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3년 주보

연중 제22주일 2013년 9월 1일(다해)

모든 2 2021. 7. 10. 23:42

「주님의 길」 김진 신부(2013)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

 

+ 루카복음 14,7-14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이에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말씀의 향기>

 

지금 어디를 보고 계신가요? -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최용상 바오로 대천해수욕장 주임

 

  신부가 되고 나서는 어디를  가든 대부분 윗자리에 앉게 된다. 신부님 오셨다고 윗자리에 반듯하게 상을 차려 놓으니 아랫자리에 앉고 싶어도 앉을 수가 없다. 만약 앉는다고 해도 이건 초대한 신자를 오히려 번거롭게 만들기에 아랫자리에 앉는 건 동경의 대상일 뿐이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사람들이 서로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모습을 보시고 "누가 너를 혼인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하고 말씀하신다. 우스개 소리지만, 하여간 예수님은 한 소리 안 하시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시다. 예수님이시니까 듣고 있지 만약 신부가 이런 소리 했다가는..

 

  사람이건 동물이건 윗자리를 좋아한다. 꼭 경쟁에서 이겨서 윗자리를 차지하는 것만 말하는 게 아니다.내 삶의 수준, 사고의 수준보다 높은 사람과 만나서 차 마시고 이야기하다 보면 내가 마치 그 사람과 같은 수준의 사람인양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그 사람과 다시 만나고 싶어진다. 그 사람이 좋아서가 아니라 내 수준이 올라간 것 같아서 좋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 자리보다 그 사람의 자리가 좋은 것이다. 확대 해석일지는 모르지만 내가 만약 이렇다면 내 자리에 대한 불만,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보며 살고 있는가? 무엇을 볼 때 감동하는가? 그런데 생각해보변 무엇을 보는지보다 어디를 보는지에 따라 감동의 정도가 달라진다. 등산해 봐서 다들 알 것이다. 아래에서 산 정상을 바라볼 때보다 산 정상에서 아래를 바라볼 때 더 감동적이다. 즉 사람은 아래를 바라볼 줄 알아야 행복할 수 있다.

 

  우리의 시선은 늘 가난하고 소외 받는 이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게 예수님의 시선이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단지 위 자리에 앉아 말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니다. 우리의 시선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즉 우리의 시선은 늘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 나보다 낮은 이들을 향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는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을 바라볼 때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요즘 나는 행복한가? 행복하지 않다면 내가 지금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다. 우리 눈의 시선이 늘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을 바라본다면 우리의 영혼의 시선은 늘 행복한 하늘나라를 보라 보게 될 것이다.

 

 

청소년 바로보기(40)

 

교회,아이들에게 희망이 되어주고 있는가? ①

 

  아이들이 살아가는 오늘의 사회적, 문화적 환경은 기능적으로 뛰어난 인재를 키워내기에 적합한 효율적인 환경일지는 몰라도 아이들이 자신의 영혼을 만나고, 삶의 본질적인 의미와 가치를 고민하며 성장하는 데에는 그리 좋은 환경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학교와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메시지를 한번 잘 돌아보십시오. 세상에서 '훌륭한 기능'을 수행하고, 인정받는 '성공한 삶'을 위한 지식과 능력을 갖추라는 것, 이것이 우리 사회가 아이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아이들도 도구적, 기능적 차원에서 훌륭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자신의 능력에 따라 삶의 질이 얼마나 달라질지 잘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것을 얻기 위해 정신없이 달려 나가는 아이들도 있지만, 반대로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음을 알기에 좌절하고 절망하며 아예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세상을 향해 내면의 분노를 쏟아내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적응을 하고 앞으로 달려가는 아이들도,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철없이 지내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도 실은 똑같이 목이 마릅니다. 적응을 한 아이들은 더 많은 것을 움켜쥐기 위해 달려갈수록 점점 지쳐가는 자시을 만납니다. 현실에 순응하기를 포기한 채 곁길로 들어간 아이들도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가슴이 죄어오는 답답함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 영혼의 깊은 모마름을 채울 수 있는 자리가 많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가 아이들에게 시원한 물을 공급할 우물이 되어주어야 하는데 사실 우리 교회가 아이들과 맺는 관계를 잘 분석해보면 갈증을 해소시킬 수 있는 시원한 물이 아닌 잠시 시원함을 느낄 수 있을 뿐 곧 다시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는 달디단 음료수를 내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청소년 사목자들의 마음 안에는 아이들을 향한 사랑과 관심이 가득합니다. 아이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개그 프로그램도 보고,유행어를 사용하며 아이들과의 격차를 줄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정말 심각하게 고민하고 아파하는 그들의 삶의 자리에 관해서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수능이 A형, B형으로 출제되는 것이 왜 아이들에게 심각한 고민이고 스트레스가 되는지, 아이들이 심각한 고민이고 스트레스가 되는지, 아이들이 백분위와 등급을 이야기할 때 그것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정확하게 이해를 할 수 있을까요? 아이들에게 가장 큰 고민이자 가장 힘겨운 십자가는 바로 성적, 학교, 부모님과의 관계 등입니다. 그런데 사목자가 정작 아이들의 십자가에 대해서 이해조차 하지 못한 채 피상으로만 접근 한다면 과연 아이들의 갈증을 해소시켜 줄 수 있을까요? 아이들이 사목자와 자신의 깊은 삶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아이들에게 희망이 되어주고자 한다면 그들이 삶의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해되어야 하고, 아이들의 영혼의 목마름을 만나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오종진 신부. 복수동 주임-

