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날칼보다 강한 말씀」 황영준 신부(2012, 로마)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1 티모 6,12)
+ 루카 복음 16,19-31
<너희가 믿음이 있으면!>
그때에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말씀의 향기>
정말 이 사람이 안 보이세요? "가장 보잘 것 없는 이에게 해 줄 것이 나에게 해 준 것이다" -황영준 시몬 시장사목전담
지난 8월 말에 이런 뉴스를 보았습니다. 어는 도시의 새벽 시간, 시각 장애인이 뺑소니 사고를 당했지만 이를 목격한 행인들이 아무도 신고를 하지 않아 30여 분간 방치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끄러운 모습이 인근 CCTV에 그대로 담겼습니다. 사고현장 바로 옆에서 목격을 했으면서도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사람, 쓰러져 신음하는 피해자의 옆을 무심히 걸어가는 사람...
부자는 라자로가 안중(眼中)에 없었다.
사람은 눈을 통해 보이는 모든 정보를 받아들이지만 머릿속에서 좋은 것과 싫은 것을 분류해 좋은 것만 부각시킬 수 있습니다. 부자의 눈에 라자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시야에 들어오긴 하지만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라자로가 굶고 있는지 병이 들었는지 죽어 가는지 그 상태가 보일 리는 만무했습니다. 지금 그의 앞에 좋은 것들이 많은데 왜 더러운 것을 보겠습니까. 부자의 관심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있었기에 라자로는 안중에 없었습니다.
내 주위의 수많은 투명인간.
사실 우리도 못 본 척, 모르는 척하며 없는 사람 취급하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이 우리의 눈앞에서 투명인간이 되는 상황이 얼마나 자주 있었습니까? 쇼윈도의 자그마한 핸드백 하는 그렇게 눈에 쏙쏙 잘 들어오는데 바로 내 옆의 가난한 자, 장애인, 노약자, 병자, 사고당한 사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은 왜 안 보일까요? 자기 좋다고 아무데서나 담배를 피우면서 자신 때문에 피해를 보고 고통 받는 주위사람은 왜 의식하지 못하는 걸까요?
이웃도 못 보면서 하느님을 보겠다고?
자기에게 유리하고 좋은 것만 보려하고, 불리하고 싫은 것을 보려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하느님을 볼 수 없습니다. 이웃을 삶 안에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만나고 사랑하고 보듬어주지 않는 사람은 결코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찾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 주의에 누가 있는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보고, 다가서고, 보듬어주십시오. 주님께서 나를 보아주시고, 가까이 다가와주시고, 보듬어주실 것입니다.
청소년 바로보기(44)
교회, 아이들에게 희망이 되어주고 있는가?⑤
본당이 설립되던 첫해, 교사도 없고 캠프 준비할 여력도 안돼서 위탁캠프를 보냈습니다. 그때 프로그램도 좋았고, 진행팀은 아이들을 잘 이끌어 갔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표정은 생기가 없었고, 수동적인 태도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그렇게 수동적으로 끌려 다니는 아이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표정이 제 마음에 깊이 남았고, 그때부터 참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나 3-4명의 교사들로 자체 캠프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주어진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스스로 주체가 되는 캠프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다음 해부터 그런 캠프를 진행했습니다. 지면관계상 올해 캠프 이야기만 나누어볼까 합니다.
