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카 복음 4,1-13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유혹을 받으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 그 기간이 끝났을 때에 시장하셨다. 그런데 악마가 그분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한순간에 세계의 모든 나라를 보여 주며, 그분께 말하였다. "내가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내가 받은 것이니 내가 원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오.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너를 보호하라고 명령하시리라.''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예수님께서는 그에게,"'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하고 대답하셨다.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
<말씀의 향기>
하느님은 하느님이시다! - 이원효 베네딕토 계룡 주임
재의 수요일부터 시간되는 사순 시기를 보내고 있다. 재의 수요일의 미사 전례에서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명심하십시오!"라는 인간의 운명에 관한 통찰로 구원을 향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되새기게 하는 회개와 은총의 시기이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엇이 가장 중효한 핵심적인 것인지를 예수님의 유혹을 통해서 알 수 있게 한다.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3가지 유혹은 빵에 관한 유혹과 세상 권력과 잘못된 성경 해석으로 인한 그릇된 믿음에 대한 것이었다.
이 모든 유혹의 핵심은 일차적으로 하느님을 하느님이심을 제쳐놓은 데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선적으로 다급해 보이는 것들이 있다. 이러한 것들을 위해 하느님을 이용하고 인간 중심적인 현실만이 중요하다는 생각과 자세야말로 커다란 유혹이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굶주림에서 빵이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크다. 그러나 우리는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며 산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배고픔을 모르는 척하지 않으셨고, 육신의 필요에 무관심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이런 가운데 올바른 질서와 선을 세워주시고 자리잡게 하셨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이들이 주님의 선하심을 본받게 되어 굶주린 이들을 위해 빵을 만들고 싶은 생각과 능력이 성장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이 선하지 않으면 다른 아무것도 선할 수 없다. 마음의 선함은 궁극적으로 선 그 자체이신 하느님에게만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사탄은 주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간다. 그는 예수님께 지상의 모든 나라와 영화를 보여주시면서 그분께 나를 경배하고 세상을 지배하라는 유혹을 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기준과 다스림에 순응하는 권력만이 좋은 것이며 그러한 권력이어야 함을 가르치신다. 사탄이 눈앞에 보여주는 지상의 왕국이나 그 광희는 겉치레일 뿐이고 무너지고 다 망해버렸다. 이 세상 그 어떤 나라도 하느님 나라가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인류가 절대적으로 구원을 받은 상태를 뜻하기 때문이다.
사탄과 같은 잘못된 성경해석은 참 하느님의 모습을 파괴하고 신앙을 해체하게 한다. 올바른 성경해석은 결국 하느님은 누구이시냐는 질문에 모아진다. 이 대답은 예수님 안에서 찾게 된다. 우리가 하느님을 하느님으로서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을 하느님보다 윗자리에 올려놓고 있는 오만한 자세로서는 전혀 하느님을 인식할 수 없고 하느님의 말씀을 이용한다.
예수님을 하느님을 모셔왔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을 알아보며 그분을 불러 모실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서 걸어야 할 길을 알게 되었다.
기후 위기를 대처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많은 교우들은 유한한 자원의 순환촉진을 위한 활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자원 순환은 3R로 표현하는데, 쓰레기 줄이기(Reduce), 자원 재사용(Reuse), 재활용(Recycle)입니다. 최근에는 여기에 더욱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새로운 3R이 등장하였습니다. 불필요한 물건 사지 않기(Refuse), 포장물 제거(Remove), 플라스틱 사용 규제(Regulate)입니다.
자본주의는 자원의 채취, 생산, 유통, 소비, 폐기의 단계를 거치는 선형적인 구조로 유한한 자원을 무한히 소비하고 폐기하여 탄소배출, 플라스틱 폐기물, 자원고갈이라는 결과들을 낳았고 이러한 결과물들은 지구 온난화와 그로 인한 기상재앙으로 나타납니다. 자원 순환에 참여하는 것은 경제적 인간에서 생태적 인간으로 변화하기 위한 첫 출발점입니다. 채취에서 폐기에 이르는 각 단계마다 폐기물을 줄이는 것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일직선인 선형구조 자체를, 원형인 순환구조로 경제를 바꾸는 것이 근본적인 길입니다.
