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김택민 신부(2012)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입니다."(야고 1,17)
+ 마르코복음 7,1-8.14-15.21-23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그때에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불륜,도둑질,살인,간음,탐욕,악의,사기,방탕,시기,중상,교만,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말씀의 향기>
너희는 나를 헛되어 섬김다 -하느님의 계명 "사랑" -오남한 루카 관평동 주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예외없이 양면성이 있습니다. 실로 우리네 믿는 신앙이 참된 진리요,그 진리가 자유롭게 함을 잊은 채로,우리는 온갖 가식과 위선,불의와 부패 속에서 분별없이 살아가고 있으며,그렇게 생명력을 상실한 채로,죽음의 함정으로 서서히 빠져 들고 있습니다.
예수님시대의 바리사이들은이랬습니다. 바리사이들은 한결같이 이기주의자였고 잘난 체하는 자들이었고,겉으로 경건하게 보이도록 걸어 다니는 자들이었습니다. 또한 이들은 정결례법을 지키기 위해 일어나자마자 손과 얼굴,입을 씻었으며,만약 악몽을 꾸었다면 반드시 목욕을 해야 했고, 또한 음식을 먹을 때는 반드시 규정대로 적어도 하루에 일곱 번씩은 손을 씻어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바라사이들은 율법에 대한 외적인 준수에 집착한 나머지,구원은 율법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선인(善人)이요,이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모두 악인(惡人)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때문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계명과 사람의 규정을 구분하십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형식적인 율법준수가 아니라,사랑이며 자비여야 한다고 말입니다. 유다인들은 율법이 거룩한 것이며,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율법의 본질을 왜곡하여 형식적인 율법 준수에 빠지고,사람들을 억압하는 멍에로써 부조리를 낳았기에,예수님은 거침없이 바리사이들을 비판하면서 이념화 되어버린 잘못된 율법준수에 이의를 제기하시며 정면으로 도전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은 외적인 형식에 치중된 조상들의 전통 준수보다는,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사랑의 실천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고.
그렇다면 우리네 믿는 이들에게도 율법과 계명에 대한 진실성이 없을 때,그저 타성에 빠져 형식적으로만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만 할 뿐,하느님을 본마음으로 진실되이 받아들이지 않을 때,그러한 신앙은 위선적인 신앙이고,바리사이적인 신앙으로써 예수님의 비판을 모면하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노년에 대한 단상>
노년의 이미지
노인복지론 수업 첫 시간에 노년기 혹은 노인이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단어나 상황 등을 질문해 보면 학생들의 답변에는 정,자애로움,따뜻함,경륜,집아의 어른,지혜 등과 같은 긍정적 내용도 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답변이 힘없고 약한 존재,보호대상,외로움,완고함,고물이나 파지 줍는 모습,치매 등의 부정적 단어나 상황이다. 일반 사회에서 접하게 되는 노년의 아미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노년기를 쇠퇴와 상실로 규정하는 고정관념과 더불어 노인을 의존적이고 부담을 주는 존재로,사회적 약자로,보호대상으로 묘사한다.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노녀기를 영위할 수 있는 활동성과 생산성을 갖춘 신노년 인구가 급증하고 있다지만 아직도 많은 노인관련 담론들이 노인은 가난하고,유병장수의 고통을 겪으며,가족과 사회가 부담스러워하는 주변적은 존재로 살아간다는 노년의 그늘을 강조한다.
고정관념으로 인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대세지만 문화산업이 제공하는 비현실적인 노년의 이미지도 있다. 광고와 미디어에 나오는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질수하거나 스카이다이빙이나 암벽등반을 하는,동안대회본선에 진출학나 바디 빌더로 탄탄한 근육을 자랑하는 노인의 이미지는 영원한 중년과 같은 공상적 노년을 꿈꾸게 만든다. 성공한 노인의 이미지를 중년의 연장으로 규정하는 것은 부정적 고정관념보다 더 대부분의 노인들을 소외시키는 현실적 괴리감을 주는 이미지이다.