올해의 테마는 부모님의 삶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첫날 아이들은 농수산물 시장에 나가 그날 저녁 각 조별로 자신들이 번 돈을 가지고 떠날 여행계획을 세웠고, 다음날 아침 베이스캠프를 나가 하루 종일 마음껏 여행을 했습니다. 교사들은 본부에서 스마트폰으로 아이들에게 중간 중간 미션을 던지고, 아이들은 미션 수행 결과를 실시간으로 보고 합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시오"라는 미션과 인터뷰 할 질문들을 보내면 아이들은 인터뷰 영상이나 음성 파일을 본부에 전송하는 식입니다. 자기들끼리 여행을 하며 아이들은 자유를 만끽하기도 하지만 자신들이 일을 해 보았기에 돈의 가치를 새롭게 깨닫습니다. 팥빙수 한 그릇은 자신들이 두 시간 일해야 겨우 먹을 수 있는 가격이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여행을 하며 참 많은 것을 깨달았는지 저녁에 부모님께 편지를 쓰는데 그 자리가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다음날 파견미사 때 아이들의 임금에서 5천원씩 떼어 두었던 돈을 돌려주며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일해서 번 이 소중한 돈을 가장 아름답게 쓰라는 미션을 주었습니다. 아이들이 미션을 수행한 결과는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교사들은 늘 아이들 뒤에 있고, 아이들이 체험을 정리할 수 있는 최소한의 프로그램만 마련합니다. 캠프의 주체는 아이들입니다. 매년 아이들이 자신들의 여행을 계획하고, 자기들끼리 자유롭게 활동합니다. 통제하는 교사 없이 자기들끼리 모든 것을 하다보니 아이들이 힘들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몸은 피곤해하면서도 아이들 모습에 생기가 넘치고, 캠프를 기점으로 아이들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지금까지의 캠프가 잘 차려놓은 밥상에 아이들을 불러 앉히는 것이었다면, 저희 캠프는 재료만 던져주는 캠프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아이들이 주체가 되다보니 아이들 안에 숨어 있던 아주 놀라운 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기존의 틀을 벗어나 아이들에게 눈길을 돌리고 아이들이 주체가 되게 해 주는 것, 한 번쯤 시도해 볼만한 일 아닐까요?
-오종진 신부. 복수동 주임-
미사 속 숨은 보화
감사송(Praefatio) 2 - 변천과정①
초세기의 감사기도는 각 부분이 서로 연결된 하나의 길고 장엄한 기도였습니다. 그러다가 4세기 후반 로마전문이 등장하면서 변하는 부분과 변하지 않는 부분으로 분리되기 시작하였는데, 변하는 부분 가운데 대표적인 기도가 감사송입니다.
변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날의 특성이나 지향에 따라 감사송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는데, 이 가운데에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기도보다 윤리적 훈화나 성인의 전설, 간 처의 기도가 더 많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8세기 이후 감사기도가 아닌 많은 수의 감사송을 폐기하였고,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에는 10개의 감사송만을 남겨놓게 됩니다.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37)- 김두한 신부.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제3편-제2부-제2장-제5절 : 다섯째 계명
지난 9월 11일 천주교 생명운동연합회는 탄방동 성당에서 생명 수호 결의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교회는 405명의 태아를 낙태한 의사들에게 '선고유예'와 '형의 면제'를 판결한 대전지방법원을 규탄하면서, 태아의 생명권 보장과 엄정한 법집행(형법 제27장 '낙태의 죄')을 촉구하였습니다. 이날 생명수호 미사의 '성명서'는 낙태에 대해 분명하게 말합니다. "낙태는 흉악한 죄악이며,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대한 도전입니다."고의적인 낙태와 그에 대한 협력은 "사람을 죽이지 마라."는 다섯째 계명을 어기는 중대한 죄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임신(受精)되는 순간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태아도 우리와 동등한 위치에서 완전하게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주신 선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을 존중하고 소중하게 이어 가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인간 생명을 해치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 목적에 어긋나며,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거나 손상시킬 아무런 권한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최우선으로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다섯째 계명은 '직접적이고 고의적인 살인'뿐만 아니라 간접적인 방법이라도 남을 죽이려고 의도하거나 죽을 위험에 놓이게 하는 행위, 또한 위험에 처한 사람의 요청을 거절하는 행위를 금하는 명령입니다.
또한 신체장애인, 병자 또는 임종을 목전에 둔 사람의 목숨을 끊는 직접적인 안락사는 다섯째 계명에 어긋나는 행위입니다. 안락사는 환자의 동의가 있든 없든 불법이자 살인입니다. 그러나 자연적인 생명이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을 때, '지나친 치료'를 위한 의료 기구의 사용 중단은 정당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고의적으로 병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막을 수 없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생명을 보존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살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자살은 올바른 자기 사랑에도 어긋나고, 동시에 이웃 사랑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이 구원에 대해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만이 아시는 방법을 통해 구원에 필요한 회개의 기회를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계명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어긋나는 모든 행위를 금합니다. 악한 표양, 온갖 형태의 과잉(음식, 술, 담배), 마약, 테러, 고문, 공권력의 부당한 행사 등은 인간 생명을 해치는 것입니다.
주님!
이 가을 햇살아래
작은 귀 기울이게 하소서
오늘의 기도에서
내일의 희망을 듣게 하소서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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