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 기다림」윤용식 신부(2012)
"너희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21,36)
+ 루카 복음 21,25-28.34-36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조심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말씀의 향기>
'누가 누굴 기다리는가?" - 주님께서 더 기다리신다-나봉균 요셉 진잠 주임
'공부를 좋아서 하는 놈이 어디 있는가?'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살다 보니 그런 놈도 있었다. '공부를 좋아서 해본 기억이 별로 없는 나로서는 납득이..'묻지는 않았지만 공부를 좋아서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학업성취도를 알아보는 시험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즐거운 시간일 것이다. 언제든지 준비가 되어 있으니 시험 앞에서도 자신감과 당당함으로 충만해 있을 것이 분명하다.
시험을 준비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대림시기다! 대림(待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하시기를 기다린다는 뜻이다.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어 오심"과 '세상 끝 날에 다시 오심"을 전례 안에서 기다린다. 이때에 필요한 것은 참회,회개,속죄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누굴 기다리는 것일까? 얼핏 보면 우리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모양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정작 기다리는 쪽은 우리가 아니라 주님이시다. 우리가 주님의 오심을 그리리는 것보다 주님께서 우리가 돌아오기를 더 기다리신다는 말이다. 진정 누가 누굴 기다리는 것인지 거꾸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대림시기를 시작하는 첫날,우리는 종말론적인 말씀들을 들었다. 솔직히 두려운 생각이 앞선다. 그런데 그 와중에 귀를 쫑긋 세우게 하는 말씀들이 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라는 말씀과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라는 말씀이다. "허리르 펴고 머리를 들어라"와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이라는 말씀 속에는 자신감과 당당함이 있다.
어떻게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 종말 앞에서 엎드려 두려움에 떨지 않고,오히려 허리를 펴고,머리를 들고, 주님 앞에 설 수 있을까? 그런 자신감과 당당함은 어디서 올까? 그것은 준비된 자의 자신감이고 당당함이다. 공부를 좋아서 하지 않았다고 한들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허나 신앙생활만큼은 즐기면서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그 길로 들어오기를 주님께서 더욱 기다리시는 때가 바로 지금이다.
<청소년 바로 보기(1)>
청소년 사목 이야기
왜 우리 속담에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 한다'는 말이 있죠? 저는 이 속담을 참 재미있게 해석을 하곤 합니다. 제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종로에서 뺨을 맞고는 '내가 왜 맞았을까?"하는 고민을 함 한참을 걸어가다가 한강쯤 걸어가서야 스멀스럼 화가 치밀어 오르는 아주 소극적이고 느리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대표적인 사람이 접니다.
아주 조금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서품 이후12년간 청소년 사목만을 가슴 속에 품고 살아온 저에게 있어서 청소년에 관한 이야기를 매주 연재로 한다는 것은 참으로 신나는 작업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참으로 고통스런 작업이기도 합니다. 신난다는 것은 이렇게 소극적인 제가 누군가의 방해 없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지면을 통해 마음 놓고 실컷 할 수 있다는 것이고, 고통스런 작업ㅇ라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 속에서 이렇게 답답하고 환장할 주제가 또 있을까 싶은 생각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튼 청소년 사목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하나 해 나아감에 앞서 전체적으로 어떤 내용으로 이 이야기를 할 것인가를 간략하게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입에 거품을 물고 떠들어 댈 게 이야기가 사공을 잃고 바다로 갈지 산으로 갈지 모르는 배처럼 될 지도 모르니까요.
우선 우리 사회의 지독히 왜곡된 청소년에 대한 인식들에 대해서 먼저 짚어 볼 계획입니다.
'청소년'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우리 나라의 근현대사 안에서도 청소년들에 대한 인식을 왜곡되게 하는 과정이 있었으니까요.
두 번째 오늘날 우리 청소년들이 얼마나 아파하고 있는지, 또는 그 안에서 얼마나 용감하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세 번째로 청소년 사목에 관한 이야기를 할 계획입니다. 주일 학교를 중심으로 한 교회 안에서의 현 실태에 대한 파악과 지금까지 우리 교회가 해온 신앙 교육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고, 이어서 성당의 울타리를 넘어서 해야 할 청소년 사목에 관한 이야기를 할 계획입니다
네 번째는 청소년 사목을 위해 교회 내의 여러 협조자들과의 연계의 필요성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싶고,마지막으로 우리 청소년들을 위한 사목,즉 어린이부터 시작해서 중.고등학생,특히 고3 학생들과 대학생들,청년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청소년 사목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계획입니다.