전통적으로 경로효친을 중요한 사회적 덕목으로 규범시해온 한국 사회지만 최근에 발표된 세계 가치관조사결과는 우리나라 노인들이 현실적으로 제대로 존경받지 못하고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요즘 노인들이 크게 존경받지 못한다'는 항목에 81.1%의 응답자가 '그렇다'고 답했는데 이는 조사대상 13개국 중 가장 높은 비율이라고 한다. 노인을 사회적 약자로,노년기를 보호받아야 하는 시기로 보는 이미지가 사회 내에 지배적이라면 노인은 진정한 존경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그동안 부정적인 노년의 이미지를 변화시키기 위한 사회적 노력이 없지는 않았다. 드라마와 시사교양 프로그램 같은 방송에서 노인 이미지를 모니터하는 노인보호 모니터단 활동이라든지 노인복지관 주도로 전개되고 있는 긍정적 노인 이미지 형성을 목적으로 "받는 노인문화에서 주는 노인문화"를 주창하는 신노인 문화운동 등이 그 일환이다. 이러한 사회적 시도는 보다 더 적극적으로 확대되어햐 한다. 고정관념적 노인 이미지의 피해는 현 세대 노인뿐 아니라 앞으로 노년을 맞이할 모든 이가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맞게 되는 노년이다.
-최애경 안나.충남대학교 사회보지학과 교수-
<미사 속 숨은 보화>
말씀전례:
⑤독서와 복음은 몇 년 주기로 반복되나요?
말씀전례의 독서와 복음은 주일에는 3년 주기로,평일에는 2년 주기로 반복됩니다. 이렇게 배분된 독서는 하느님의 구원역사를 위한 중요한 부분으로서 1년간의 교회력에 맞게 배분되어 예수님의 강생과 부활에 이르기까지의 행적과 가르침을 선포하게 됩니다. 또한 성인의 축일 등 특별한 미사에서는 독서와 복음을 다양하게 선택하여 그 날 주제에 맞게 미사를 봉헌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독서와 복음의 배분을 통해 그리스도의 권 신비를 모든 교회에서 같은 날에 기념하고,그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양육되어 집니다.
'하느님의 종' 125위 단상(35) 김정환 신부 . 내포교회사연구소장
이시임(안나)-종악이 엄마
이시임 (안나) |
1782년 충청도 덕산 출생 1816년 경상도 대구에서 참수(34세) |
이시임(안나)은 조선시대 천주교 신앙을 가진 여인이 격어야 하는 웬만한 고생은 다 경험한 분이다. 충청도 덕사에서 출생하여 경상도 대구에 이르러 참수를 당할 때까지의 멀고 긴 여정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그녀는 덕산 높은뫼(충남 예산군 고덕면 봉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열심한 신앙생활을 한 그녀는 성인전에 나오는 성녀들처럼 동정을 지키며 살기를 원했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여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것이어서 그녀가 나이가 차도 결혼을 하지 않자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더 이상 동네에 살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이사임은 몇몇 동정녀들이 살고 있는 먼동네로 떠나기로 했고 박씨 성을 가진 천주교 신자 뱃사공이 길을 안내하여 데려갔다. 그런데 그때가지 장가를 가지 못한 그 뱃사공이 마음이 변하여 강제로 자기 아내로 삼아버렸기 때문에 이시임의 뜻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 남편은 몇 해 지나지 않아 죽었고 이시임은 '종악'이라 불리는 아들을 혼자 기르며 살았다.
언제부터인가 이시임은 진보 머루산(경북 영양군 석포면 포산동)교우촌으로 가서 살았는데 사람들은 그녀를 '종악이 엄마'라고 불렀다. 18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나자 그녀는 동네 교우들과 함께 잡혀 안동을 거쳐 대구로 이송되었다. 의지할 곳이 없던 4살짜리 아들 종악이도 함께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고 굶주림으로 인해 종악이는 감옥에서 죽고 말았다.
험난한 인생의 여정도,아들을 잃은 고통도 그녀의 의지를 꺾지 못하였으니 이시임이 참수를 당할 때의 광경이 더 잘 말해준다. 1816년 12월 19일 집행된 대구의 사형장에는 다른 6명의 교우들이 함께 있었는데,먼저 남자 교우들을 죽이고 나서 영장이 말하였다.
"이 남자들은 이제 막 사형에 처해졌지만 너희 여자들은 남자들과 다르다. 지금이라도 단 한마디만 말하라. 그러면 내가 너희들을 풀어주겠다."
이시임은 대답하였다.
"어떻게 이토록 기본 원리를 모를 수가 있습니까? 당신 말에 의하면 남자들은 그들의 부모,즉 하느님을 공경해야 하고,여자들은 공경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인데 어디서 그런 원칙이 나옵니까? 여러 말들이 다 소용없습니다. 저는 단지 영장께서 법에 따라 저를 다루시기를 바랍니다."
동정생활의 본질은 '하느님를 향한 갈라지지 않는 마음'에 있다. 이시임은 세상의 온갖 질곡 속에서도 그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것이
더 소중한
간절함이나
가치일 수 있습니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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