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3년 주보

연중 제28주일 2013년 10월 13일(다해)

모든 2 2021. 7. 22. 08:50

「참된 치유」 김택민 신부(2012, 소록도)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루카 17,15-16)

 

 

 

+  루카 복음 17,11-19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라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말씀의 향기>

 

익숙한 낯설음 "돌처럼 굳음 마음 살처럼 부드럽게 하소서" - 김디울  클레멘스 산성동 주임

 

  몇 해 전에 같은 지구 신부님들과 한라산 등반을 한 적이 있었다.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아무런 채비도 갖추지 못한 채 산을 오르게 되었다. 남들이 들으면 기가 찰 일이었겠지만, 눈이 오는 한라산을, 그것도 테니스화를 신고 말이다. 눈발이 굵어지고 눈이 쌓이면서 주변 풍경은 아름답게 변해갔다. 눈꽃송이를 달고 화사한 자태를 뽐내는 수많은 나무들, 그지 달력에서나  감상했던 설경이 펼쳐졌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에겐 이 모든 것들은 차창 밖으로 급히 사라져 버리는 풍경들처럼 스쳐 지나가 버렸다. 테니스화를 신은 탓에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다리에 힘을 주다보니 쥐가 나서 다른 데 신경 쓸 틈이 없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내려갈 엄두가 안 나서 올라간 백록담은 안개인지 구름인지 정체모를 연기만 자욱했다.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실망스런 기분을 느끼고 있기에 땀이 식어 너무 추웠고, 그래서 얼마 후 다시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중간   어디쯤 대피소인지 휴게소인지를 들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국과 반찬을 놓고 제대로 먹는 것이 아니라 대충 때우려고 먹던 그 컵라면이었다. 나에게 '이게 뭐하는 거지?' 하는 자괴감을 주던 그 컵라면이 이토록 큰 기쁨을 맛보게 해줄 줄이야! 대충 위장으로 우겨넣던 방식을 벗어나 면발 하나하나의 탱탱함과 쫄깃함을 즐기면서, 국물의 시원함과 인공조미료의 오묘한 맛까지 음미하며 깨끗이 비워냈다. 정말 행복했다. 이 산행에서 나를 행복하게 한 것은 멋들어진 풍경이 아니라 추위를 덜어주고 코와 혀와 위장을 즐겁게 해준 컵라면이었다. 인간의 기억은 참 요상하다. 그 멋진 풍경들은 희미해져 버렸지만, 이 라면의 맛은 내 머리 속 어딘가에 영상으로 저장해 놓은 듯 또렷하다. 아마도 익숙한 것에 대한 새로운 낯설음이 가져온 결과이리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 명의 나변환자를 고쳐주신다. 그 가운데 아홉은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믿고, 하느님의 백성이라 자부하던 유대인들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이었다. 이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와서 감사드리며 하느님께 찬양을 드린 이는 이방인인 사마리아인뿐이었다. 왜 그는 다른 아홉 사람과 달리 예수께 달려왔을까? 아마도 그가 체험한 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에 대한 익숙한 낯설음이었을 것이다. 다른 아홉 사람이 익숙한 하느님이 자비를 체험했다면, 이 이방인은 하느님 자비의 낯설음을,그리고 그것이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했다면, 이 이방인은 하느님 자비의 낯설음을, 그리고 그것이 가져다 준 기쁨과 행복을 체험했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도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너무 익숙해져만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청소년 바로보기(46)

 

이 시대의 아이들에게 우리 교회는 무엇을 주어야 하는가?②

 