소비자와 생산자로서 가정과 본당에서 자원 순환을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해야 하지만, 정책적으로도 경제를 순환구조로 바꾸기 위한 일들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예를 들어 RE100(Renewable Energy 100%) 제도는 기업에서 필요한 전력의 100%를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로만 충당하는 기업을 말합니다. 이미 2018년에 글로벌 30대 기업들은 100% 목표를 달성하여 제품생산에 필요한 에너지의 100%를 재생에너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수출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 기업들도 RE100에 동참할 수밖에 없지만, 외부의 힘이 아닌 우리기업 스스로의 노력과 정책적 뒷받침, 지역적인 협력이 필요합니다. 앞으로 화력, 원자력이 아닌 재생에너지로 생산된 RE100 제품들을 쉽게 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강원도에는 삼척과 강릉에 석탄화력발전소 4기를 건설 중에 있으며 완공이 될 때에는 여기에서 나오는 온실가스 배출량은 약 27.1백만톤에 이를 것으로 추정됩니다. 정부의 온실가스 감축계획에 의하면 2018년 대비 2030년에 농축수산 분야에서 줄이려는 온실가스 배출량의 18.0백만톤으로, 감축하려는 온갖 노력이 무색하게 건설 중인 화력발전소 4기에서 나오는 온실가스 배출량이 1.5배나 많습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화력발전소 건설로 인한 맹방해수욕장 등 천혜의 자연환경, 바닷속 황폐화, 관광자원의 파괴는 차치하더라도 말입니다.
본질적으로 순환경제는 경제성장 논리와 맞지 않습니다. 매년 국내총생산(GDP) 3%의 성장률을 기대하는 일은 당연하고 정상적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렇게 3%씩 증가하면 24년 후에는 지금보다 2배(203%)의 경제 성장을 하게 됩니다. 2050년에 이르러 탄소배출 제로와 두 배의 경제확장이 양립할 수 있을까요? 경제확장을 계속하면서 기후 위기에 대한 심각성을 대응 할 수 있을까요? 지속가능한 경제는 성장하는 경제가 아니라 자연의 순환을 실천하는 생태적 삶의 경제로 전환할 때 가능합니다.
"환경 위기에 대한 예방에 중점을 둔다면 무한한 성장, 경쟁, 소비주의, 규제없는 시장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생채적 균형의 회복을 추구해야 한다."(「찬미받으소서」 210항 참조)는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조세종 디오니시오 대전교구 생태환경위원회-
가톨릭 신자로서 알아야 하는 <미사>
1. 우리들이 봉헌하는 미사가 되기 위해서(여정 소개)
"성찬례는 그리스도께서 오시어 우리를 은총으로 가득 채워 주시는 기회이므로, 성찬례가 근본적인 성사업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성찬례, 곧 미사는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런 미사 안에서 형식적인 부분들에만 몰두한 나머지 참된 의미를 되새기지 못한다면, 거룩한 잔치의 시간은 무의미한 시간이 될 뿐입니다. 이러한 어려움은 우리가 미사 시간 안에서 쉽게 분심에 빠지거나, 미사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지게 되고, 나아가 우리를 이 미사 안에 지켜야 할 형식적인 요소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외적으로 드러나는 요소들이 전부는 아닙니다. 성찬례에 참여한 이들이 미사의 의미와 이에 합당한 능동적인 자세를 갖추려는 내적 준비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서 응답하는 이 거룩한 행위와 믿음에 눈을 떠야 한다고 거듭 촉구하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목현장에서 신자분들과 만나면서 주로 미사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곤 합니다. 실제로 지난 우리교구 시노드를 통해서 "전례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건의가 많이 나왔다는 점은 그만큼 많은 신자분께서 전례에 대한 관심도가 높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물론 "전례"가 참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보편 교회가 제시하는 정확한 전례의 모습이 있습니다만, 때로는 보편교회에서 제시하는 않는 문제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역과 문화, 각 교구만이 가진 전례의 문제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명확한 근거를 토대로 답을 제시한다는 것이 분명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전례적인 문제에 대한 명확한 답을 찾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러한 질문들을 토대로 "우리는 미사에 어떠한 마음으로 참여 할 것이냐?"라는 답을 고민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번 주부터 시작하는 "가톨릭 신자로서 알아야 하는 <미사>"는 우리에게 미사가 무엇인지, 그리고 미사를 어떠한 마음으로 봉헌해야 하고, 미사가 지니고 있는 각 부분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함께 고민하고 그 답을 찾아 나눌 것입니다.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는 최후의 만찬 이후 교회의 가장 중요한 보화이며, 가톨릭 신자들의 삶의 원천이요 정점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거룩함에로 나아가기 위해서 미사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고, 습관적으로 봉헌하는 미사가 아닌 그 의미와 지향에 따라 우리가 능동적으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되는 여정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다음 편에는 가톨릭교회가 제시하는 "미사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다루겠습니다.
