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한 사다리」김진 신부(2013)
겸손한 이의 기도는 구름을 거쳐서 그분께 도달하기까지 위로를 마다한다."(집회 35,21)
+ 루카 복음 18,9-14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뜰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말씀의 향기>
바리사이와 세리 "겸손한 마음은 은총을 받는 통로입니다" -김두한 요셉 가톨릭대학교 교수
'의롭다'의 사전적 의미는 떳떳하고 옳다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어떤 사안(사안)에 대해, 신앙을 고백할 때 우리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앞에 서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오늘 예수님이 비유를 보면,바리사이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의로운 사람처럼 고백합니다. 이렇게 스스로 확신하는 이유는 일주일 두 번 단식과 모든 소득의 십일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근거로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고, 그들을 낮추면서 자신을 높입니다. 단식과 십일조 자체는 자신에 대한 회개와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단식과 십일조를 자신과 이웃을 판단하는 도구로 삼고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자처한다면, 그것은 교만입니다.
분명 단식과 십일조를 충실히 지키는 것은 하느님께 칭찬받을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신앙의 전부가 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미사'는 신앙생활의 중심입니다. 그러나 미사참례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완결되지 않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일상생활에서 하느님이 뜻을 헤아리고, 겸손한 종(루카 17,7-10)과 같이 하느님을 섬겨야 합니다.
한편 우리는 세리의 기도를 함께 들었습니다. 그는 하느님 앞에 서는 것조차 버겁게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그는 하느님의 시각(視角)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빛은 그의나약함과 한계, 교만과 죄를 환히 드러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게 되고 자비를 청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겸손한 이의 기도에 겸손을 높이 보시고 그를 의롭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누구든 죄로 멸망하여 죽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회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리사이처럼 하느님 앞에 의롭다고 자만하며 자신의 업적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또한 죄 때문에 하느님을 회피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리와 같이 하느님께 죄인으로 고백하며 주님의 자비와 은총을 청하는 것입니다.
청소년 바로보기(48)
이 시대의 아이들에게 우리 교회는 무엇을 주어야 하는가?④
본당에서 주일학교를 활성화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하고, 노력을 하다보면 벽에 부딪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잔치상은 차려놨는데 정작 와서 음식을 함께할 사람이 없는 것이지요. 일차적으로는 아이들이 성당에 나오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겠지만 사실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그 뒤에는 '부모의 태도'라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신앙은 아이가 직접 선택해야 하는 것이기에 강요하고 싶지 않다.'혹은 '가라고는 하는데 아이가 성당에 안 나오려 해서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참 많이 듣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성당에 나오는 것은 아이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고 하는 엄마가 학원에 이제 그만 가겠다고 하면 왜 혼내면서까지 억지로 학원에 보내시는 것일까요? 이런 엄마들의 태도는 성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뿐, 신앙이나 인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있음을 드러내는 단적인 예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중요성이나 가치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이 엄마들의 태도가 본질적인 문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태도를 보이는 엄마들 중에는 청소년기에 주일학교에 다녔던 분들이 꽤 있습니다. 주일학교 교육과정을 거쳤는데 신앙의 가치를 깨닫고,삶 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살아가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지 못한 것입니다. 만일 학교 교육과정을 거쳤는데 우리나라의 국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소양을 갖추지 못했다면 현행 교육과정 전체를 분석하여 문제의 원인을 찾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교육 대개혁이 불가피하겠지요. 어쩌면 오늘의 우리 주일학교가 바로 이런 상황이 아닐까요? 그런데 교회 안에서는 '엄마들이 바뀌어야 한다'는 아주 단편적인 이야기만 간간이 보일 뿐, 현재까지 이루어진 주일학교 교육 전반에 관한 깊은 분석과 성찰은 별로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주일학교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부모가 되면 과연 신앙의 가치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삶을 통해 복음을 살아가는 성숙한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오늘의 아이들에 대한 정확한 이해,교육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명확한 목표, 이를 구체적으로 이루어내기 위한 체계적인 교육과정, 그리고 효율적으로 이 목표를 이뤄내기 위한 다양한 교육방법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일학교는 우리 교회가 지켜온 그리스도의 가치를 후대에 전달하고 '하느님의 사람'을 양성해내는 우리 교회의 가장 중요한 교육 기관인데, 과연 우리 교회가 그런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충분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오종진 신부.복수동 주임-
미사 속 숨은 보화
감사송(praefatio) 5 -구성③
감사송의 마침부분은 모든 천사들과 함께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노래를 부르자는 권고입니다. 이 부분의 시작부분과 같이 천상 영들의 이름이 다소 바뀌는 것 외에는 거의 변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예로부터 그리스도의 구원업적을 기념한 다음 천상 영들을 초대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지상의 교회는 천상에서 하느님과 그 백성이 드리는 전례에 참여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상의 전례에서 하늘의 만군과 더불어 주님께 영광의 찬미가를 부르며,성인들을 기억하고 공경하면서 그들의 일치에 한몫을 누리기를 희망한다."(전례 헌장 8장)
교회의 전통에 따라 천사들과 함께 천상 교회와 통교를 이루고 그와 하나 되기를 청하며 주님의 구원 업적에 대한 감사와 찬미의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41) - 김두한 신부.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제3편-제2부-제2장-제9절 : 아홉째 계명과 열째 계명
십계명의 마지말 두 계명은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입니다. 이 계명들은 '탐내는 것'을 금합니다. 즉 악한 행실을 하게 하는 마음, 곧 '탐욕'을 경계하도록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내가 존재하는 곳이고 우리의 숨겨진 중심입니다. 마음은 우리의 심리적 성향의 가장 깊은 곳이기에,결단을 내리는 곳입니다. 우리는 온 마음으로 하느님께 기도하지만, 반대로 마음으로 하느님과 멀리 떨어질 수 있습니다.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 등이 나오기 때문입니다.(마태 15,19 참조)
행복 선언에서 예수님은 여섯 번째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 뵈올 것이며, 하느님을 닮게 되리라는 얼굴을 마주 뵈올 것이며, 하느님을 닮게 되리라는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거룩함에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일치시킨 사람들입니다. 마음의 깨끗함과 육체의 깨끗함과 신앙의 순수함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깨끗한 마음을 가짐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시각(視角)으로 자신과 세상을 보고, 타인을 '이웃'으로 받아들이며, 우리의 육체를 성령의 성전으로 감지할 수 있습니다.
아홉째 계명이 육체의 탐욕을 금한다면, 열째 계명은 재물에 대한 탐욕과 지나친 소유욕을 금합니다. 재산을 소유하고 부를 누리는 것은 축복이며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재물의 집착은 다른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게 만드는 무절제한 욕망입니다.타인의 소유물에 대한 욕심은 광대하고 무한하며, 또 "돈을 사랑하는 자는 돈으로 광대하고 무한하며, 또 "돈을 사랑하는 자는 돈으로 만족하지 못한다."(코헬 5,9)는 성경말씀처럼, 결코 채워지지 못할 것입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이 있다."(마태 6,21) '어디에'우리의 보물이 있습니까? '무엇이'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입니까? 우리의 마음은 '무엇을' 갈망합니까? 진정한 행복의 갈망은 재물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의 행복을 누릴 때 채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십계명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고 구속하는 명령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계명은 족쇄도 아니도 관습도 아닙니다. 십계명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이웃과 평화를 이루며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내려주신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을 하나의 계명으로 묶어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3,34)
주님!
이 마음
작고 빈약하여 남루하지만
하늘에 이르는 간절함으로
이 계절을
기도합니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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