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22년 주보

연중 제14주일 2022년 7월 3일(다해)

모든 2 2022. 7. 3. 16:48

 

신례원성당 계촌리공소

충청남도 예산군 계촌 2길 62(신암면 계촌리 263-2)

 

 

   + 루카복음 10,1-12-20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루를 것이다.>

 

   그때에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 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 올 것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하고 말하여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길에 나가 말하여라.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보라,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말씀의 향기>

 

멀고도 먼 평화의 길  - 곽명호 루카 논산부창동 주임

 

  몇 년 동안 인류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 감염병은 인간의 교만함으로 쌓아 올린 바벨탑 사건의 결과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를, 나라와 나라 사이를 더욱 멀리 벌려 놓았습니다. 사회는 점점 더 개인주의가 심화되고, 나라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경제적 횡포도, 전쟁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멀고도 먼 평화의 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시며,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당신의 평화를 전하라고 명하십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어느 시대, 어느 곳을 막론하고 항상 당신의 평화를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를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고, 당신의 평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언제나 사람들의 이기심과 욕심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평화를 깨뜨리게 하는 많은 사건 사고들도, 우리 자신의 평화가 깨지는 일도... 그 내면에는 언제나 욕심과 이기심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사 중에 사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

...”라고 인사합니다. 지금 우리들의 마음은 언제나 주님의 평화를 간직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과 함께한다는 명백한 증거는 우리 마음에 평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지금 내가 평화롭지 않다면 예수님도 그곳에 함께하시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참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평화를 세상에 전하는 평화의 사도들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머무는 곳에는 언제나 평화가 넘쳐흘러야 합니다. 먼저는 나 자신의 평화, 그리고 가정의 평화, 더 나아가 공동체의 평화, 더욱더 나아가 세상의 평화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하십니다. 오늘날은 어느 누구도, 어느 나라도 자신의 이익과 자국의 이익을 위해 노력할 뿐, 평화를 위한 노력은 늘 부족합니다. 때로는 평화라는 가면을 쓰고 이익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 평화를 전하고 선포해야 할 일은 많은데, 평화를 전하고 선포하는 일꾼이 적다 하십니다. 

 

  평화를 전하는 일이 거창하고 막연한 일이 아닙니다. 또 평화를 전하고 그에 봉사하는 일이 몇몇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임무도 아닙니다. 작은 일부터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가 평화를 전하고 봉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작은 평화의 촛불이 모여서 태양처럼 빛을 낼 수 있다면 평화의 길이 이렇게 멀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공동의 집>

 

성장말고 생명

 

  작년에 개봉한 ‘퍼스트 카우’는 1820년대 미국 서부, 초기 자본주의의 모순을 보여주는 영화였습니다. 아메리카 선주민들의 공유 자원이었던 땅과 자원을 빼앗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몰려든 약탈자들이 정작 개인의 자원인 젖소의 공유는 결코 인정하지 않는 

모순을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자본주의는 공동 재산인 토지, 숲 그리고 강과 같은 필수 자원들을 자본가들이 폭력적으로 

사유화하고 그 사유화한 재산을 더 많이 축적하기 위해 식민지 수탈과 함께 노예 노동자들의 노동력 착취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생태계는 균형을 잃었습니다. 자본주의의 등장은 결코 점진적이거나 평화롭지 못했습니다. 자연으로부터, 인간으로부터의 수탈의 과정이었습니다.


  분기마다 뉴스와 신문들은 국내 총생산량(GDP)의 성장률을 흥분해서 보도합니다. 모든 국가 산업과 경제는 끊임없이 성장해야만 하고 GDP 성장만이 빈곤을 줄이고 일자리를 창출하며 우리의 삶을 구원할 유일한 길이라고 속삭입니다. 좌파 우파 정치인들도 
단결하여 성장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경제가 성장하지 못하면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질 것처럼 모두가 강박적으로

경제 성장에 총력을 기울입니다. 하지만 GDP 성장은 더 많은 에너지와 자원을 소모하게 되고 쓰레기를 쏟아내며 생태환경의 파괴를 초래합니다. GDP는 돈으로 환산되는 것만 이야기할 뿐, 그 활동이 얼마나 유용한지 파괴적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갯벌을 콘크리트로 메우고 공항을 지으면 GDP는 올라가지만, 다양한 생물들의 서식지 파괴나 탄소 흡수원으로서의 갯벌의 손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성장이 아니라 자본축적만을 위해 성장을 추구하는 성장주의입니다. 성장에서 벗어나는 것은 생각만큼 과격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에너지와 자원의 과도한 사용을 금하고 불평등을 줄여 소득을 보다 공평하게 분배하고 공공 서비스에 투자하는