-윤진우 세례자요한 신부 주교좌 대흥동 제1보좌-
<이충무의 숨은 행복 찾기(27)>
벽 혹은 격
"몇 년생이세요?"
이 질문은 우리에게 별로 생소한 질문이 아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끼리도 어렵지 않게 이런 질문을 서주 주고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외국인들의 눈에는 다소 불편하게 비춰질 수도 있는 이 나이에 관한 질문이 우리에겐 왜 그리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는 걸까?
나이를 묻거나 답하는 사람 사이에 특별한 어색함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나이에 대한 정보가 상호 간의 의사소통에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인 것 같다.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 편한 대화가 오고 가려면 나이부터 알아야 한다. 나이에 따른 서열이 정해져야 혹여 상대방에게 무례함을 범하지 않고 원활한 관계를 이어갈 수 있게 된다.
예의를 중시하는 우리 문화 속에서 나이에 대한 질문은 개인 정보를 침해하는 무례한 질문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스럽게 인간관계를 빠르게 안착시키는 요인으로 작용되어 왔다.
요즘도 몇 년생인지 묻는 질문은 가끔 듣게 된다. 예전엔 그런 질문을 받으면 주저 없이 몇 년생이며 심지어 띠는 무슨 띵인지까지도 상대방에게 친절하게 알려 줬었다.
하지만 이젠 자꾸 머뭇거리게 된다. 나이가 많이 들었다는 생각에 혹시 내 나이가 상대방에게 '격'이 아니라 '벽'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서기 때문이다.
나이가 벽이 되면 외로워진다. 두터운 벽을 향해 걸어오는 사람들은 드물다. 반대로 나이가 격이 되면 행복해진다. 하나라도 지혜를 얻기 위해 사람들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오만함이 높아질수록 나이는 벽이 되고, 겸손함이 묻어날수록 나이는 격을 갖춘다. 나는 과연 내 나이의 숫자만큼 품격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갖추고 있는 걸까?
"몇 년생이세요?"라는 질문에 벽이 아닌 '격'으로 답 할 수 있는 그날을 위해 주님께서 주신 오늘 하루를 보다 더 겸손되이 살아내야 할 것 같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2022년 사순 시기 담화
“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일을 합시다. 포기하지 않으면 제때에 수확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합시다”(갈라 6,9-10)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사순 시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신비로 우리를 이끌기에 개인의 쇄신과 공동체의 쇄신을 위한 적절한 때입니다. 우리는 2022년 사순 여정을 위하여 바오로 성인이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한 권고를 곰곰이 묵상해 볼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일을 합시다. 포기하지 않으면 제때에 수확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회(kairós)가 있는 동안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합시다”(갈라 6,9-10).
1. 씨 뿌리기와 수확
바오로 사도는 이 말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신 씨 뿌리고 수확하는 모습을 (마태 13장 참조) 상기시켜 줍니다. 바오로 성인은 기회(kairós), 곧 미래 수확을 기대하며 선의 씨앗을 뿌리기에 적절한 때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이 ‘적절한 때’란 무엇입니까? 사순 시기는 분명 그 적절한 때입니다. 그러나 우리 존재 전체 또한 그 적절한 때이고, 사순 시기는 어느 모로 우리 존재 전체에 대한 하나의 표상입니다. 1) 탐욕과 자만심, 소유하고 축적하며 소비하고자 하는 욕구, 이 모든 마음이 너무 자주 우리 삶에서 우위를 차지합니다. 이는 복음서의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어리석은 부자는 곳간에 모아 둔 곡식과 재물로 자신의 삶이 안전하고 보장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루카 12,16-21 참조). 사순 시기는 우리가 회개하도록, 사고방식을 바꾸도록 초대합니다. 그리하여 삶의 진리와 아름다움을 소유가 아니라 내어 줌에서, 축적이 아니라 선의 씨앗을 뿌리고 함께 나누는 일에서 발견하도록 합니다.