  심리학자 Lazarus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떤 상황이 스트레스로 지각되느냐 하는 것은 자극이나 반응 자체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유기체가 환경적 자극을 해석하고 요구에 응할 수 있는 개인의 자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있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이 말처럼 자신에게 주어지는 스트레스를 긍정적으로 해결할 수있는 적응기제를 갖고 있는 아이들은 똑같은 스트레스 사왕 속에서도 별 문제 없이 그 상황을 잘 이겨냅니다. 하지만 그런 내적 자원을 갖고 있지 못한 아이들은 끊임없이 역기능적인 문제를 드러내며 '문제아'가 되어갑니다. 아이들도 자신이 문제행동을 일으키면 어떤 결과가 주어질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혼나고, 징계받는 것을 정말 싫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 행동을 일으킵니다. 왜 이러는 것일까요? 이들은 현실의 자극에 대처할 수 있는 내적인 자원이 없습니다. 때문에 아이들의 문제행동 뒤에는 아주 절박한 실존적인 외침이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행동의 결과만을 보고 그들을 설득하거나 나무랄 뿐, 그들의 절박한 외침을 잘 읽어주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 시대의 아이들과 만나야 할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죄인으로 낙인찍은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 마음속의 절박한 외침을 읽어주셨고, 이 예수님의 만남은 놀라운 존재의 변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 시대의 아이들에게 이런 예수님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학교와 학원이 지적인 성장에 초점을 두고 아이들을 교육한다면 성당은 인성적이고 영적인 성장에 초점을 두고, 아이들이 온전한 '하느님의 모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런데 주일학교의 교사들이나 사목자가 주일학교의 교육 목표가 무엇이고, 주일학교 교육을 통해 키워내고자 하는 인간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과연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또 이런 비전을 사목자와 교사가 공유하고, 이 비전에 입각해 연간 교육계획을 수립하고 있을까요? 또 참으로 아이들을 존중하는 태도로 아이들과 만나주고 있을까요? 만일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교리를 하면서 아이들이 떠들고 장난친다고 화내고 야단친다면 과연 아이들이 자신들이 존엄한 인간임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1주일에 1시간의 교육시간이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지만 그 1시간이 아이들에게 단비와 같은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지적인 성장을 우선시하는 현실 안에서 아이들은 조금씩 지쳐갑니다. 하지만 성당에서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교육계획을 갖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하고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태도를 갖추게 해 줄 수 있다면 이는 분명 아이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가장 중요한 영혼의 자산이 될 것입니다.

-오종진 신부. 복수동 주임-

 

<미사 속 숨은 보화>

 

감사송(praefatio) 3 - 구성 ①

 

  모든 감사송은 시작 부분, 본론, 마침 부분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시작 부분은 사제와 교우 간의 삼중 대화의 마지막 부분인 "우리 주 하느님께 감사합니다."와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의 내용을 반복하여 본론으로 인도합니다.

  시작 부분에서 모든 사람은 거룩하시고 전능하시며 영원하신 하느님을 전심으로 사랑해야 하듯이, 그분이 베풀어주신 자비와 은혜에 감사함이 마땅하고 옳은 일임을 상기시킵니다. 특별히 하느님을 부를 때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이라고 하느님의 영광과 관련된 장엄한 호칭을 사용한 것은 그만큼 우리에게 주어진 감사의 의무가 크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39) -김두한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제3편 - 제2부-제2장-제7절: 일곱째 계명

 

  일곱째 계명은 "도둑질을 하지 마라."입니다. 이 계명은 이웃의 재산을 빼앗거나 부당하게 차지하거나 이웃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을 금합니다.

 

  우리의 재산 소유권은 기본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와 존엄성을 유지하고, 우리와 우리가 책임지고 있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기 위해 재산을 소유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따라서 정당한 방법으로 획득한 개인의 재산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만일 그 재사를 소유한 주인이 정당한 의사를 거슬러 훔치거나 빼앗는 짓은 도둑질입니다. 이 도둑질에는 임금을 정당하게 지불하지 않는 행위, 습득한 물건을 일부러 간직하는 일, 장사할 때 속이는 것, 수표나 계산서를 위조하는 행위 등이 포함됩니다. 또한 탈세, 타인이나 공공 재산의 파괴, 공유 재산의 유용이나 낭비, 부패 등도 이 계명을 어기는 죄입니다.

 

  교회는 인간의 기본권과 구원을 위해 필요한 때 경제나 사회 문화에 대하여 윤리적 판단을 내립니다. 교회가 사회에 개입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탕으로 참된 인간과 참된 사회를 이루고,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회 교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경제생활을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어, 지난 7월 11일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발표하신 '자의 교서'는 경제. 금융 분야의 궁극적 목적인 '인간의 발전과 공동선의 실현'에 부응하고자 교회부터 쇄신의 노력을 표명한 것입니다.

 

 경제 활동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저 물건을 많이 만들고 이윤이나 경제력을 높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경제생활의 주인이고 중심이며 목적이어야 합니다. 개인은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면서 노동에 참여합니다. 우리의 노동은 자신과 가족의 삶에 필요한 것을 마련하고 인류 공동체의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노동은 인간을 위한 것이지, 인간이 노동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권을 해치는 노동 행위나 경제 활동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업은 이윤의 증대뿐 아니라 인간의 선익에도 협력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국가는 노동자와 사용자가 동등하게 노동의 결실을 누릴 수 있게 해 주고, 특히 개인의 자유와 재산, 통화 안정과 공공 부분 서비스를 보장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사랑을 실천해 왔습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은 예수님처럼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신과 나눔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사랑의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거칠고 질박한

이 마음에

너그럽고 아름다운 꽃

환하게

피어나리.

 

주님의

평화가 가득 넘쳐나리.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