것, 다시 말해 자본의 끝없는 축적 대신 인간 행복의 증진과 생태계와 균형을 이루는 ‘탈성장’입니다. 탈성장은 덜 취하는 도전의

과정에서 시작하지만 우리를 풍요의 세계로 데려다 줄 것입니다. 그 풍요의 세상을 상상해 봅시다. 빈곤이 종식되고 열대우림은

다시 자라나 생명이 약동하고 맑은 강물이 흐르며 토양이 되살아나는 치유와 회복의 세상 말입니다. 지금은 꿈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그 꿈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신소영 레지나 대전교구 생태환경위원회-

 

 

 

가톨릭 신자로서 알아야 하는<미사>

 

13. 미사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 1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님과의 특별한 만남미사의 아름다움을 되찾고, 각자의 삶의 완전한 의미도 되찾을 수 있는 미사를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교황님께서는 미사에 관해 설명하시면서 “만남”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삶의 원동력을 받아 나아가기 위해선 주님과의 특별한 만남인 미사를 통해 가능합니다. 우리는 그 동안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미사가 무엇인지, 그리고 보편교회가 강조하는 미사의 중요성에 대해서 나눠보았습니다. 이러한 정의를 바탕으로 미사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자세히 다뤄보고자 합니다.

 

  “미사”라는 단어는 라틴어의 “Missa”에서 유래됐으 며, 이를 있는 그대로 발음한 것이 우리가 이해하는 미사입니다. 실제로 이 용어가 처음부터 사용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초기 교회에서는 “빵 나눔”, 2~3세 기에는 “감사기도, 감사”, 4세기에는 “제사, 봉헌, 성무, 집회” 등으로 불렸습니다. 5세기에 이르러 서방교 회에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상의 제사를 재현하며 최후 만찬의 양식으로 그리스도 친히 당신 교회 안에 물려 준 가톨릭교회의 유일한 만찬 제사를 지칭하는 의미>로 “미사”라는 단어가 통용됩니다. 그리고 1562년 트리엔 트 공의회(1545~1563)에서는 미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미사는 성부께 드릴 수 있는 진정 한 봉헌 제물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예절”. 이러한 설명과 함께 그리스도가 봉헌한 것과 같은 것을 교회도 봉헌한다는 점을 강조 합니다. 이러한 의미들을 바탕으로 미사의 성격은 교회의 공적 행위로서 그리스도의 지체인 교회에서 신자들과 함께 예절을 거행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 니다. 이러한 미사의 성격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서도 “공동체적 행위로의 전례”임을 강조함으로써 참된 미사의 성격을 재차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극적이면서도 자발적인 참여로 미사에 참여해야 합니다. 타인의 기도가 아닌 우리의 기도이고, 교회의 사적 행위가 아닌 공적 행위이기 때 문입니다. 미사에 참석하는 이들이 마치 음악회를 보러 온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교회의 정신에 어긋납니 다. 미사에 참석하는 이들의 태도는 수동적이지 않고 적극적이어야 하며, 의무감으로 참석하는 미사가 아닌 마음을 다해 함께하려는 마음으로 참여할 때 주님과의 특별한 만남과 마주하게 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윤진우 세례자요한 신부 사목국 차장 -

 

 

 

  * 교구 내 공소

 

신례원성당 계촌리공소

 

 

  1891년 계촌공소(진말, 진마을)는 퀴를리에 신부의 사목담당 지역으로 45명의 신자가 있었다. 이곳의 신앙은 여사울의 이존창에 의해 전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1960년대 담장 공사 때 성물이 발굴되어 절두산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에 보관 중이기도하다. 첫 공소는 한옥초가 형태의 건물이었고, 이후 1965년 현 위치로 목구조 강당을 이전·신축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이종구(토마스) 회장이 부지(207㎡)를 희사하고, 교구청의 보조와 신자들의 봉헌으로 1973년 시멘트벽돌조(연면적 110.1㎡)로 건립되었다. 2005년경부터 본당 구역으로 통합되었고, 현재 35세대 중 10여 명이 신례원성당으로 전례에 참여하고 있다.

 

 

 

<이충무의 숨은 행복 찾기(35)>

 

마음 보정

 

  한 친구가 얼마 전 결혼기념일을 맞이해서 인생을 새롭게 깨달은 사연 하나를 들려줬다.

 
  코로나 상황으로 멀리 여행 가기도 부담스럽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불안해서 그 친구는 아내와 단둘이 오붓한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래서 아내를 위해 식사도 준비하고, 예쁜 카드와 함께 선물도 전달했는데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었다. 사진관에서 결혼기념 사진을 촬영하기로 한 것이다. 


  각종 기념일이면 사진관에 가서 가족끼리 멋지게 차려입고 추억에 남을 만한 사진을 찍는 것이 요즘 대세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용기를 내서 스튜디오에 예약까지 했다.

 
  새로운 경험에 대한 들뜬 마음으로 아내도 평소보다 더 신경을 써서 멋을 냈고, 그 친구도 가장 젊어 보이는 옷을 골라 차려입고 사진관에 도착해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이런저런 포즈를 취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는데, 문제는 액자에 넣을 사진을 최종 선택할 때 생겼다. 사진사분께서 어느 정도의 보정을 원하는지 물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자연스러울 것 같아 ‘약하게’로 하려고 했었는데, 일단 전문가의 보정 작업이 시작되자 부부의 생각은 달라졌다고 한다. ‘아주 강하게’로...