처음으로 씨를 뿌리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크나큰 관대함으로 “계속해서 인류에게 좋은 씨를 뿌려 주십니다”(「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 54항). 사순 시기 동안 우리는 “살아 있고 힘이 있는”(히브 4,12)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분의 선물에 응답하라고 요청받습니다. 꾸준히 하느님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그분의 활동에 마음을 열게 되고 순종하게 되며(야고 1,21 참조), 우리 삶에서 결실을 맺게 됩니다. 꾸준히 하느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큰 기쁨을 얻고 더 나아가 하느님의 협력자가 되라는 부름을 받습니다(1 코린 3,9 참조). 현재의 시간을 잘 활용한다면(에페 5,16 참조) 우리도 선의 씨앗을 뿌릴 수 있습니다. 선의 씨앗을 뿌리라는 이러한 요청을 부담이 아닌 은총으로 여겨야 합니다. 창조주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큰 선하심에 적극적으로 일치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수확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수확하려고 씨를 뿌리는 것이 아닙니까? 당연히 그렇습니다! 바오로 성인은 씨 뿌리기와 수확의 밀접한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며 강조합니다.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2 코린 9,6). 그런데 우리는 어떤 종류의 수확을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뿌린 선의 첫 열매는 우리 자신 안에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심지어 친절을 베푸는 우리의 소소한 행동에서 나타납니다. 하느님 안에서는 그 어떠한 사랑의 행동도, 그 어떠한 사소한 행동도, 그 어떠한 “아낌없는 노력”도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279항 참조). 우리가 그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아보는 것처럼(마태 7,16.20 참조) 선한 행실로 가득 찬 삶은 빛을 비추고(마태 5,14-16 참조)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합니다(2 코린 2,15 참조).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을 섬기면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한 성화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로마 6,22 참조).
복음서가 전하는 격언에 따르면 “씨 뿌리는 이가 다르고 수확하는 이가 다르기”(요한 4,37)에 우리는 실제로 우리가 뿌려 거두는 열매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볼 뿐입니다. 우리가 다른 이의 선익을 위하여 씨를 뿌리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애로운 사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뿌린 선의 씨앗이 지닌 숨겨진 힘에 대한 희망으로, 다른 이들이 수확할 열매들을 위한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숭고한 일입니다”(「모든 형제들」, 196항). 다른 이의 선익을 위하여 선의 씨앗을 뿌리는 것은 우리가 편협한 사리사욕에서 벗어나 대가를 바라지 않고 행동하게 하며 하느님의 자애로운 계획의 넓디넓은 지평의 한 부분이 되도록 합니다.
하느님 말씀은 우리의 시야를 넓혀 주고 드높여 줍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 말씀은 우리에게 참된 수확은 종말론적인 것이고, 마지막 날, 죽음이 없는 날의 수확이라고 말해 줍니다. 우리 삶과 행동의 무르익은 열매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알곡”(요한 4,36)이고, ‘하늘의 보물’(루카 12,33; 18,22 참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맺으려고 땅에서 죽는 씨앗의 표상을 친히 당신 죽음과 부활의 상징으로 사용하십니다(요한 12,24 참조). 그리고 바오로 성인은 우리 몸의 되살아남에 대하여 말하며 같은 표상을 사용합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1 코린 15,42-44). 부활의 희망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가져다주시는 위대한 빛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1 코린 15,19-20). “그분처럼 죽어”(로마 6,5) 사랑으로 그분과 깊이 결합되는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위한 그분의 부활과도 결합될 것입니다(요한 5,29 참조).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입니다”(마태 13,43).
