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3년 주보

연중 제32주일 2013년 11월 10일(다해)

모든 2 2021. 7. 23. 23:56

「부활」 오세정 신부(2013)

부활절 그대의 몸에 무엇을 심고 있는가?

 

 

+루카 복음.20,27-38 또는 20,27.34-38>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그때에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스승님,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주었습니다.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참여할 자격도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말씀의 향기>

 

부활의 삶을 살아갑시다 -"희망을 갖고 늘 기뻐하며 사랑할 수 있길" - 오기환 사도요한 병원사목전담

 

  얼마 전 오랫동안 투병을 하시던 형제님 한 분이 하느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2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옆에서 간병을 하시던 부인은 무척이나 슬퍼하셨지요. 형제님을 보내드리고 나서도 한동안 형제님 얘기만 나오면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부부간의 정이란 저렇게 애틋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봉사자들과 나누고 있었는데 한 봉사자 분이 "그렇게 고생하셨는데 다음 생에도 또 만나고 싶으실까요?" 하는 얘기를 하셨습니다. 순간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신다고 생각한 자매님이었는데 부활을 잘못 알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復活은 말 그대로 풀이하면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부활은 현세의 삶을 다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세사에는 죽었다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복음 안에서 라자로도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로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누려야 할 부활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응 생명의 은총으로서의 부활을 '새로 태어남'과 동시에 '다시 죽지 않음'을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도 누리게 됨을 의미합니다. 한 번 죽었다 살아난 라자로도 결국은 하느님 품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한 번으로 완성되는 것이며 다시는 노쇠함이나 병으로 인한 죽음을 겪지 않는 것입니다.

 

  고통과 죽음은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써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겪는 속죄의 모습이며, 우리가 희망하고 바라는 부활은 그러한 삶을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품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누리게 되는 영광스러운 삶이며,영원한 생명의 삶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그러한 영광스런 부활의 삶을 이 세상으로부터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례를 통해 한 번 죽었다 새로 태어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하늘나라를 미리 살아가는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ㅇ않고, 슬픔 속에서도 기쁨을 찾으며, 이기적이고 증오와 분노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 이 세상에서 새로 태어난 하느님의 자녀로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부활을 삶으로 증거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청소년 바로보기(50)

 

복수동 성당 중고등부 주일학교의 작은 시도 ①

 

  청소년의 해를 준비하며 본당의 중고등부 주일학교 교육과정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기 위해 참 많은 고민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보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지성적인 측면, 인성적인 측면, 그리고 영성적인 측면이 주일학교 교육과정 안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편성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올해 특별히 중점을 두었던 것은 영성적인 측면이었습니다. 아이들이 구체적인 일상 안에서 복음의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아이들이 자신들이 삶 한복판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때문에 한 달 중의 두 주는 영성교육 프로그램을, 한 주는 지성교육 프로그램을, 그리고  또 한 주는 인성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을 주일학교의 기본 운영 지침으로 세웠습니다.

 

  이 3가지 측면에서 다루고자 했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지성교육을 통해서는 아이들에게 가톨릭 신자로서 살아가지 위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교리지식과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구원의 진리를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단지 머릿속에 저장하는 죽은 지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세상을 읽어내고, 보이는 현상 너머의 가치들을 분별해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해 영상포럼을 도입했습니다. 영화 한 편을 본 뒤, 아이들에게는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질문들이 주어집니다. 그 질문들을 토대로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을 통해 세상을 읽어내는 그리스도인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체득할 수 있도록 하고자 했습니다.

 

  인성교육을 통해서는 아이들이 '하느님을 닮은 존재'인 자신을 새롭게 만나고,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고자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고유한 특성을 탐색함으로써 나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나와 다른 타인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성격 유형 검사, 집단 상담 등을 활용했습니다. 그리고 진로라는 것이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고유한 부르심이고,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고 세상에 하느님의 뜻을 실현해나가는 소중한 소명이을 깨닫고 자신에게 맡겨주신 하느님의 소중한 달란트를 탐색하도록 하기 위해 진로 적성검사 등을 활용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평가하는 삶의 주체로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플래너를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이 플래너에 학업적인 측면에 대한 계획과 평가뿐 아니라 3-4줄 정도의 짧은 일기를 쓰도록 하였고, 이를 통해 아이들이 매일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고자 했습니다.

 

-오종진 신부. 복수동 주임-

 

 

미사 속 숨은 보화

 

거룩하시도다(Sanctus) 2 - 기원 1

 

  이 노래의 전례 기원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전례 예식에 대해 알 수 있는 초대 교회의 문헌들(디다케, 사도전승, 로마 감사 기도문 등)에서도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동방의 문헌들에서 2세기 말 경부터 사용된 흔적이 나타난 것으로 보아 비록 대중적이지는 않더라도 지역적으로 2세기경부터 사용되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습니다. 초기의 양식은 전반부의 세 번 반복하는 "거룩하시도다"라는 환호만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유대인의 회당 기도 예배에서도 사용되었고 요한 묵시록 4장에서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43) -김두한 신부.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제4편 -제1부-제3장-제1절 : 기도의 형태

 