벌써 지면이 다 되었네요. 도대체 우리 주보는 왜 이리 지면이 작은 걸까요? 아무튼 그럼 다음 주부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박진홍 신부.청소년사목국장
<미사 속 숨은 보화>
신앙고백:
신앙고백은 언제부터,왜 유래되었나요?
신경은 지역과 전례에 따라 여러 양식으로 발전하였는데,그 중에서 오래된 것은 2세기경의 예루살렘 세례신경으로 추측됩니다. 그러나 현존하는 신경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3세기 초엽 히뽈리또 교부가 저술한 책「사도행전」에 수록된 세례고백문입니다. 이 신앙고백이 미사 중에 도입된 것은 5세기 후반으로서 당대 교회가 미사에 신경을 도입한 가장 중요한 동기는 그리스도의 천주성을 부인하던 아리아니즘 이단을 막고 믿음의 기본 도리를 확고히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과거부터 우리의 신앙을 확고히 하기 위해 고백되어 온 신경을 미사 중에 다시 고백하면서 흔들리지 않는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해야겠습니다.
'하느님의 종' 125위 단상(47)김정환 신부 . 내포교회사연구소장
평범해서 정이 가는 분들 :이태권,정태봉
이태권 (베드로) |
1782년 충청도 홍주 출생 1839년 5월 29일 전주에서 참수(57세) |
정태봉 (바오로) |
1796년 충청도 덕산 출생 이태봉과 함께 순교(43세) |
순교자들을 떠올리면 모두 강인한 분들인 것 같지만 그분들 역시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매 맞으면 아파하고,정에 이끌려 마음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인간인지라 때로는 신앙을 등지거나 버리기도 하며 나약함을 극복해 간 어찌 보면 평범한 분들인 경우가 많다.
이태권(베드로)은 이런저런 나약함을 여러 번 경험한 분이다. 아홉 살이던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고,10년 후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아버지와 함께 체포되었다가 풀려났으며,그 다음해에는 삼촌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풀려나는 등 세 차례나 배교하고 풀려났다.
그가 직접 쓴 기록을 보면 참으로 인간적이다. 두 번째 체포되었다 배교하고 풀려나는 과정을 이렇게 써 놓았다.
"한편 나는 오직 먹을 것만 생각했고. 나의 온 바람은 목숨을 보존하는 데만 쏠렸다.. 영장은 나를 석방하면서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앞으로 또 그렇게 하겠느냐?'이 말을 두세 번 되풀이하여 묻는데,고통으로 인하여 온통 정신이 없던 나는 간신히 이성을 찾고는, '다시는 그러지 않겠씁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나의 석방을 축하해 주느라 저녁에 진수성찬이 나왔는데,예전엔 오직 먹을 것만 생각했던 내가 단 한 숟갈도 삼킬 수가 없었다."
이태권은 매를 맞으면 고통에 못 이겨 배교후 풀려나고,그러나 나서 집에 돌아오면 마음이 아파 슬퍼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이런 과정을 여러 번 거치고 나서 1827년 다시 체포되었을 때 마음을 굳게 먹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는 흔들림 없이 신앙을 고백하였고, 12년간 옥에 갇혀 있다가 1839년 5월 29일 전라도 전주에서 57세의 나이로 순교교하였다.
이태권과 함께 순교한 정태봉(바오로)에게도 평범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충청도 덕산에서 태어난 정태봉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5촌 당숙의 손에서 자랐다. 자립할 나이가 되어 전라도 용담고을로 이사하여 살다가 3년이 되던 1827년 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되었고, 신앙을 고백한 후 이태권과 함께 12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배교 한 번 하지 않은 정태봉을 보면 강인해 보이지만 그에게도 나약한 구석이 있었다. 바로 가족들이었다. 사형 판결이 내려졌을 때 혹시 가족들로 인해 마음이 약해질세라 그는 옥졸들에게 부탁하여 아내와 아이들이 형장에 오지 말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리고는 이태권과 함께 4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이런 평범한 모습에서 더 정이 가는 것은 나 자신이 그렇게 나약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리라.
내 영혼이
깨어나
기도하게 하시어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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