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 홍정수 신부 (2013)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10)
+ 루카 복음.19,1-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거리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하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말씀의 향기>
후회없는 삶 -"회개 그리고 나눔"-이득규 바오로 장항 주임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한 후회를 한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인지 몰라도 요즘 세상에는 "요기를 내라.", "불가능을 불가능이라고 생각하지 마라."라는 식으로 '후회할 것을 남겨놓지 마라."라고 독려하는 말들이 넘쳐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후회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그에 대한 정답이 바로 오늘 복음인 자캐오 이야기에 나와 있습니다. 자캐오는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루카 19,7)이라는 사람들의 반응이 복음에 나와 있듯이 손가락질 당하고 멸시받는 인생을 살고 있던 세관장이었습니다.
자캐오의 직업은 세리였고, 우리들이 잘 알고 있듯이 당시 세리는 민족을 배신하고 부정부패를 일삼는 '천하의 죽일 놈'취급을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치 일제강점기에 일본 앞잡이를 바라보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시선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세리들의 장이 자캐오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캐오의 부는 엄청났을 것이고, 재물이 쌓이고 쌓일수록 그의 죄와 원망은 쌓여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캐오가 예수님을 만나면서 자신이 모든 죄를 진심으로 누우치고 회개합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들의 재무를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8) 이렇게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완전히 변화되었고, 이런 자캐오의 결심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구원을 약속하십니다. 재물을 쌓기 위해서 동족도 배신하고 매국노가 되었던 그가 이제는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재물을 포기합니다. 이것이 자캐오의 인생역전이었습니다.
자캐오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면서, 동시에 우리를 부담스럽게 하기도 합니다. 자캐오와 같은 결단이 부족한 우리들의 모습을 자꾸만 돌아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캐오와 같은 인생역전은 한 순간에,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하지만 하느님을 끊임없이 바로며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을 때, 그릇된 행동이 있다면 멈추고 새로운 길로 가는 것!!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후회없는 인생의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자캐오처럼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언제나 자캐오처럼 예수님을 만나 변화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며, 진정 죽음을 앞두고도 후회가 없도록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청소년 바로보기(49)
이 시대의 아이들에게 우리 교회는 무엇을 주어야 하는가? ⑤
현대의 사회는 많은 능력을 요구하고, 젊은이들은 세사이 요구하는 능력을 갖추어 살아남기 위해 참으로 많은 시간을 공부에 할애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능력과 효율에만 집중하다 보니 영혼이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기회는 점점 사라져 가고, 아이들의 목마름은 점점 깊어만 갑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1주일에 1번 1시간 정도 주어지는 주일학교 교리와 1시간 정도 주어지는 주일학교 교리와 1시간의 미사는 어쩌면 아이들이 자신의 영혼을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일지 모릅니다. 이 시간을 통해 우리는 아이들이 삶 한복판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어야 한고,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자신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의 아이들에게 우리 교회가 전해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이고, 이를 전하는 것이 우리 교회의 사명입니다.
주일학교 교육은 아이들이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온전히 깨닫고,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닮을 때 비로소 참된 의미의 '전인격적인 성숙'에 도달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전인격적인 성숙'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적인 측면(하느님의 진리), 인성적인 측면(심리, 정서), 그리고 영성적인 측면(하느님과의 만남)이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 성당의 주일학교 교육과정을 성실히 이수하고 나면 이 세 측면이 조화를 이룬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 있을까요? 사실 우리의 주일학교 교육은 지적인 측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들의 삶과 만나지 못한 채 지식으로만 하느님의 진리가 전달되다 보니 하느님에 관해서 많이 알긴 하는데,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것은 아닐런지요?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 아이들의 목마름은 더 깊어만 갑니다.