2. “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일을 합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시대에 구원의 씨앗을 심으면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위대한 희망”으로 지상의 희망에 생기를 줍니다(「희망으로 구원된 우리」[Spe Salvi], 3항, 7항 참조). 산산이 부서진 꿈들에 대한 씁쓸한 낙담, 눈앞에 놓인 도전들에 대한 깊은 걱정, 턱없이 부족한 자원에 대한 좌절은 우리가 이기주의에 갇히고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에 숨어버리려는 유혹을 받게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지닌 제아무리 좋은 자원도 한계는 있습니다.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입니다”(이사 40,3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십니다. ……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갑니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릅니다”(이사 40,29.31). 사순 시기에 우리의 믿음과 희망은 주님을 향하도록 부름 받습니다(1 베드 1,21 참조).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바라볼 때라야만(히브 12,2 참조)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바오로 사도의 호소에 응답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일을 합시다”(갈라 6,9).
낙심하지 말고 계속 기도합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필요하기에 기도해야 합니다. 필요한 것이라고는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생각은 위험한 망상입니다.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이 우리 개개인과 사회의 연약함을 더욱 인식시켜 주었다면, 이번 사순 시기에 우리가 하느님 믿음에서 오는 위안을 체감하기 바랍니다. 하느님 없이 우리는 굳건히 서 있지 못합니다(이사 7,9 참조). 역사의 풍랑 가운데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 배를 타고 있기에 그 누구도 혼자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2) 또한 분명 하느님 없이는 그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만이 죽음의 어두운 물살을 이겨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삶의 무게와 질곡을 피하게 해 주지는 않지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일치하여 낙담시키지 않는 위대한 희망을 안고 그 무게와 질곡에 맞설 수 있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약속은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부어주셨던 그 사랑입니다(로마 5,1-5 참조).
낙심하지 말고 계속 우리 삶의 악을 뿌리 뽑읍시다. 사순 시기에 우리에게 요청되는 육신의 단식이 죄와의 싸움에서 우리의 영을 강인하게 해 주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지치는 법 없이 용서하시는 분임을 알고 낙심하지 말고 계속 참회와 화해의 성사 안에서 용서를 청합시다. 3) 낙심하지 말고 계속 탐욕에 맞서 싸웁시다. 탐욕이라는 나약함은 이기주의와 온갖 악을 부추기며 인간을 죄에 홀리게 할 다양한 방식을 역사 안에서 줄곧 찾습니다(「모든 형제들」, 166항 참조). 그러한 방식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인간관계를 메마르게 만드는 디지털 매체 중독입니다. 사순 시기는 이러한 유혹을 이겨내고 오히려 더욱 온전한 형태의 인간 커뮤니케이션을 기르기에 적절한 때입니다(「모든 형제들」, 43항 참조). 이러한 인간 커뮤니케이션은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참된 만남”(「모든 형제들」, 50항)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 이웃을 향한 적극적인 애덕으로 낙심하지 말고 계속 선행을 합시다. 우리가 이번 사순 시기 동안에 기쁘게 줌으로써 자선을 실천할 수 있기를 빕니다(2 코린 9,7 참조).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마련해 주시는”(2 코린 9,10)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먹을 양식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선행을 베풀 수 있는 넉넉한 마음도 주십니다. 참으로 우리의 온 삶이 선의 씨앗을 뿌리기 위한 것이지만, 이번 사순 시기가 곁에 있는 이들을 돌보며 상처 입고 삶의 길가에 쓰러져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특별한 기회가 되게 합시다(루카 10,25-37 참조). 사순 시기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찾아 나서고, 경청하는 귀와 따스한 말 한마디가 필요한 이들을 못 본 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외로운 이들을 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만나러 갈 적절한 때입니다. 모든 이에게 선을 행하라는 부르심을 실천합시다. 또한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이들, 버려지고 거부당한 이들, 차별받고 소외당하는 이들을 사랑하기 위한 시간을 보냅시다(「모든 형제들」, 193항 참조).
