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1년 주보

연중 제15주일 2011년 7월 10일(가해)

모든 2 2021. 4. 6. 23:14

 

「결실」(2011),황영준 신부

"예수님의 살과 피를 통하여 교회는 이 땅에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  마태오 복음 13,1-23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아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어떤 것은 백 배,어떤 것은 예순 배,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그러니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 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어떤 사람은 백 배,어떤 사람은 예순 배,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말씀의 향기>

 

  보시니 좋은 땅  "말씀의 씨앗에 열매 맺기위해..."  - 박상병 루도비코.전의 주임

 

  오늘의 복음은 따로 설명을 하지 않아도 무슨 말씀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예수님께서 직접 풀이까지 해 주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봅니다. '나는 어떤 땅인가? 나는 길바닥일까 혹 돌밭이나 가시덤불,아니면 좋은 땅일까?'우리 중 어는 한 사람도 '난 영원히 어떤 땅이요'하고 단정적으로 나 자신이라는 '땅'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우리의 삶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길바닥에서 좋은 땅으로 왔다갔다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라는 '땅'이 태초에 무엇이었는가를 잊지 않는 것은 중요합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면서,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흙으로 빚으시고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보시니 참 좋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아름답고 기름진 흙이고 땅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아름다웠던 흙이며 땅인 사람에게서 씨앗이 잘 자랄 수 있게 하는 기름기가 빠지기 시작하여 척박한 길바닥이 되고,그러다 돌덩이가 그 위에 얹혀지기도 하고,심지어는 씨앗이 살아 숨 쉬지 못하게 하는 가시덤불까지 자라게 되었습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답고 보시기 좋았던 땅과는 다른 것이 되어간 것입니다. 척박하고 숨 막히는 땅에서 씨앗이 자랄 수 없는 것처럼,우리도 점점 참된 행복과 평화를 피우지 못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공허함을 느끼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하루하루 살아갈 때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땅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까? 농부는 농사를 잘 짓기 위해,땅에 거름도 주고,돌도 치우며,씨앗이 자라는데 방해가 되는 잡초들을 뽑습니다. 그리고 해와 비와 시간이 씨앗을 자라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기다립니다. 하느님 말씀의 씨앗이 우리 안에서 잘 자라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통해 해 주시는 말씀을 그렇게 열매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땅은 홀로 떨어져 고립되어 있지 않고,다른 땅과 연결되어 이 세상을 이룹니다. 사람도 그렇게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사람과 사람이 연결되어 가족을 이루고 사회를 형성하며 인류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느 땅 한 부분만 기름질 수 없으며,온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이 될 때 세상은 정말 아름다운 열매로 가득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그렇게 '보시니 좋은 땅'을 위해 우리를 오늘도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선교사명>

 

선교 개념 이해

 

선교(Missio)와 같은 의미의 그리스어가 신약성서에서도 자주 사용된다. 신약성서에서 200번 이상 사용되는데 주로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나타난다. 하느님 나라의 봉사자로서 복음 선포으 사명을 받고 보내지는 의미에서 사용된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10,5-7)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드레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16,15-16)

 

  복음서 밖에서도 나타난다. "그리하여 하나니아스는 길을 나섰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안수하고 나서 말하였다. 사울 형제,당신이 다시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주님께서,곧 당신이 이리 오는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사도9,17)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4-15)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1코린1,17)

 

  그리고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의미의 복음화(Evangelizatio)도 나타난다.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의 고을로 내려가 그곳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다. 군중은 필리포스의 말을 듣고 또 그가 일으키는 표징들을 보고,모두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사도 8,4-6) "그러나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갈라 1,15-16)

 

  선교(Missio)와 복음화(Evangelizatio)는 비슷한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주로 선교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복음화라는 단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교황 바오로 6세가 발표한 사도적 권고,'현대의 복음 선교'에서 복음화의 의미를 풍부하고 다양하게 재해석하였다.

 

  -김영근 신부-논산대교동 주임-

 

 

<지요하와 함께 보는 믿음살이 풍경>

 

이런 일에서도 감사를..

 

  지난해 이맘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모친께서 요양병원에 한 달 정도 더 계실 것으로 생각하고, 몸 상태가 썩 좋아지셔서 내가 며칠 정도 출근(?) 을 빼먹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하여 여름방학을 이용한 백두산 여행계획을 세웠습니다.  우리 가족은 2003년 8월 대전평화방송 사장이셨던 방윤석 신부님(현 서산 석림동성당 주임)과 함께 백두산 천지를 두 번이나 보았고, 새벽에 천지를 내려다보고 일출을 보며 미사도 지내고 왔기에 굳이 또 갈 필요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엄마 없이 자라는 두 조카아이(고2/중1)의 사기를 올려주고 호연지기를 키워주고 싶은 생각에,또 8개월 동안 병사의 노친을 돌보는 일로 어지간히 심신이 지친 우리 부부도 기분전환을 할 겸 백두산과 압록강과 만주의 고구려 유적지들을 돌아보는 5박 6일의 가족 여행을 결심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은행에 가서 6명 예약금 60만원을 계좌이체하려고 하니 비밀번호 '오류'가 뜨는 것이었습니다. 최근에 비밀번호를 바꾼 사실을 까맣게 잊은 나머지 그만 세 번이나 오류 실수를 저지르고는 내 심각한 건망증을 다시 한 번 자각하며 한숨을 쉬는데 문득 '하느님의 뜻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즉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그 후 7월 5일 노친께서 퇴원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거의 돌아가실 지경에까지 갔다가 완쾌되신 노친이 간절히 퇴원을 원해서,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병동생활까지 합해 무려 8개월 동안 병상 생활을 하신 노친을 드디어 다시 집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노친의 완쾌는 분명해 보였습니다. 다시 걷게 되신 것은 물론이고,특별히 아픈 데도 없고 식사도 잘 하시고 안 들리던 귀도 잘 들리게 되어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하니,하느님의 특별하신 은총이실터였습니다. 노친이 가족과 떨어져서  오래 독거노인 처지로 살아오신 것도 아니고, 여러 자녀들 집을 번갈아 전전하신 것도 아니니,내가 매일같이 두세 번씩 요양병원을 다니지만 노친께서 '가족의 품'과 가정생활을 그리워하시는 것은 당연지사였습니다.

 

 요양병원에서 노친을 모시고 집으로 오면서 나는 문득 떠오르는 일이 있어 성호를 그었습니다. 통장 비밀번화를 잊어 세 번이나 '오류'가 뜬 바람에 가족요행 예약금을 입금하지 못하여 여행계획을 취소한 것은 노친의 퇴원을 위한 하느님의 배려이시리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나는 속으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뇌며 거듭성호를 그었습니다.

 

-지요하(소설가.태안성당)

 

 

 

 

누구는 하늘이라  했다

누구는 바다라 했다

또 누구는 지평이라 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라 했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