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사도」 2013년 세계청년대회
+ 루카복음 12,49-53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린 것인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말씀의 향기>
분열과 평화- "참된 평화"-이성호 요셉 장애인사목부 전담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루카 12,49)
우리들이 하느님께 기대하는 것, 예수님께 기대하는 것은 좋은 것들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상반된 말씀을 하십니다. 세상의 평화와 일치, 화합과 공동체를 위한 희생이 아닌 불을 지르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아닌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더욱 구체적으로 한 가정 안에서도 서로 대립하고 반대하며 갈라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의 하느님, 자비의 하느님, 일치의 하느님께서는 왜 이토록 한 가정을 분열시키고 대립시키려고 하시는 것일까요?
어찌보면 평화와 분열은 서로 대립하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일치와 화합을 위한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하고 거쳐가야 할 통과의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땅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대립하고 서로 미워하고 상처주며 고통의 과정을 거쳐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희생 과정을 거쳐 이처럼 자유롭게 우리들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현재를 살아가는 상황 속에서는 평화라는 말 속에 불안과 공포라는 어두운 그림자를 보게 됩니다. 거짓된 평화, 마치 평화로운 것처럼 위장된 평화를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서로 불편해지는 것이 싫어서 같은 편인 양, 같은 생각인 양,같은 처지인 양 처신하는 평화는 오래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수박 겉핥기 식의 관계처럼 깊이가 없고 진정한 관계로 발전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평화는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강압과 처벌과 힘에 의한 평화는 오래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숨겨둔 분노는 터지기 마련이고, 꼭꼭 숨겨둔 의심과 무관심은 결국 평화를 해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대립이 발생하게 되고, 의견의 상충이 발생하며, 그 간격을 줄여가지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일치를 위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서로의 이해를 생각하고, 나 자신 내 공동체만의 이익이 아닌 우리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한걸음 물러설 수 있을 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될 것이며 진정한 평화가 올 수 있습니다.
참 평화를 맞이하기 위해 서로가 진실해져야 합니다. 거짓된 평화 속에 자신의 생각을 숨겨두기 보다는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밖으로 드러내어 참 평화를 이루었으면 합니다.
참 평화를 맞이하기 이해 서로가 진실해야 합니다. 거짓된 평화 속에 자신의 생각을 숨겨두기 보다는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밖으로 드러내어 참평화를 이루었으면 합니다.
청소년 바로보기(38)
신앙! 아이들을 살려내는 근원적인 힘 2
아이들의 모습에서 신앙이 지닌 놀라운 힘을 만나게 되는 또 다른 순간은 바로 고해성사입니다. 의무적으로 성사를 보아야만 하는 판공 때도 아닌데 자기 발로 고해소에 들어와 무릎을 꿇고 진심 어린 고백을 합니다. 고백을 듣다보면 '진짜 이 녀석이 이런 일을 했을까?'싶어 깜짝 놀랄 때도 있습니다. 세상은 이런 아이들을 문제아,비행청소년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녀석이 고해소에 들어와 진지하고 무거운 목소리로 자신의 잘못을 낱낱이 고백합니다. 그 목소리 안에는 '이리고 싶지 않은데,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거 아는데 왜 자꾸 이러는지 모르겠어요.'라는 진심어린 후회의 마음과 답답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야단을 치고, 학교에서 징계를 준다 해서 이렇게까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수 있을까요? 아마 그럴수록 이 아이들은 반항하며 거칠게 행동하기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문제아가 자기 발로 고해소에 들어와 하느님 앞에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청합니다. 이 아이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시기에 가능한 기적 같은 일입니다.
이렇게 까지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에서 근무할 때, 외박을 다녀오는 주에는 고해성사 보는 아이들이 잔뜩 줄을 섭니다. 한 달에 한 번 부모님 얼굴을 보는데 외박 나가서 부모님과 다투었고, 그래서 마음이 많이 무거웠던 것이지요. 고해소에 들어온 아이들은 나를 걱정해 주시는 부모님께 깊은 상처를 안겨 드렸다며 무거운 목소리로 고백을 합니다. 이 녀석들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습니다. 이 진심 어린 마음이 전해져 올 때면 이 아이들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과연 이 아이들의 엄마들도 이렇게 진심을 담아 성사를 보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부모님 뜻을 어기며 그저 제 멋대로만 사는 것 같고, 대화는 안 되고 그래서 답답하실 때가 많지요? 그런데 그런 녀석들이 자기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스스로 하느님 앞에 나와 진심으로 용서를 청합니다.