  우리는 자주 기도서에 있는 '기도문'을 통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때대로 화살기도를 통해 자유롭게 기도합니다. 이러한 기도를 소리기도라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묵주기도, 주님의 기도, 자유기도 등이 있습니다. 이 기도의 특징은 우리말로 소리 내거나 마음속으로 외워 주님께 찬미, 감사, 간청 등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우리가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처럼, 하느님께 이야기할 때가 있다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바치는 기도를 묵상기도라고 합니다. 우리는 주로 성경(복음서)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이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에 따라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묵상기도는 성모님께서 그 뜻을 마음 깊이 간직하셨듯이(루카 2,19 참조) 우리도 성경 말씀을 마음으로 새겨듣고 생활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묵상기도는 특별한 방법이 정해져 있지 않지만, 보통 성령청원기도를 통해 시작합니다. 이어서 하느님의 말씀(성경본문)을 통해 예수님과 만나고, 그 말씀을 '되새 김길'하며, 일상의 경험을 그 말씀으로 비추어 반성하고,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실천합니다. 예를 들어, 소공동체 모임의 '복음 나누기'는 묵상기도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묵상기도를 통해 더 깊은 기도로 나아가게 되는데, 이 기도를 관상기도라고 합니다. 관상기도는 하느님과의 온전히 만나는 기도입니다. 그 만남에서는 더 이상의 특별한 대화나 사색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을 향한 신앙의 '눈길'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관상기도는 단순하지만 그 신비의 체험은 깊고 강렬합니다. 관상기도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능합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실 때, 우리는 그분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 그 은총을 구하고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 자신을 비우고 주님께 온전히 맡겨드리는 신뢰가 필요합니다.

 

  묵상기도와 함께, 관상기도는 침묵 중에 이루어져야 하며, 감정과 상황에 따라 기도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 비록 분심과 유혹으로 기도의 어려움이 있더라도,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우리가 유의할 점이 있다면, 묵상기도와 관상기도에 친숙하더라고 누구도 소리기도를 등한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 정성껏 바치는 소리기도(기도문)는 하느님께 대한 묵상으로 이어지고, 또한 관상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신비를 체험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다 내어준

앙상한 어미의 손

 

화인(火印)처럼 

내 가슴에 팬

 

-글. 그림 이순구 베네딕도-

 

 

 

<함께하는 이야기마당>  - 김지용 요셉. 월평동 성당

 

1,000차를 향하여

 

  월평동 성당의 청년 레지오인 "티 없으신 어머니" 쁘레시디움이 900차를 맞이하였습니다. 900차라는 말이 참 감호가 새롭습니다.

 

  저희 "티 없으신 어머니"가 900차를 맞이하기까지 참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한때는 레지오의 단원수가 많이 줄어드어 없어질 뻔한 저도 있었지만 수많은 분들의 기도와 관심 덕에 지금의 900차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900차 행사로 단원들과 소풍을 다녀왔습니다. 함께 가을을 느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우리 레지오 단원들과 함께하여 이 시간을 허락해 주시고, 900차까지 저희 레지오를 이끌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렸습니다.

 

 900차  행사를 하며 많은 분들께 과분하게 축하를 많이 받았습니다. 900차가 있기까지 저희 청년 레지오를 만들어 주시고, 레지오를 하셨던 선배형, 누나들이 계셨기에 지금의 저희 레지오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레지오 선배 형, 누나들께 감사드립니다.

 

 900차는 선배 형, 누나들께서 만들어 주신거라면 다음의 1,000차는 지금의 단원들이 열심히 하여 더 단단하고 튼튼한 레지오로 주님 보시기에 좋게 만들어 가겠습니다.

 

 저희 청년 레지오 "티 없으신 어머니"가 성모님의 군대로 주님께 더 나아갈 수 있도록 많은 분들께서 기도로 함께해 주시길 바랍니다.

 

행복한 사람의 속옷 -레오 톨스토이-

 

   한 임금님이 병에 걸리자 「내 병을 고쳐주는 자에게 나라의 절반을 주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지혜있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 어떻게 하면 임금님의 병을 고칠 수 있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만 한 사람만이 임금님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하며 「행복한 사람을 찾아내어 그 사람의 속옷을 벗겨다가 임금님께 입혀 드리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임금님께선 다시 건강해질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임금님은 행복한 사람을 찾아오도록 그 넓은 나라의 방방곡곡에 어사들을 파견했습니다. 어사들이 오랫동안 전국을 돌아다녔지만, 행복한 사람은 하나도 찾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만족하고 있는 사람조차도 하나 없었어요. 돈 많은 사람은 병이 들었고, 건강한 사람은 가난했어요. 건강하고 돈 많은 사람은 부인이 악독스러웠으며, 혹은 어떤 사람에게는 자식들이 속을 썩이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다 어떤 불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늦게 임금님의 아들이 가난한 오두막집 옆을 지나가다가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일거리가 넉넉했고 배도 부르니 이제 잠을 자야지 더 바랄 것이 무엇 이리오!」

 

   왕자는 기뻐하며 하인들에게 명하여 그 사람의 속옷을 벗겨오되 그 대신 그가 요구하는 대로 많은 돈을 주라고, 그리고 곧 그 속옷을 임금님께 가져다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하인들은 급히 그 행복한 사람에게로 달려가 속옷을 벗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행복한 사람은 너무나 가난하여 속옷조차 입고 있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