득운리)는 1900년 퀴를리에 신부의 사목담당 지역으로 65명의 신자가 있었다. 성 황석두(루카)와 신리의 성 손자선(토마스)의 후손 중 일부가 피신하여 살던 곳이며, 이인하 신부(1925-2011)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신앙의 역사가 깊은 곳으로 뒷산 너머엔 1890년 설립되었던 간양리 성당지가 위치한다. 현 공소는 1960년 한옥 목구조 초가 형태로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건축되었다. 인근 임야와 대술 벌목장에서 건축 목재를 조달하였다. 2014년 방치되어 있던 공소 건물을 대수리하고 주변 토지를 매입하여 환경을 정비하였다. 7세대 중 10여 명이 공소와 신례원성당으로 미사에 참여하고 있다.  

 

 

<이충무의 숨은 행복 찾기(36>

 

연속극이 아니라 단막극

 

  가게나 음식점 등에서 뜻밖의 서비스를 받게 될 때가 있다. 그런 경우 세세하고 다정다감한 주인분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받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단지 반찬 몇 가지만 샀는데도 계란말이를 덤으로 넣어 주시는 반찬가게 사장님, 칼국수를 시켰는데 혹시 배고플까 봐 공깃밥까지 챙겨 주시는 음식점 사장님...

 

  생각지도 않았는데 받게 된 이런 배려에 누군들 마음 이 환해지지 않을까? 덤으로 얻게 된 것의 가격을 떠나, 주신 분의 따뜻한 마음은 최고의 가치로 내 기억 속에 각인된다.

 

  그런데 사람 마음은 참 야릇하다. 그런 서비스가 몇 번 반복되게 되면, 고마움이 더 커져야 할 텐데, 오히려 감동은 줄어들고 어째서 기대감만 더 강해지게 되는 걸까?

 

  매번 반찬을 덤으로 주시던 사장님이 어느 날 그냥 주문한 반찬만 내어 주시거나, 서비스로 공깃밥을 챙겨 주시던 식당 주인께서 달랑 칼국수만 내 오면 기분이 묘해지는 건 왜일까?

 

  지금껏 받아 온 것이 배려였음에도 그것을 받지 못하면 마치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지 못한 것 같아 조금씩 서운한 감이 드는 내 모습에 스스로 당황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주는 사람은 좋은 마음으로 선물처럼 준 건데, 받는 사람은 그것이 마치 당연히 받아야 할 서비스처럼 여겨지는 불편한 진실... 아마도 이 황당함 때문에 이런 말이 생긴 건 아닐까?

 

  “애초에 잘해 줄 필요가 없어. 잘해 주면 그게 당연한 게 되고 나중에 못해 주면 도리어 화를 낸다니까!”

 

  좋은 마음으로 베풀고 싶어도, 결국 그 결과가 해피 엔딩이 아닐까 봐 그 배려를 시작부터 원천적으로 단절하는 것만큼 안타까운 일은 없을 것이다.

 

  뜻밖의 배려를 선물처럼 받을 때 처음엔 받은 것의 혜택보다 준 사람의 그 마음이 더 커 보였기에 기뻤었다. 그런데 배려가 계속되면 마음보다 받는 것의 혜택에 눈길을 빼앗기게 된다.

 

  이제부터는 단단히 명심해야겠다. 베풂은 연속극이나 미니시리즈가 아니라, 그 한 번으로 완벽한 단막극이라는 것을. 다음에 ‘’가 아니라, 이번만으로 ‘’가 행복을 망가뜨리지 않는 비법이다.

 

-이충무 바오로 /극작가, 건양대학교수-

 

 

 

<1분 교리>

 

Q-1) 교적은 무엇인가요?

A) 신자라면 누구나 소속 교회에 교적을 가지고 있는데, 세례받은 이들의 신앙생활에 관한 기록을 '교적'이라고 합니다. 가톨릭교회는 사목 관할권을 지역에 따라 나누기 때문에(속지), 만약 주소지가 변경될 때는 새로운 주소지가 소속된 본당으로 본인의 교적을 옮겨 놓아야 합니다. 교적 변경은 본당 사무실에 전화나 방문으로 간단히 전산처리가 됩니다.

 

Q-2) 교무금은 무엇인가요?

A) 교무금이란 매월 일정액을 성당(사무실)에 봉헌하는 예물을 말합니다. 주일미사 때 바치는 헌금이 본래 하느님의 것이기에 하느님께 다시 돌려 드린다는 상징성이 있지만, 교무금은 교회의 유지와 운영에 필요한 비용으로 선교활동비, 교육비, 가난한 이들과 사회 정의를 위해서도 쓰입니다. 이는 구약의 십일조 전통에서 유래합니다.

 

 

더위 속 건강관리

 

  너무 덥고 습한 날씨가 이어지어 농촌이나 건설 헌장에서 일하는 분들에게는 힘든 날들의 연속입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태양을 형님, 누님이라고 표현했는데요. 저 같은 경우 현장에서 일하다 보니 여름만 되면 '형님(태양) 적당히 좀 하시죠'하며 하늘을 바라보곤 합니다. 다들 입장의 차이는 있지만 심한 더위는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마음은 같겠죠?

아래는 무더위 속 건강관리에 관한 기사 내용입니다.

 

  <과도한 고온 노출, 체온 조절 기능에 이상이 생겨...>

  을지대학교병원 응급의학과 박정우 교수는 "지나치게 더운 날씨가 이어지면 체온을 낮출 수 있는 능력이 저하된 노인이나 체온 조절 기능이 발달하지 않은 어린이들은 특히 주의해야 한다."라며 "급격한 온도변화로 심혈관에 부담을 줄 수 있어 한낮에 외출을 삼가고 수분을 섭취하는 등 폭염에 대비해야 한다."라고 조언한다.

 

  <더위로 나타나는 증상들>

  폭염에 장시간 노출되면 두통, 구토, 현기증, 체온상승과 함께 불쾌감이나 권태감, 집중력 저하 등의 증상들이 나타날 수 있고, 심한 경우 근육의 경련을 비롯하여 실신이나 의식 변화 등의 증상까지도 발생할 수 있다.

 

  <폭염 건강관리법, 무리한 운동은 금물>

  무엇보다 무더운 날씨에는 될 수 있으면 야외활동을 피해야 한다. 실내 환경 또한 너무 덥거나 춥지 않도록 냉방장치를 활용해 적절한 실내온도(26-28)를 유지해야 한다. 옷은 가볍고 밝은색의 옷, 헐렁한 옷을 입고 야외활동 시에는 뜨거운 햇빛에 화상을 입을 수도 있으므로 모자와 선글라스, 자외선 차단제를 사용해야 한다.

 

-글. 사회복음화분과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