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가 양을 두고 갈 수 없지요, 신자들이 안가면 나도 못 가지요」 오세정 신부(2013)
6.25 한국 전쟁 당시 피난을 권하던 신자분에게 오필도 (Bulteau) 요셉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
+ 루카 복음 15,1-32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그때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흔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흔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분에 더 기뻐할 것이다.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그러다가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이 있었다.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 큰 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말씀의 향기>
관심사 "본질을 향하여"- 송우진 베드로 입장 주임
얼마 저 강론 때 교우분들에게 살면서 가장 많은 관심을 쏟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을 했다. 물론 대답을 듣고자 질문을 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최고의 관심사를 하느님으로 확고히 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질문한 것이고, 오늘 역시 그러한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사실 신앙인으로 살면서 하느님을 최고의 관심사로 두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실제적인 모습이다. 우리는 삶에 있어서 본질인 하느님을 잊고, 자꾸만 비본질적인 것에 더 많은 관심과 더 많은 애정을 기울이며 살아가고 있다. 알맹이는 잊고, 껍데기에만 몰두한다. 그러다 보니 빛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반대로 대부분의 시간을 어둠에 머무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본질을 향한 여정'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이 여정에 충실한 것을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본질을 향한 여정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최고의 관심사가 하느님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절대 그 여정에 충실할 수 없다. 당연한 이치다. 관심사가 하느님이 아닌데 어찌 하느님께 충실할 수 있겠는가?
오늘 우리는 자비의 복음을 들었다. 가장 아름다운 복음이라고 일컫는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최대 관심사를 확인할 수 있다. 하느님의 관심사는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다. 우리들을 찾아 나서시고 또한 용서해주시며 품어주시는 것,
이것이 하느님의 최대 관심사다.
하지만 하느님을 닮아야 할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을 최고의 관심사로 두기보다는 하느님을 삶의 부록쯤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관심사를 하느님께로 돌리자,이것이 아버지께 돌아가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회개다.
청소년 바로보기(42)
교회, 아이들에게 희망이 되어주고 있는가?③
아이들이 캠프나 체육대회 등 재미있는 것에만 반응하고, 주일학교나 미사에는 소홀하다면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고 이야기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물론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주일학교 교육 전반에 대한 냉철한 분석이 필요한 상황이 아닐까요? 성당에서 주일학교 선생님이나 신부님, 수녀님 하고 노는 게 재미있을까요? 친구들과 노는 게 재미있을까요? 성당에서는 아이들에게 '재미'를 주려 노력하지만 사실 아이들은 친구들과 노는 게 더 재미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덜 재미있는' 성당을 선택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주일학교에서는 아이들과 함께하기 위해 참 많은 '행사'와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하지만 어떤 프로그램을 운영하느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실 프로그램은 아이들의 마음을 만나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아이들의 마음을 울리는 것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프로그램 안에 담겨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위로, 그리고 그들에게 건네는 희망입니다.
그런데 본당에서 주일학교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계신 분들을 보면 어떤 체제,어떤 프로그램을 운영할 것인가에 관해서 많은 논의를 하시고, 또 실제로 좋은 프로그램을 도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프로그램을 실시했던 곳에서 거두었던 만큼의 성과를 거두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프로그램은 가져왔지만 그 안에 담긴 생생한 삶을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프로그램을 달라는 부탁은 들어봤지만, 어느 정도의 예산이 들었는지, 아이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해주기 위해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었는지, 아이들의 깊은 마음을 만나기 위해 어떤 고민을 했는지를 묻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단편적인 예이기는 하지만 주일학교에 관해 고민을 하는 우리의 초점 자체가 '행사', '프로그램'에 집중되어 있을 뿐, 본질적인 교육 목표자 아이들의 존재 자체에 가 있지 못함을 드러내는 예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사목자와 봉사자들은 아이들에게 실망을 하고,아이들은 주일학교에 마음을 다해 참여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이들의 삶을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은 간과한 채 '요즘 아이들은 열정도 없고 좋은 걸 주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아이들을 탓할 때가 참 많습니다. 청소년들의 삶에 새로운 희망을 전해주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그들의 목마름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술자리를 함께하는 친구는 많은데 어쩌면 우리 아이들도 '성당에 와도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어 외롭다'는 푸념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미사 속 숨은 보화
감사기도의 대화-우리 주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사제는 최후만찬 때의 주님과 같이 본격적인 감사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그래서 교우들에게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자고 권고합니다. "지금부터 바치는 기도는 감사기도이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칩시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권고에 교우들은 전적으로 동의하며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라고 응답합니다. 이러한 동의는 일종의 성대한 "아멘"입니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어떤 집회에서 주요한 사항을 결정할 때에 군중은 이런 말로 전적인 동의를 표시하던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우들의 이 응답은 사제의 권고에 온전히 동의하고 박수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35) - 김두한 신부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제3편-제2부-제1장-제3절 : 셋째 계명
셋째 계명은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입니다. 이 계명은 자칫 '주일미사'에 거룩하게 참석하라는 말씀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셋째 계명은 주일미사뿐 아니라 '주일 하루'를 거룩하게 지낼 것을 명합니다. 그래서 주일은 어떤 날인지 잘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셋째 계명은 안식일의 거룩함을 깨닫게 해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신 다음 이렛날에는 쉬시면서 이날을 안식일로 정하여 거룩히 지내도록 명하셨습니다.(탈출 20,11 참조) 또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시고 그 백성과 계약을 맺으시며, 그 계약을 영원히 간직하도록 안식일을 주셨습니다.(탈출 31,16 참조) 안식일은 하느님의 창조 업적과 당신 백성을 위한 구원 업적을 찬미하고 기리는 거룩한 날, 곧 하느님의 날입니다. 이날은 하느님께서 스스로 이렛날 쉬면서 숨을 돌리셨듯이, 사람들(특히 가난한 사람들)이 일상의 일을 멈추고 쉬도록 마련되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어겨 비난받으셨다고 기록하지만,사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대해 올바로 자비를 베푸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돕고 나누는 날입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생긴 것이기에(마르 2,27 참조) 악한 일이 아니라 착한 일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마태 12,5 참조)
그리스도인들은 토요일에 지내던 안식일을 일요일에 지내는 '주일'로 대치(代置)하였습니다. 안식일 다음날인 "주간 첫날"(마르 16,2)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날,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고, 안식일의 영적 참의미는 완성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날은 모든 날, 곧 주일(主日)이 되었습니다.
사도 시대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성찬(미사)을 거행하며 주일을 경축하였습니다. 주일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경축하는 날이기에,교회는 가장 중요한 '의무 축일'로 지킵니다. 그래서 주일미사는 교회생활의 중심이 되고, 우리는 주일마다 미사에 성실히 참여합니다.
주일은 휴식의 날입니다. 우리의 삶이 노동과 휴식으로 이어지고 있듯이,주일에는 충분한 휴식과 여가를 즐겨야 합니다. 그러나 주일미사, 자선의 실천, 적당한 휴식에 방해되는 일이나 활동은 삼가야 합니다. 주일은 전통적으로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데 바쳐져 왔습니다. 더불어 주일은 가족과 친지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갖고 보살피는 때입니다. 비록 주일에 일을 해야 함 하기에 충분한 여가 시간이 없다면, 기도와 정성으로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저는 길 잃은 한 마리
양입니다.
부디
저를 거두어 주서소.
글. 그림 이순구 (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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