 

 

미사 속 숨은 보화

 

감사기도의 대화-주님께 여러분과 함께

  가장 오래된 이 전례 인사는 현행 미사 전례에서 지작 예식,복음 봉독, 감사기도, 마침 예식 등 네 번 쓰이고 있습니다. 이 인사말은 주님의 현존을 기원하거나 확인하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 가운데 감사기도는 미사의 핵심 부분이자 주님의 현존이 가장 필요한 부분이기에, 사제는 주님께서 공동체 안에 현존하시면서 사제 자신을 통하여 이 기도를 친히 바치심을 확인하고 기원하는 뜻으로 인사를 합니다. 그러면 교우들은 인사를 받아들이면서 사제에게도 진정 주님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또한 사제와 함께"라고 응답하게 됩니다.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33) - 김두한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제3편-제2부-제1장-제1절 : 첫째 계명

 

  첫째 계명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라."입니다. 첫째 계명은 다른 모든 계명의 기본이 되는, 으뜸가는 계명입니다. 만일 모든 첫째 계명은 소홀히 지키면서 다른 계명들을 열심히 지킨다 해도 그것은 무익한 일이  될 것입니다.

 

  첫째 계명은 하느님만을 믿고, 하느님께 바라고, 모든 것보다 하느님을 사랑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믿음,희망,사랑 곧, 향주덕(向主德)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심불신을 물리치고, 우리의 신앙을 기르고 지킵니다.우리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이루어지리라 희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망하지 않고,자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닫고, 그 사랑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합니다. 따라서 무관심미움은 주님의 사랑을 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럼, 하느님을 어떻게 섬겨야 할까요? 하느님을 섬기는 일은 흠숭과 예배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에 대한 흠숭은 그분을 나의 하느님으로, 창조주요 구세주로, 주님으로 모든 것의 주인으로, 사랑과 자비가 무한하신 분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알아 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는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섬기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느님께서 누구이신지 모른 채 흠숭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흠숭의 표현은 예배입니다.  예배에는 기도, 희생 제사, 약속, 서원이 포함되는데, 외적인 예배와 동시에 우리의 삶으로 흠숭해야 합니다.

 

  첫째 계명은 미신을 금합니다. 미신을 우리가 참하느님께 드려야 할 예배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미신은 우상 숭배, 점, 마술 등입니다. 우상 숭배는 하느님 아닌 것을 숭배하고 공경하는 것입니다. 잡신, 마귀, 권력, 쾌락, 인종, 조상, 국가, 재물 등이 우상 숭배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 그 무엇도 하느님처럼 섬겨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섬기고자 그 모든 것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 계명은 일방적이지 않고 상호적입니다. 우리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알아 '나의 주님'으로 섬기고,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우리의 부족함에 인내해 주시며,우리의 불충실성에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돌아가신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가장 큰 '섬김'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 20,28)

 

 

 

 

큰 사랑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용기는

작은 믿음으로 시작합니다.

 

믿음은

우리의 사랑입니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