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22년 주보

사순 제3주일 2022년 3월 20일(다해)

모든 2 2022. 3. 20. 16:12

 

 

 

+  루카복음 13,1-9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다.>

 

   바로 그때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 알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 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말씀의 향기>

 

하느님 사랑의 현존 안에서 판공 성사를 통하여 회개하여 은총의 결실을 맺자 - 정준섭 요셉 월평동 주임

 

  사순 제3주일 1독서는 사막의 떨기나무에 나타나서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신 하느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나는 있는 나다" , "나는 창조하는 자다"  등등 당신의 존재 현존을 알려 주십니다. 그 하느님은 곧 고난을 겪는 백성들의 아픔을 보시고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는 하느님이시며 그곳에서 벗어나 생명의 땅으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두 가지 사건을 말씀해 주십니다. 첫 번째 사건은 빌라도 총독이 갈릴래아 사람들을 살해한 사건입니다. 빌라도는 로마에 반대하여 전쟁과 힘을 이용하여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을 잔혹하게 본보기로 처형하여 다시는 로마에 반대하는 세력을 키우지 못하게 막으려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실로암 돌탑이 무너지면서 열여덟 사람이 죽어갔습니다. 부실 공사의 책임, 혹은 일을 하는데 개인의 부주의, 혹은 조상 대대로 이어오는 자신의 죄의 보속의 결과 등등 하고 일반적으로 말을 많이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사건을 회개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손길로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현대에도 이런 일들이 비슷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민간인들이 죽고 생필품이 떨어지고 핵방사능 유출 혹은 화학전에 대한 이야기가지 나오고 있습니다. 사람의 잔혹감과 죄에 대해 많이 이야기합니다. 강원지역 산불의 영향으로 국내에서 집과 터전을 상실한 이재민들이 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의 힘 안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지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건들이 개별적 사건이 아니라 바로 회개를 촉구하는 시대적인 징표, 표징으로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복음의 후반부를 보시면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가나무가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로 보면 베어 버리고 다른 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기다려 주시고 거름을 주고 열매를 기다리십니다. 이번 사순절, 우리는 세상의 죄, 잔혹성, 인간의 무력감을 경험하는 세상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잘못하면 세상과 정치 혹은 자연의 일들을 비판하며 누구 탓하고 불평하고 투덜거리며 보낼 수 있습니다. 이때 '나는 나다.' 하시며 부르짖음과 고통을 보시고 들으시는 창조주 하느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세상의 사건들이 바로 나 자신의 회개를 이끄시는 하느님의 손길로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죄를 용서하시고 치유시켜 주시는 예수님께 의지해야 하겠습니다. 아멘.

 

 

 

<이주사목 대전모이세>

 

모국어의 위력 -안성준 도미니코 대전모이세 전담

 

  해외에 나가보면 모국어의 위력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순간에도 어디선가 들려 오는 모국어는 내 귀에 꽂힙니다. 집중을 해도 겨우겨우 알아듣는 외국어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타지에서 모국어를 듣게 되면, 이 낯선 곳 어디가 동포가 있다는 사실에 내심 반갑기도 하고, 혹 무슨 일이 생겨도 도움을 청할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입니다.

 

  이주민을 위해 영어 미사를 봉헌하지만, 모이세를 찾는 모든 이에게 영어가 편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현실적으로 모이세를 찾는 모든 이주민의 모국어 미사를 할 수 없는 형편이기에, 세계 공통언어로서 여어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겠지요.

 

  그럼에도 모이세를 찾는 이주민의 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저는 사목적으로 더 많은 도움과 배려를 해주지 못하는 상황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곤 했습니다. 그리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모국어로 미사를 봉헌하면서 타지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포들을 만나고,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더 유심히 바라본 미사가 동티모르 미사입니다. 이 미사는 한 달에 한 번 동티모르 신부와 함께 동티모르인들이 만나 모국어로 미사를 봉헌합니다. 동포들을 마나 자신들의 말로 미사를 봉헌하고 어울릴 수 있는 기회여서 그런지, 서울, 부산, 광주 등 전국 각지에 흩어져 매주 올 수 없었던 친구들이 이날만큼은 비싼 교통비를 지불해 가며 기꺼이 모이세를 방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사 후에 루이즈신부와 친구들이 다과를 나누며 이야기 꽃을 피웁니다.

