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2년 주보

연중 제32주일 2012년 11월 11일(나해)

모든 2 2021. 4. 26. 23:40

「참된 봉헌」황영준 신부(2012,아씨시)

"행복하여라,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화답송中)

 

 

+ 마르코 복음. 12,38-44<또는 12,41-44>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드를 조심하여라.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말씀의 향기>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봉헌 "사랑과 정성을 다하여" - 이화상 요한보스코 계룡 주임

 

  오직 세상 것에만 온갖 관심을 쏟아 부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은 하느님의 눈에 어떻게 비추어질까요? 아마 실망하는 눈빛이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눈에 흐뭇하게 비추어지는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가난한 과부의 모습에 간직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셔서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을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때 많은 부자들이 어깨에 힘을 주며 당당하게 들어오더니 자랑스럽게 큰돈을 넣으며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때,고개를 푹 숙이고, 축쳐진 어깨에 깊은 한 숨을 몰아쉬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굶기를 밥 먹듯이 하였을 과부에게 봉헌이라고 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오랜만에 렙톤 두 닢이 생겨 헌금을 할 기회가 주어졌던 것입니다.

 

  렙톤 두 닢,작은 금액이지만 사실 과부에게는 엄청나게 큰 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순간 여러 가지 생각들이 그 여인의 머릿속을 오고갔을 것입니다. "이 돈을 다 내면,오늘도 또 굶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집에 있는 아이들은 어떻게 하지?"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정성,자신의 삶 전체가 담겨 있는 소중한 돈을 아주 정성껏,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께 봉헌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과부의 봉헌을 높이 평가하시며 칭찬을 하십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곧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3-44)

 

  오늘도 우리는 봉헌을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봉헌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요? 혹시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봉헌이 아니라,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한 봉헌은 아닌지요?

 

  그러기에,우리에게는 가난한 과부와 같은 봉헌을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봉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정성이기 때문입니다. 내게 있는 가장 소중한 것,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결실 중에서 가장 값진 것,내 삶 전체를 하느님께 바친다는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합니다. 바로 이런 봉헌을 할 중 아는 자녀의 봉헌을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봉헌을 하는  자녀들이 되어 보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해(6)>

 

새로운 복음화의 목표 하느님 나라

 

  예수님의 선포에서 핵심이 되는 말은 '하느님 나라'이다. 하느님 나라는 어떤 사물,사회 구조나 정치 구조,유토피아가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 존재하신다는 것,하느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하느님이 현존하시며 세상에서,우리의 삶 안에서 ,나의 삶 안에서 활동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세상 저 멀리에 있는 궁극적인 원인이 아니다. 하느님은 이신론(deism)에서 말하는 "위대한 건축가",곧 세상이라는 기계를  창조했지만 더 이상 그것에 관여하지는 않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은 내 삶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역사의 매순간에 현존하시는 결정적인 실재이시다.

 

 신학자 메츠가 고백하듯이,이 시대의 진정한 문제는 "하느님의 위기"이다. 공허한 종교심으로 가려진 하느님의 부재이다. 우리는 하느님에 관해 하느님과 함께 말하는 것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인간에게 필요한 한 가지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이 존재 하시든 존재하시지 않든,모든 것은 변한다. 안타깝게도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종종 마치 하느님이 존재하시지 않는 것처럼 살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으시고, 설령 존재하시더라도 제자리에 계시지 않는다'는 구호에 따라 살고 있다.

 

  그러므로 복음화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에 관하여 말하고 하느님을 유일한 참 하느님,곧 창조주,성화주,판관으로 선포해야 한다. 우리는 실질적인 면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느님은 말만으로는 알려질 수 없다. 한 사람에 관해 간접적으로 들어 안다면 그 사람을 정말로 아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을 선포하는 것은 그분께 기도하는 것이다. 하느님에 관해 말하고 하느님과 말하는 것은 항상 함께 가야 한다. 이런 까닭에 기도 학교,기도 공동체가 그토록 중요하다. 개인기도와 준전례 공동기도(대중신심),전례 기도 사이에는 상호 보완성이 있다. 전례는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다. 전례의 특수성은 그 최우선 과제가 사적 기도와 대중 신심에서처럼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 그분이라는 사실에 있다.

