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1년 주보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 2011년 7월 3일 (가해)

모든 2 2021. 4. 6. 23:08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2009),이진욱 신부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돕고,아울러 주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환난을 앗기까지 기다리라. 혹 무슨일이

있을지라도,부디 삼가고 극진히 조심하야 위주 광영하고 조심을 배로 더하고 더하여라."(김대건 성인 옥중서한 중)

 

 

 

  +  마태오 복음 10,17-22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 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말씀의 향기>

 

  당당하게 복음 선포를!  "나는 천주를 위해 죽습니다."  -안상길 사도요한. 천안오룡동 주임

 

  오늘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를 기념하는 경축 이동 대축일입니다. 그분의 삶에 대한 것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만 오늘은 신부님이 순교하시기 직전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과 편지 내용을 가지고 잠깐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죽음을 앞두고 옥중에서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이렇게 신자들을 위로했습니다. "주께서 성교(聖敎)에 말씀하시되 '작은 털끝이라도 주께서 돌아보신다.'하고,'모르심이 업이 돌보신다.'하였으니,어지 이렇듯이 군난이 주명(主命)이 아니면 주상 주벌(主賞主罰)아니랴."

 

  신부님이 생애의 마지막 편지에서 인용한 성서 구절은 바로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 10,30-31)는 말씀이죠.

 

  바로 하느님께서 하찮은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까지도 다 주간하고 계시며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아끼시는데,하물며 목숨을 바쳐 그분을 증언한 이를 잊으실 리 없고 아끼지 않으실 리 없다는,김대건 신부님의 영원한 상급에 대한 확신의 말씀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입국하면 잡힐 줄 뻔히 알면서도 용감하게 들어와 양떼를 이끌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구 잡히시어 사형을 받게 되셨는데,그때 신부님은 서슬이 퍼런 망나니의 칼 앞에서도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나는 천주를 위해 죽습니다.여기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됩니다. 여러분들도 죽은 다음 영원한 행복을 얻고자 생각하시면 천주교 신자가 되십시오."

 

  그야말로 '밝은 데서 말하고,지붕 위에서 외치신'분입니다.(마태 10.27 참조) 아니 뭇사랑에 둘러싸이고 지붕보다 더 드러나 있는 무서운 형장 한복판에서 그는 주님에 대한 믿음을 자랑스럽게 외쳤고,특히 자신에게 칼을 들이대는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알아야 한다고 증언한 것입니다. 참으로 용맹하신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사이 주님을 증거해야 할 신앙인들마저도 세상이 그러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식으로 그저 세속에 편승해서 살기 쉬운 세상입니다. 나 자신의 조그만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 포기하고 싶기만 한 세상입니다. 하지만 오늘 김대건 신부님의 천상탄일을 기념하는 우리,이럴수록 신부님을 본받아 용기를 내어 그분의 후손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고,당당히 복음을 외쳐야 하는 것이 아닌가?생각해 봅니다.

 

 

 

<교회의 선교사명>

 

선교 개념 이해

 

  선교(宣敎)는 라틴어 Missio를 번역한 말이다. Missio는 '보내다','파견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동사 Mittere의 명사형으로 '파견','사명'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 Missio를 선교로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Missio와 같은 의미의 히브리어가 구약성서에서도 자주 사용된다. 야훼 하느님이 구원의 사명을 부여하여 파견하는 문맥에서 사용되는 것이다.