 

  한번은 점심도 못 먹고 재료값을 지원해줄 테니 동티모르 음식을 해서 미사 후에 함께 나눠먹자.'고 제안했더니, 친구들이 좋아라 합니다. 그리곤 약속의 그날, 소문이 났는지 동티모르 대사까지 방문하겠다고 합니다.

 

  모국어 성가 소리에 힘이 넘칩니다. 미사는 풍요롭습니다. 풍성한 음식을 나누며 서로 대화하는 그들의 모습에 미소가 가득합니다. 뒷정리로 깔끔합니다. 남은 음식을 나눠 가져가는 모습은 명절날 우리네 모습과 차이가 없습니다. 밝은 모습으로 헤어지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뿌듯해집니다.

 

  지금 대전 모이세에서 모국어 미사와 전 공동체 월례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신부 혼자서 관할 구역인 대전, 세종, 논산, 금산, 공주를 매주 다닐 수 없다는 현실과 민족의 다양성에 따른 사목적 접근의 한계 때문입니다. 첫째 주는 필리핀 따갈로그어 미사, 둘째 주는 동티모르 테툼어 미사, 셋째 주는 베트남어 미사와 스페인어 미사입니다. 모국어 미사를 도와주시는 협력 신부님들께 이 지면을 빌어 감사드리며, 관련 언어로 미사에 참여하고픈 분이 계시다면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가톨릭 신자로서 알아야 하는 <미사>

 

3. 신부님, 도대체 미사가 무엇인가요? (2)

 

  지난주 "미사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4가지의 키워드를 제시하였습니다. 오늘은 "만남"과 "거룩함으로의 시간"이라는 키워드로 미사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셋째, 미사는 만남의 시간이다. 오늘날 사용되는 미사란 단어는 사도시대 때 "빵 나눔 예식" 혹은 "주님의 만찬"이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빵을 나누는 행위는 하나의 공동체이며, 친교의 공동체로서 중요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강조하던 미사는 성찬례였으며, 동시에 공동체의 만남, 공동체의 식사 개념이 강했습니다. 이러한 개념은 미사라는 단어 안에 "하느님과 배성들의 만남", "공동체의 친교"라는 의미로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로마 미사 경본(Missale Romanum)에 "연중 주일 감사송 10"에는 다음과 같은 기도문이 쓰여 있습니다.

  "축제의 이날 당신의 가족들이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의 빵을 나누어 받으며..."

 

  미사가 가진 기본적인 의미는 하느님 백성들이 함께 모여 말씀을 나누고, 빵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는 "만남"이며 "친교"의 시간입니다.

 

  넷째, 미사는 거룩함으로의 시간이다. 미사는 그 자체로 그리스도인들이 성화됩니다. 또한 신자들에게 영적 위로의 만족을 제공합니다. 물론 미사가 제공하는 이러한 은총을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전례가 가진 상징과 표징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미사에 참석하는 이들이 형식적으로만 봉헌할 경우에는 미사가 주는 거룩함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사가 주는 거룩함의 지향을 올바로 알고 미사를 봉헌할 때, 우리는 성화되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미사 중 사제가 초대하는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라는 기도처럼, 거룩한 식사에 초대받아, 거룩해지는 시간이 곧 미사입니다.

 

  다음 편에는 보편교회에서 제시하는 지침과 문헌을 통해서 미사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윤진우 세례자요한 신부 주교좌 대흥동 제1보좌-

 

 

 

<논산대건중학교 교목 신부 이야기 -첫 번째>

 

 

  찬미 예수님!! 논산대건중고등학교 교목 정동수 야고보 신부입니다. 언제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몇 달 전 선생님들과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모르는 번호가 휴대 전화에 떴습니다. 모르는 전화번호도 잘 받아주는 편이라 전화를 받았고, 학교 이야기를 주제로 주보에 글을 연재해달라는 홍보국장 신부님의 부탁이었습니다. 사실 글쓰기를 무척 어려워하는 편이고 바쁜 탓에 부탁을 고사했지만, 끝까지 거절할 수는 없었습니다.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도 거절할 수는 없었습니다.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도 그때 매몰차게 거절했어야 했다고 후회를 합니다. 그래도 학교에서 교목신부로서 어떻게 생활했었는지, 또 나에게 교목신부로서의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되새겨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여기며 우리는 논산대건중고등학교 이야기를 써 내려가 볼 작정입니다.