무엇이 아이들을 이렇게 행동하게 만들었을까요? 아이를 불러 놓고 잘못을 하나 하나 짚어가며 꾸중을 하면 이렇게 진심으로 용서를 청하게 될까요? 성당에 가는 것이 별것 아니라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신앙 안에서 성장한 아이들 마음에는 이렇게 하느님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되짚어보고, 솔직하게 잘못을 고백하며 용서를 청하는 이 놀라운 태도, 세상의 그 어떤 교육이 이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도덕교육만으로는 결코 이런 삶의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이 아이들의 가슴 안에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 살아계시기에, 하느님의 음성이 울리고 있기에 이런 진솔한 고백과 변화가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 지니고 있는 놀라운 힘이고,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삶입니다.
-오종진 신부. 복수동 주임-
<미사 속 숨은 보화>
감사기도문의 요소 - 교회 공동체의 친교
성찬은 친교와 나눔의 잔치입니다. 이 잔치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몸을 이루는 교회 공동체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종말이 오기까지는 지상교회와 천상교회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지상교회의 구성원들은 성찬을 통하여 서로 친교를 이룰 뿐만 아니라 천상 잔치를 미리 맛보면서 천상교회의 구성원들과도 친교를 이루고자 합니다. 그래서 전구를 통하여 지상과 지하의 모든 가족을 위해 기도하면서 천상 가족을 생각하고, 그들과 함께 식탁 공동체를 이룰 날을 고대합니다. 감사기도에는 이러한 요소가 감사송의 결어, "거룩하시도다", '성인 일치기원" 등에 나타납니다.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31) -김두한 신부. 가톨릭대학교 교수
제3편-제1부-제3장 -제2절 : 은총
은총은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호의이며 거저 주시는 도움입니다. 은총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자격이나 능력을 보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은총은 오직 당신의 자비와 사랑으로 조건 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은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성화 은총(聖化恩寵)으로, 하느님과 함께 살고, 하느님의 사랑을 행동할 수 있도록 우리 영혼 자체를 완전하게 합니다. 성화 은총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세례'로써 받게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우리 삶 안에서 하느님의 은혜를 생각하든, 생각하지 못하든) 늘 성화 은총 안에서 살아갑니다. 또한 이 은총은 지속적이고, 변함없이 살도록 도와주기에 '상존 은총'(常存恩寵)이라고 부릅니다. 다만 '대죄'를 짓게 되면 이 은총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는데, 고해성사로 회복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조력 은총(助力恩寵)입니다. 이 은총은 '도움의 은총'으로, 우리 안에 하상 머물러 있는 은총은 아닙니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지성과 의지를 하느님께 향할 수 있도록 우리 편에서 힘이 되어 주는 은총입니다.
비록 은총은 우리의 잠깐 기관(눈, 코, 입, 귀, 피부)으로 감지할 수 없지만, '신앙'으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곧 우리는 우리의 일상에서 은총을 받고 있다는 믿음과 신뢰를 갖고 청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의 아름다운 예를 잔 다르크 성녀의 고백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만일 제가 은총 중에 있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저를 은총의 상태에 두시기를 빌며, 만일 제가 은총 중에 있다면 저를 그 상태에 머물러 있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키는 것 역시 '은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원의를 일으키시며 일을 시작하시고, 우리의 의지를 북돋우며 일을 완성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은총은 하느님의 주도(主導)로 베풀어지지만, 더불어 우리의 자유로운 응답을 필요로 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은총에 협력하며 선행을 실천할 때, 우리는 공로(마땅히 받을 상)를 희망합니다. 엄밀히 말해 하느님 앞에 공로를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미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가 되었으니, 영원한 생명을 받을 권리를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거저 베푸신 '참된 공로'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선해에 스스로 만족하기에 앞서 마땅히 드려야 할 감사와 찬미를 주님께 봉헌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선행의 공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작은 불씨 하나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오르게 하시어
영광되게 하소서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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