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2년 주보

그리스도왕 대축일 2012년 11월25일(나해)

모든 2 2021. 4. 26. 23:43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36)」이영배.대전가톨릭사진가회(2012)

"그 나라는 진리와 생명의 나라요.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이며,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이옵니다."(감사송中)

 

+ 요한 복음 18,33-37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그때에 빌라도가 예수님께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 준 것이냐?"하고 되물으셨다.

"나야 유다인이 아니잖소? 당신의 동족과 수석 사제들이 무슨 일을 저질렀소?"하고 빌라도가 다시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빌라도가"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하고 묻자.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말씀의 향기>

 

이스라엘의 왕 나자렛 예수  "섬김의 왕" -박요순 베드로 가정사목 전담

 

  오늘은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주간의 첫날이,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우리 모두는 시작이요 마침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어 모든 만물을 완성하실 하느님의 나라를 희망이며,하느님으 나라가 바로 우리들 삶의 자리에서 시작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리스도 완 대축일을 지내며 두 가지의 단어를 떠올려 봅니다. '왕'과 '마지막'이라는 단어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스라엘의 왕 나자렛 예수'라는 명패가 붙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왕'이란 어떤 존재일까요?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권력과 큰 힘을 가진이,세상의 모든 것을 자신이 마음 먹은 대로 하는 이,말 한디면 모든 것을가능케 하는 이,모든 이가 그의 힘과 권세에 복종하도록 이끄는 사람..

 

  사실 주님이신 예수님께 부여된 '왕'이라는 칭호는 앞의 개념과는 분명 다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삶,그분의 행적들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앞서 표현된 '왕'과는 달리 그분은 진정으로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위한 사랑과 봉사,섬김의 왕(임금)이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마지막'이라는 단어입니다. 일전에 깊어 가는 가을의 정취를 느끼고자 가까운 산을 찾았습니다. 오랜만의 산행이라 몸도 피곤하고 힘들었지만 맑은 공기를 원없이 들이마시고,산행하는 모든 이를 반겨주는 듯한 산새들의 지저귐에 흥도 나고,오색칩으로 물들여져 가는 산을 바라보며 그 빛깔과 풍경이 너무도 아름다워 감탄사를 남발하기까지 했습니다.

 

  순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우리들은 이 가을의 멋진 풍경처럼 과연 주님께서 보시기에 흡족할 만한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는지,올 한 해는 어떤 결실을 맺을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던져 봅니다.

 

  "사제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만들어져 가는 것이다."비단 사제만이 아닌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비록 지금은 나약하고 모나고 실천에 미약한 우리들이지만 주님께서 진정 보여주신 사랑과 봉사,섬김의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하 ㄹ때 분명 우리들은 주님의 사랑과 은총 안에서 변화될 것이고 성숙한 신앙인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입니다. 새로이 시작되는 한 해는 진정 예수님을 닮은,예수님의 제자로 늘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신앙의 해(8)>

 

새로운 복음화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2008년 세계주교대의원회에서 프랑스의 어떤 주교님은 자신이 로마 성서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성경 전문가이지만,말씀의 힘이 얼마나 크고 현실에서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가를 체험한 것은 그 학교가 아니라,가난하고 고달프게 살아가는 서민들,평시도들의 삶이었다고 말씀하셨다. 그 주교님은 어렵게 살아가는 그들의 빛을 발견해 난관을 헤쳐갈수 있도록  인도하신다는 신앙고백을 하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가난한 이들이 주교인 자신을 "복음화시켰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우리는 일상의 생활에서뿐 아니라,하느님을 향해 가는 영적 여정에서도 서로 손잡아 이끌어 주고 도와서 함께 가야만 목적지에 무사히 도달하게 되어 있는 신앙의 존재들이다.

 

  그리스도교는 어떤 종교일까? 두말할 것 없이 우리는 '사랑의 종교'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신앙 체계와 개념이 그리스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스 문화에서는 '아는 것' 곧 진리의 앎이 중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 문화에 따르면 진리에 대한 무지는 죄이고 악이다. 그러나 그 문화의 한계는 '아는 것이 병이 되어버리는 것'즉 교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 철학에서 종교로 넘어간 이스라엘의 신앙모습을 보면,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중심이 되었다. 그들은 율법계명과 제사를 지키면서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살아갔다. 그런데 그리스도 신약의 공동체는 그리스 철학의 진리를 '아는 것'과 구약의 하느님을 '믿는 것'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신앙의 핵심으로 고백하며 살아갔다.

 

  그러면 그리스 철학의 중심인 모든 것을 참으로 알면 잘 사랑할 수 있을까?혹은 구약 신앙의 중심인 상대방을 진정으로 믿으면 사랑을 잘할 수있을까? 그럴 수 있지만 반대로 그것들이 장애가 되기도 한다. 너무나 잘 알고 믿기 때문에 심층 안에서 사랑하지 않고 표층에 남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예수님은 그것을 잘 파악하셨는지 그래서 신약의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아'는 유언을 남겨 주셨다.