 

  천사들이 파견된다. "보라,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 너희는 그 앞에서 조심하고 그의 말을 들어라. 그가 너희 죄를 용서하지 않으리니,그를 거역하지 마라. 그는 내 이름을 지니고 있다."(탈출 23,20-21)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이 파견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시어,여러분을 위하여 자손들을 이  땅에 일으켜 세우고,구원받은 이들의 무리가 되도록 여러분의 목숨을 지키게 하셨습니다."(창세 45,7:요셉) "나는 모세와 아론을 보내어,이집트 가운데에서 그 모근 일을 하여 그곳을 친 다음, 너희를 이끌어 내었다. 내가 너희 조상들을 이렇게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었다."(요호 24,5-6:모세와 아론) "내일 이맘때에 벤야민 땅에서 온 사람을 네에게 보낼 터이니,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워라. 그가 내 백성을 필리스티아인들의 손에서 구해 낼 것이다. 나는 내 백성이 고생하는 것을 보았고, 그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1사무9,16:사울) "너의 그 힘을 지니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족의 손아귀에서 구원하여라. 자로 내가 너를 보낸다."(판관 6,14:기드온)

 

  예언자들이 파견된다. "너희 조상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 모든 종들,곧 예언자들을 날마다 끊임없이 그들에게 보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나에게 순종하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다."(예레 7,25-26) "주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예언자들을 보내셨다. 이 예언자들이 그들을 거슬러 증언하였지만,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2역대 24,19)

 

  구약성서에서 선교는 야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한 사명을 부여하여 파견하시고, 파견된 자가 그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선교를 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인류구원 사업에 참여하는 것으로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전하는 것이다.

 

  -김영근 신부.논산대교동 주임-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

 

 

가위질,풀칠,그리고 사랑법

 

잘라내야 하는 걸 잘라내고,

붙여야 할 걸 붙여내고...

 

 

  코흘리개 시절 미술시간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선생님이 나무를 그려보라 하셔서 모두들 열심히 나무를 그리고 있었죠. 그림을 거의 완성한 상태에서,나뭇가지 위에 멋지게 나뭇잎을 막 그리려는데 한 친구가 장난으로 제 어깨를 툭 치고 도망갔습니다. 그 결과 나뭇잎은 볼품없이 나무 아래 땅 바닥에 삐뚤게 낙서처럼 그려지고 말았습니다. 아이들은 깔깔거리고 웃으며 놀려댔고 그럴수록 제 얼굴은 자꾸만 빨개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선생님께서 제 그림을 보시면서 큰 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와,나무 아래에 낙엽까지 그렸네! 정말 멋진 걸!" 실수로 그려진 낙서를 낙엽으로 만드셨던 그분의 지혜... 그때부터 미술 시간이 기다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간은 어떤 실수를 해도 두렵지 않은,어떤 아이도 비교 되지 않는 참으로 자유로운 행복의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신 또 하나의 지혜가 '가위질'과 '풀칠'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색종이를 오릴 때마다 선생님은 한 번의 가위질이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잘라 내고 남은 부분을 칭찬하시기보다, 잘려 나간 부분들에 대한 아픔을 먼저 가르쳐 주셨죠. 정말 그 만큼 꼭 잘라냈어야 하는지,한번 잘라내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는 걸 성찰했는지 묻곤 하셨습니다.

 

  풀칠에 대해서는 두 개를 하나로 보이게 할 수 있는 깔끔함이 대해 강조하셨습니다. 단지 떨어지지 않게 붙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조화롭게 연결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하신 겁니다.그래서 우리들은 풀칠을 하기 전에 과연 두개의 색종이가 어떤 모습으로 서로 어울릴지를 몇 번이고 상상해 보곤 했습니다.

 

  살면서 더욱 더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사랑도 결국 가위질과 풀칠을 닮았다는 걸... 잘라내야 하는 걸 잘라내고, 붙여야 할 걸 붙일 수 있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엉뚱한 걸 함부로 자르고 어울리지 않는 걸 억지로 이어 붙이는 어리석음으로 사랑은 망가집니다. 초등학교 그 시절로 돌아가 다시 한 번 가위지로가 풀칠을 배워보고 싶은 건 저만의 생각일까요?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아침에 눈을 뜨니

하늘을 잇는 참새한마리

종알종알 짹짹

이 아침

주님의 통신이여

 

그래서 오늘도

이렇듯

선명하게 서 있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