 

  전례 성사들은 살아 계신 하느님을 전하는 일 다음에 오는 부차적인 주제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깨닫는 일이다. 전례는 전례를 거행하는 사제나 전문가 집단의 발명품이 아니다. 모든 세대의 신앙 체험이라는 결실을 맺는 장소로서 전례다.설사전례 참가자들이 낱말 하나하나를 모두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그들은 심오한 의미,현존하는 신비를 감지하며,그것은 모든 말을초월한다. 전례를 거행하는 사제는 전례 행위의 중심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신하여(in persona Christi)말한다. 전례를 거행하는 사제의 믿음이 중요한데,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가 비쳐 보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곽승룡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미사 속 숨은 보화>

 

강론①: 신앙의 신비와 그리스도인 생활규범에 대한 가르침

 

  "강론"이라는 말은 그리스어의"호밀리아(Homilia)"를 번역한 말로 아버지가 자녀에게,스승이 제자에게 대화형식으로 하는 이야기를 뜻합니다. 미사에서 "강론"이란 전례력의 흐름에 맞추어 신앙의 신비와 그리스도인의 생활규범을 성서를 바탕으로 설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사경본 총지침에서는 강론의 내용에 대해 "그날 봉독한 성경의 내용 또는 그날 미사의 통상문이나 고유 전례문에 대한 설명이어야 하며,듣는 사람들의 특수한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65항)."고 가르칩니다.

 

 

'하느님의 종' 125위 단상(44) 정환 신부 . 내포교회사연구소장

 

 

호랑이와 더불어 기도하신 분-김대권(베드로)

 

김대권
(베드로)
1839년 5월 29일 전라도 전주에서 참수(나이 미상)

 

  조선시대 신자들의 상당수가 산골에 살다보니 호랑이와 관련된 일화가 많다. 1866년 병인박해가 한창일 때 안드레아라는 분은 프랑스 신부님과 함께 피난하다가 호랑이를 만났다. 어둔 밤 갑자기 큰 소리가 들리고 호랑이가 바로 흙과 돌을 굴러 내리며 자기의 영역임을 알려왔다. 호랑이가 담배를 무서워한다는 속설에 따라 그는 담배를 피우면서 신부님에게 말을 건네기를,"이상 하지요, 박해 때는 호랑이가 겁이 안나요."하며 가던 길을 갔다. 천주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건 행위였던 때였으니 무엇이 더 겁이 나겠는가!

 

  오늘 소개하는 김대권(베드로)이야말로 호랑이와 인연이 많은 분이다. 충청도 청야의 수단이에서 태어나 보령의 청라동에 살았던 그는 일찍부터 신앙을 가졌다. 결혼하여 아내와 함께 공주의 옹기점에서 살았는데 처음에는 사이가 좋지 않아  싸움이 잦았다.

 

  하루는 싸움을하고 자기는 방에서 자고 아내는 부엌에서 잠을 자던 중에 어떤 음성을 듣고 잠에서 깨었다. 김대권은 이것을 하느님의 음성으로 알아들었는데 나가보니 아내가 막 호랑이에게 물려가고 있는 중이어서 겁도 없이 뒤따라가 아내를 구했다. 아내는 다리만 심하게 다쳤을 뿐 목숨을 건졌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둘은 평생 동안 사이좋게 지냈다.

 

  김대권은 사순절이 되면 40일 동안 하루 한끼 만 식사를 하는 엄격한 단식재를 지켰고,성탄절을 앞두고서는 복음서와 몇명 서적들을 가지고 산으로 들어가 기도에 전념하였다. 한번은 밤을 새워 기도하는데 큰 호랑이 한마리가 멀지 않은 곳에 와서 앉아 으르렁거렸다. 그런데도 계속 기도를 했고 날이 밝아 산을 내려오자 그때서야 호랑이도 물러갔다.

 

  1827년 박해가 일어나자 김대권은 전주로 잡혀 갔고 신문을 받을 때 영장이 신앙을  버리라고 하자,"매질로 죽게 된다 하더라도 하느님을 부인할 수 없으며,이 생각은 제 살 깊숙이 스며들어 있고 제 뼛속 깊이 젖어 있습니다. 그러니 제 살을 잘라내고, 내 뼈를 으스러뜨리더라도 제 대답은 똑같습니다."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더욱 혹독한 형벌을 받았고, 12년이라는 오랜 감옥 생활 끈에 1839년 5월 39일 전주에서 참수되었다.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것이 곶감이라는 옛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 말이 딱 맞는 듯하다.곶감처럼 달콤한 유혹들이 오히려 더 하느님을 몰라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웃은

또 하나의

나입니다.

 

글.그림 이순구 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