  차츰 젊어지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면서 실제와는 점점 멀어져 가는 최종 사진을 선택한 부부는 서로를 바라보며 한바탕 크게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용을 계산하려는데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사실 더 받아야 하는데 그냥 원래대로 받을게요. 아기들은 보정할 필요가 전혀 없어서 손이 안 가는데, 나이가 있으신 분들은...”


  추가비용도 안 내서 기분이 좋긴 한데, 그 순간 마음 한구석을 꼬집힌 기분이 드는 건 왜였을까? 그러면서 그 친구는 집에 돌아가는 길에 문득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했다. 


   “하느님께서 무척 바쁘시겠다. 얼굴이야 사진사분이 보정해 주겠지만 우리 마음의 보정은 오직 주님께서 만이 가능하신데, 가능하면 아이들의 마음을 닮도록 살아야겠다. 


  아무것도 보정할 것 없는 마음을 주셨는데, 살아가면서 나는 왜 그 마음을 그렇게 꼬이게 했을까? 한 점의 보정도 필요치 않는 사진을 찍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

 

-이충무 바오로 극작가, 건양대교수-

 

 

<1분 교리>

 

Q) 교계제도 안의 사제직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A) 교회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증거하고 복음을 전파하며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봉사하는 사제직에는 보편사제직과 직무 사제직이 있습니다. 보편 사제직은 평신도로서 봉사하는 신자들의 직분을 말합니다. 직무 사제직은 '성직자'로 일컬어지는 사제들을 말하며 교계제도 안에서 다음과 같이 세분됩니다.

 

1) 교황 : 교황은 전 세계 주교단의 으뜸이며 가톨릭교회의 대표자입니다. 현 교황은 초대 교황이었던 베드로 사도의 266대 후계자인 프란치스코 1세 입니다.

 

2) 추기경 : 교황 다음의 고위 성직자인 추기경에게는 교황을 선출할 선거권과 교황 후보가 될 수 있는 피선거권이 주어집니다. 또한 예수님의 열두 제자였던 사도들의 지위를 이어받아 개별적으로 여러 임무를 수행함과 동시에 교황을 보필합니다.

 

3) 주교 : 주교에게는 가톨릭 교회의 지역단위인 교구를 관리하며, 교황과 일치하여 지역교회 사목을 책임지는 임무가 주어집니다. 추기경과는 다르게 교황 선출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부여되지는 않으나, 주교 역시 예수님의 열두 제자 지위를 계승하는 사도들의 후계자입니다.

 

4) 신부 : 교구장 주교를 보필하여 교구 사목의 다양한 부분과 교구 내 사목지인 본당에서 성사를 거행하고 복음을 선포하며 신자들과 함께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활동합니다.

 

5) 사제, 부제 : 성품성사를 받은 모든 이들을 성직자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각기 받은 성품에 따라 사제와 부제로 구분합니다.

 

 - 사제품을 받은 교황, 추기경, 주교, 신부는 직무에만 차이가 있을 뿐 모두가 사제라 불리며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교회에서 부여하는 직무를 직분에 따라 수행합니다.

 

 - 교회 봉사직으로서의 부제서품을 받은 성직자를 부제라 호칭하는데 부제는 미사 집전은 못 하지만 강론, 세례성사, 혼인성사, 병자 영성체 등 사제들이 행하는 대부분을 보좌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부제에는 사제직의 준비 단계인 일반 부제와 혼인 후 교회에 봉사하는 종신 부제가 있습니다.

 

 

zero waste 물품

 

  찬미 예수님

사회복음화분과입니다.

 

  생활 속에서 얼마나 쓰레기들이 나오는지 고민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물론 있으시리라고 봅니다. 일주일 동안만 지나도 집안에 가득 찬 플라스틱이며 비닐이며 기타 스티로폼, 일반 쓰레기는 왜 이리도 많은지, 근데 우리 가정만 그러는 게 아니라 전체 갈마동 가정마다 그러고 있고 대전에만 하루에 나오는 쓰레기가 엄청나겠죠?

 

  쓰레기를 자원화하는 방법도 생겨나기도 하지만 자원화하기 위해 없어지는 에너지도 엄청나게 크니 이건 솔직히 자원화라고 보기에도 어렵습니다. 작은 자원화를 위해 큰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으니까요.

 

  7월 3일 주일에 저희 분과에서 준비한 zero waste 물품들을 한번 보시면 어떨까요. 일상생활 속 물품들로 구성된 zero waste 물품들은 쓰레기를 줄일 가능성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써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기능적인 면도 매우 만족스러운데요. 아주 작은 실천이 큰 울림으로 다가올 수 있는 시간이 됐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글. 사회복음화분과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