3. “포기하지 않으면 제때에 수확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매년 사순 시기 동안 우리는 “사랑, 정의, 연대와 함께 선은 한 번에 영원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쟁취하는 것”(「모든 형제들」, 11항)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게 됩니다. 참고 견디는 농부의 마음을 달라고(야고 5,7 참조), 선행을 베푸는 데에 인내하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꾸준히 청합시다. 우리가 넘어진다면, 언제나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손을 내밉시다. 우리가 길을 잃거나 악의 유혹으로 잘못된 길에 들어선다면, “너그러이 용서하시는”(이사 55,7) 하느님께 돌아가기를 주저하지 맙시다. 이 회개의 때에 하느님 은총과 교회의 친교에 힘입어 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일을 합시다. 단식은 토양을 마련하고 기도는 물을 대며 자선은 비옥하게 만듭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제때에 수확을 거두게 될 것”이며 인내의 선물과 함께 우리 자신의 구원과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하여(1 티모 4,16 참조) 약속된 것을 얻으리라는(히브 10,36 참조) 사실을 굳게 믿읍시다. 모든 이를 향한 형제애를 키우면서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2 코린 5,14-15 참조)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되고, 하늘 나라의 기쁨을 먼저 맛보게 됩니다. 그때가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1 코린 15,28)이 되실 때입니다.
구세주를 태중에 품으시고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 곰곰이 되새기신”(루카 2,19) 동정 성모 마리아께서 우리에게 인내의 은총을 얻어주시기를 청합시다. 성모님께서 어머니의 마음으로 우리와 동행하시어 우리가 이 회개의 때에 영원한 구원의 열매를 얻을 수 있기를 빕니다.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2021년 11월 11일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프란치스코
<1분 교리>
Q) 정한 날에 단식과 금육을 해야 한다.
① 단식은 극기와 희생의 의미와 죄 보속의 정신을 키우기 위해 사순절 재의 수요일과 예수님 수난 성 금요일에 행하게 되는데, 이날에 하루 한 끼를 먹지 않는 단식재를 지킵니다.
이 규정은 만 18세부터 60세까지 지키는데 병자, 임신부, 중노동자, 하루에 4시간 이상 강의하는 교사들은 면제 대상입니다.(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 제136조 참조)
② 금육은 매주 금요일, 만 14세부터 죽을 때까지 지킵니다. 이는 금육과 함께 좋아하는 기호품이나 음식을 금하면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합니다. 중요한 행사가 있을 경우 본당 신부의 관면을 받으면 면제됩니다.
금육과 단식의 의미는 그리스도를 본답아 자신을 억제하고 이를 통해 얻게 된 재화를 가난한 이웃과 나누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희생의 의미입니다.
포장지
코로나19로 배달 음식과 택배가 넘쳐나면서 교우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포장지 문제가 심각합니다. 우리 주위에 넘쳐나는 플라스틱과 비닐이 바람만 불면 곳곳에서 나오는데요. 이 문제를 다루는 기사가 있어서 여러분께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안 먹고 안 쓸 수는 없지만 줄이기 위한 노력과 쓰레기를 정확히 분리해 배출하는 성의는 꼭 갖추어야겠죠!
소비자와 식품업계 모두 지속 가능한 포장재를 사용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지만, 소비자는 배달 음식 때문에, 업계는 비용 때문에 이를 실천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13일 한국 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지난해 '그린피스와 플라스틱 대한민국'의 조사 결과 우리나라 국민이 1인당 소비하는 일회용품(비닐봉지. 페트병, 플라스틱 겁)은 연간 11.5kg에 달했다.
정부는 2018년 일회용품과 플라스틱 발생량을 감축하기 위한 '재활용 폐기물 관리 종합대책'을 마련한 데 이어 내년 1월부터는 포장된 물건을 이중 포장하지 못하도록 하는 '재포장 금지법'을 시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가 길어지면서 식품 배송과 외식 배달이 크게 늘고 외식 부문의 일회용품 사용제한이 일시적으로 완화되면서 포장재 사용은 다시 느는 추세다.
AT가 지난 8월 12~21일 소비자 303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온라인 인식조사에서 응답자의 98.3%는 지속 가능한 식품 포장에 관심이 있다고 답했다. 지속가능한 식품 포장에 관심을 갖는 이유로는 69.0%가 '환경보호'를 꼽았고, 그 다음은 '건강'(16.8%), '자원 절약'(10.2%), '윤리소비'(3.0%) 등의 순이었다.
가공식품의 경우 포장재의 지속 가능성 때문에 제품을 구매한 경험이 있다는 응답이 66.3%로 나타나 실제 구매에도 포장재가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줬다. 하지만 배달 음식의 경우 포장재 때문에 이용하지 않았다는 응답은 35%로, 가공식품의 절반에 그쳤다. 나머지 65.0%는 포장재가 환경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배달을 이용한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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