 

  하지만 우리는 빌라도처럼 권력이나 힘이 사랑이라는 어려운 숙제를 대체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느님이 되어 버리는 것이 더 쉬울지 모르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 더 쉬울지 모른다. 생명을 사랑하는 것보다 생명을 소유해 버리는 것이 더 쉬울지 모른다. 주님의 나라는 권력이 아니라 십자가로 지배되는 왕국이다. 그 왕국이 바로 여기 사랑의 십자가에 있다. 그 십자가의 삶은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마태25,40)이 그 나라에 들어가는 관문인 십자가 사랑의 삶이다. 새로운 복음화는 이웃을 위해 십자가의 사랑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동안 좋은 글을 집필해 주신 곽승룡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곽승룡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미사 속 숨은 보화>

 

신앙고백:'저는 믿나이다.'

 

성경 봉독과 강론을 통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셨다면,뒤이은 신앙고백은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응답과 같은 것입니다. "신경"은 라틴어 경문의 첫 글자를 따서 "그레도"(Cred0)라고 부르며,그 내용은 가톨릭교회 전통 안에서 축약된 대표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조목을 담고 있습니다. 신앙고백문은 초세기의 세례 때의 신앙고백문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데 미사 중에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세례성사 때의 결심을 갱신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신앙고백 후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잔치인 성찬례에 참석하기 때문에 성체를 받아 모시기 전에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고 강화하며,고백하는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종' 125위 단상(46) 정환 신부 . 내포교회사연구소장

 

수만 마리 참새들이 재잘대며 '거룩하시다."

:김조이,이봉금,심조이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1789년 청청도 덕산 출생
1839년 10월 전주에서 옥사(50세)
이봉금
(아나스타시아)
1839년 12월 전주에서 순교(12살미만)
심조이
(바르바라)
1813년 경기도 연천 출생
1839년 11월 전주에서 옥사(26세

 

  충청도 덕산 출신의 김조이(이나스타시아)는 성격이 완만하여 신아을 갖기 전에도,그 후에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그녀에게 딸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이봉금(아나스타시아)ㅇ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봉금이는 12살이 채 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포졸들이 이렇게 어린아이들은 잡아가지 않는데 웬일인지 봉금이는 예외였다.

 

  평소 딸에게 좋은 표양과 가르침을 주던 어머니 김조이는 끝가지 신앙을 지켜 딸에게 모범이 되었다. 그런데 딸이 문제였다. 나이가 너무 어려 포졸들이 체포를 해놓고도 막상 어찌할 수가 없었다. 봉금이를 심문하던 관장은 아이가 어떤 방식으로든 조금이라도 신앙을 버리겠다는 의사를 밝히면 놓아 주겠다고 하였지만 봉금이의 대답은 당돌했다.

 

  "일곱 살이 되기 전에는 철도 없고 글을 읽을 줄도 모르고 아무것도 몰라서 하느님을 잘 섬길 수가 없었지만,일곱 살 때부터 저는 하느님를 섬기고 흠숭해 왔는데 어떻게 오늘 그분을 부인하라고 하십니까?"

 

  결구 이 어린아이에게 매질까지 하였지만 끝내 배교 의사를 밝히지 않자 죽이기로 결정하였다. 같이 사형판결을 받았으나 어머니 김조이는 형벌로 인한 여독으로 먼저 죽음을 맞았고, 딸 봉금이는 옥에서 한밤중에 몰래 교수형에 처해졌다.

 

  전주 옥에 갇혀 있다 순교한 심조이(바라바라)역시 자기 자식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간 분이다. 머리가 나빠 교리를 배울 때에 애를 먹었지만 신자가 된 후 누구보다 좋은 표양을 보이더던그녀는 박해가 일어나자 세 살짜리 아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아이가 있어 마음이 약해질 법도 한데 그녀의 대답은 한결 같았기 때문에 형관은 다음과 같이 보고서를 올렸다.

 

 "심조이는 시아버지에게 흉악한 법(천주교)을 전수받았고..7년 동안 강론하고 익힌 것이 이미 오래되었고,십자가에 맹세한 계율을 바꿀 수 없으며,죽더라도 후회하지 않는다 하니 죽여도 아까지 않습니다."

 

  결국 심조이는 1839년 11월 11일 2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는데 그녀의 세 살베기 아들도 같은 날 몇 시간 후에 숨을 거두었다.

 

  옥에서 어머니와 함께 운명을 같이한 두 아이들을 보며 어린이 성가의 가사가 떠오른다."..수만마리 참새들이 재잘대며 거룩하시다."추수를 앞둔 농부의 입장에서 보면 참새들의 소리는 낱알을 까먹는 귀찮은 소음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노래를 작곡한 사람은 그 소리를 찬미의 지저귐으로 들었다. 참새 같은 두 아이들,김조이의 어린 딸과 심조이의 세 살배기 아들의 죽음을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보셨을까?

 

 

닳아진

삶을 위해

큰 손 내밀어 주소서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