 

   2017년 11월에 학교에 부임했고, 교목신부로, 선생님으로 살아온 지 올해로 벌써 5번째입니다. 3년 동안은 고등학교에, 작년부터 지금까지는 중학교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고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봉헌했던 미사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해드릴까 합니다. 중학교는 아니지만, 고등학교는 학생 전체가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선배들이 1 학년 학생들을 환영한다는 뜻으로 봉헌하는 신입생 환영 미사, 담임 선생님과 학생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학급별 발 씻김 예식과 연결되어 있는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 개교기념일 미사, 학교 축제의  장을 여는 주보 축일 미사, 이렇게 1년에  네 번 정도 함께 미사를 봉헌합니다.

 

  학생들과 미사를 함께 봉헌하며 전율을 느낄 정도로 아주 감동한 적이 있었는데,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마도 이 미사에 참여했던 학부모님들도 같은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매년 여러 차례 함께 미사를 봉헌해서 그런지 학생들은 성가나 미사곡을 어느 정도 알고 있고 신자, 비신자 가릴 것 없이 함께 노래합니다. 특히 주님의 기도는 다 함께 손을 잡고 노래하는데, 주님의 기도 후반부 "오늘 저희에게~" 부분에서는 서로 잡고 있는 손을 높이 들어 올립니다. 상상해 보세요. 600여 명 정도의 학생이 함께 손을 잡고 "떼칭"으로 하는 주님의 기도 노래가 얼마나 웅장할지 말입니다. 머뭇거리던 학생들도 이때만큼은 큰 소리로 노래합니다. 어쩌면 한마음이 된다는 뜻이 이런 모습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이렇게 우리 논산대건중고등학교 학생들은 미사를 통해 학교 바깥에서는 체험하지 못했을 소중한 경험들을 누릴 수 있습니다. 저는 매일 미사를 봉헌하며 기도합니다. 우리 학생들이 논산대건중고등학교에서 지식을 채울 뿐만 아니라 가톨릭의 영성이 담겨진 여러 프로그램들 안에서 사랑, 용서, 일치, 나눔, 배려 등의 소중한 가치들을 배우고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기를 말입니다.

 

-정동수 야고보 논산대건중고등학교 교목 신부-

 

 

 

 

 

<1분 교리>

 

Q) '십자가의 길'이란 무엇인가요?

  지정된 14처 마다 주님의 십자가 처형을 묵상하며 자신 역시 주님이 짊어지신 십자가의 무게를 체험하며 드리는 기도입니다. 당대의 십자가 처형은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잔악무도함의 극치였으며 치욕과 패배의 멍에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스스로 고난의 십자가 길을 걸어가셨으므로 십자가 역시 영광의 표지이며 구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묵상하며 그 사랑을 본받아 살아가고자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기도 올리는 것입니다.

 

 

피난 가시는 성체의 모습

 

 

어제, 그러니까 여기 시간 3월 15일 피난 가시는 성체의 모습입니다.

 

우크라이나의 키이우 주교좌성당 감식에 모셔져 있던 성체가 작은 자동차를 이용해 피난을 떠나시는 모습입니다. 2차 대전 이후 처음 있는 일로 작은 자동차에 몸을 실은 성체가 피난을 떠나는 길거리에 포탄과 총성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길거리로 달려나온 시민들이 무릎을 꿇어 눈물로 경배하며 언제 오실지 모르는 성체를 배웅하며 뒤를 따르고 있어요.

폭격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맨바닥에서 성체를 배웅하는 이들!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여도 가슴 뭉클합니다.

 

저들의 신앙이...

우리의 기도가

합쳐서 이 황당하고 잔인한

한 개인의 야욕을 담은 전쟁이 끝나기를 진심...

진심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