물론 주일학교 교육에 관한 지침은 교구 혹은 한국 천주교회에서 체계적으로 논의하고 연구해서 제시되어야 할 것이기는 하지만 일단 각 본당에서 주일학교를 운영할 때, 이 세 가지 측면을 함께 성장시켜 갈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구성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교재 한 권을 정해서 순서대로 진도를 나갈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표를 갖고 1년의 교육과정을 체계적으로 구성한다면 그 주일학교 교육시간을 통해 아이들이 살아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당장 성과가 나오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학업적 성취와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인성, 영성적 측면들을 만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분명 의미가 있는 일이고, 우리 교회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오종진 신부. 복수동 주임-
미사 속 숨은 보화
거룩하시도다(Sanctus) 1 -명칭과 역할
라틴어의 원문의 첫 단어 Sanctus를 따서 "거룩하시도다"라는 명칭을 갖게 된 이 노래는 공동체가 감사의 마음으로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리는 환호송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업적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라는 측면에서는 앞의 감사송에 이어지고,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하는 면에 대해서는 '연결기도'(성찬 제정과 축성기도 전에 바치는 기도 - 예물 수령 청원 Te igitur, 산 이를 위한 전구 Memento, 성인 기념 Communicantes 집회를 위한 청원 Hane igitur)를 준비하는 다리역할을 합니다.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42) -김두한 신부.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제4편-제1부-제1장 : 기도란 무엇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3편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마지막 4편, '그리스도의 기도'를 시작합니다. 우리는 기도로써 신앙을 기르고, 전례 안에서 공동체와 더불어 기도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오늘은 기도란 무엇인가 살펴보겠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나누는 대화입니다. 흔히 기도는 우리 편에서 먼저 하느님을 찾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찾기도 전에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를 그리워하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요한 4,10)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찾으시고, 마실 물을 달라고 우리에게 청합니다. 예수님께선 목말라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신을 목말라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느님의 목마름과 우리 목마름의 만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기도하셨습니다. 일을 시작하기 전 외딴 곳에 가시어 기도하셨고, 중요한 일을 결정하실 때에도, 기쁠 때나 괴로울 때에도,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도 늘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비유로 기도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첫 번째 비유, '벗의 청을 들어주는 사람의 비유'(루카 11,5-13)는 간절하게 기도할 것을 강조합니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이처럼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것입니다. 두 번째 비유, 곧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루카 18,1-8)는 믿음에 따르는 이내를 가지고, 지치지 말고 늘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비유,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루카 18,9-14)는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기에 앞서 하느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다음과 같은 요소로 이루어집니다. 찬미는 하느님의 선물(강복)에 대한 우리의 응답입니다. 흠숭은 창조주 하느님 앞에서 피조물인 우리가 취하는 기본 자세입니다. 청원은 우리가 바라는 것을 자비로운 하느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성찬례를 통해 온전히 우리의 마음을 봉헌하고 표현합니다. 찬양은 하느님께서 존재하시고 좋은 분이시기에 드리는 우리의 응답입니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르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10)
꺼질 듯 작은 숨결에
묻어나는 진실과
숨어있는 믿음까지
사랑하시는
주님!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함께하는 이야기마당> - 이애영 다시아나. 해미성당
순교자들이 살아 숨 쉬는 곳
해미에 와서 살게 된 지가 어느덧 4년째, 저희집 가까이에는 순교자의 압송로인 한티고개가 있고, 본당 가까이에는 무명 순교자 생매장터인 해미성지가 있습니다.
저희 본당에서는 올 9월 마지막 주 금요일 저녁 6시에 해미읍성 호야나무에서 등불을 들고 십자가의 길 14처를 하면서 해미성지에 이르는 "순교자의 밤" 순례와 함께, 해미성지에 계시던 여러 순교자들의 유해를 본당에 모시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미사 전후로 그분들의 유해 앞에서 기도하며 전구할 수 있게 되었고, 이곳은 여느 성지와는 달리 해미읍성 안의 호야나무를 거쳐 서문 밖의 자리갯돌 등 해미 시내를 관통해 십자가의 길 14처를 하게 되어 있어, 발길 닫는 곳마다 그분들의 피흘리신 숨결이 살아 숨쉬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지난 10월 19일, 유흥식 라자로 주교님과 감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님을 비롯한 대전교구 신부님들 100여 명이 순교자들의 압송로인 한티고개에서 해미성지까지 도보로 순례를 하셨습니다.
한티재까지 오셔서 잠깐 쉬시는 동안 땀이 식어 한기를 느끼셨지만 순교자들을 생각하면 겉옷을 입지 못하시겠다는 주교님의 말씀이 가까이 계시는 그분들을 잊고 사는 저희를 일깨우십니다.
이런 기회를 통해 ,85년 혼배성사를 위해 영세를 한 장년의 내 신앙도, 순교자들의 삶처럼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자녀로 살고자 다짐해 봅니다.
산을 오르며 /도종환
산을 오르기 전에는 공연한 자신감으로 들뜨지 않고
오르막에서 가파른 숨 몰아쉬다 주저앉지 않고
내리막길에서 자만의 잰걸음으로 달려가지 않고
평탄한 길에서 게으르지 않게 하소서
잠시 무거운 다리를 그루터기에 걸치고 쉴 때마다 계획하고
고갯마루에 올라서서는 걸어온 길 되돌아보며
두 갈래 길 중 어느 곳으로 가야할지 모를 때도 당황하지 않고
나뭇가지 하나도 세심히 살펴 길 찾아가게 하소서
늘 같은 보폭으로 걷고 언제나 자유 잃지 않으며
등에 진 짐 무거우나 땀 흘리는 일 기쁨으로 받아들여
정상에 오르는 일에만 매여 있지 않고
오르는 길 굽이굽이 아름다운 것들 보고 느끼어
우리가 오른 봉우리도 많은 봉우리 중의 하나임을 알게 하소서
가장 높이 올라설수록 가장 외로운 바람과 만나게 되며
올라선 곳에서는 반드시 내려와야 함을 겸손하게 받아들여
산 내려와서도 산을 하찮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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