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1년 주보

연중 제16주일 2011년 7월 17일(가해)

모든 2 2021. 4. 6. 23:23

 

너에게서 무엇이 나올까?

작고 약해서

하잘 것 없다 여겼습니다.

 

그때저만치

어린새순을 돌보는 이의 손길이 보였고

푸그한마음이 보였습니다.

 

이렇게해서 너의 생명이 이어지는구나!

이렇게해서 너로부터 열매가 맺어지는구나!

 

나의 생명도 이렇게 이어지는구나!

나로부터 나오는 열매도 이렇게 맺어지는구나!

 

백 현 신부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

(시편 54,오늘의 입당송에서)

 

 

+  마태오 복음 13,24-43

 

<수확할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주인님,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하고 묻자,'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하고 묻자,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말 속에 집어넣었더니,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세상 창조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가라지를 부린 원수는 악마다.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말씀의 향기>

 

생명의 샘인 농촌  -"생명을 키우고 나누는 소명"  - 강창원 마르티노.농민회 담당

 

  오늘은 열여덟 번재 맞는 농민주일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신 생명을 일구는 온 세상의 모든 농민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축복이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지난 달 고향에 갈 기회가 있어서 들렸습니다.그런데 아버지게서 고추밭에 물을 주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물을 주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하늘에서 비를 내려주시지 않으시니..수도요금이 많이 나와도 어쩔 수 없이.. 농작물이 말라가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워서"라시며 물을 주셨습니다. "하늘에서 비를 내려 주시지 않으시니"이 말씀이 가슴속 깊이 남아 있습니다.

 

  세계는 지금 모든 것이 그야말로 총체적인 위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온갖 자연재해가 잇따르는 것이 인간 스스로가 하느님이 주신 소중한 생명인 지구를 아끼지 않은 결과라고는 생각하지 않고,그저 다른 나라의 어려움으로만 치부하고 마는 실정입니다.

 

  이제는 내 것만이 아닌 더 넓은 차원에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이고,농민이나, 도시민이나 모두가 지금은 풍요로울지 모르지만,금방 말라버릴 수 밖에 없는 생명의 샘인 농촌의 현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너무나도 많은 아픔 속에서 농촌이,아니 생명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안일한 정책으로 인해 식량이 무기로 변할 수 있는 엄청난 FTA협정,원자재 가격의 폭등으로 인한 농촌 수익성의 불균형,생명을 경시하는 물질만능주의,지나친 과소비,음식낭비 문화,농촌의 고령화에 대한 대책 미흡,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농지의 감소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우리 모두의 생명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잠식당하고 있습니다.

 

  정말 두 손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그저 일 년에 한번 농민주일에만 농촌과 농민을 위해서  기도할 것이 아니라,그리고 농민들이 그저 농사가 천직이라서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드에게 당신의 생명을 키우고 나누는 소명을 주셨음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온 세상의 모든 이들이,더 이상의 생명파괴를 하지 않을 수 있는 눈을 뜨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의 선교사명>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선포되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성조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하느님께 불림을 받고 선택된 민족이 되었다. 야훼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류를 사랑하시며 구원에로 초대하셨고 이스라엘을 선택하시어 그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신다. 그 긴 구원의 우여곡절이 구약성서 전체에 나타나 있다.

 

  그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구원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지기를 바라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5-7)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고 성령 안에서 확장되는 하느님의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국한되어 있는 실재가 아닌 모든 인류에게 개방되어 있는 보편적 사랑임을 분명하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6-48)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졌던 초기 복음 선포의 역사에서 그대로 실현된다. 최초의 순교자 스테파노의 순교(사도7,54-60)에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는 이스라엘의 태도를 볼 수 있다. 우선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구원으 은총이 거부당한 것이다.이러한 이스라엘의 반응는 야고보의 순교와 베드로에 대한 박해(사도12,1-5)에서 분명해진다. 70년 예루살렘이 파괴되면서 이스라엘로부터 이방인들에게 대한 복음선포는 더욱 촉진된다.

 

  교회 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더욱 분명하게 유대교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할례'라는 유대교의 율법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옥죄는 일이 안티키아에서 일어난다.(갈라2,11-14참조) 베드로가 유대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때 바오로 사도가 그 해방의 위업을 이룬다. 더 이상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 되지 않고 세례가 새로운 복음적 구원의 선물로 주어진다. 49년에 열렸던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께 대한 믿으으로 구원이 주어짐을 분명히 하게 되는 것이다.(사도15,1-35:갈라2,15-21참조)

 

  하느님의 구원이 선택된 이스라엘 민족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졌고 교회가 그렇게 하였지만 예루살렘에서 거부되었다. 어쩌면 실패라고 볼 수도 있지만 위기가 호기가 되었다. 하느님의 섭리는 그렇게 작용되었다.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복음이 선포되기 시작한다.

 

-김영근 신부.논산대교동 주임-

 

 

 

<문학 단상>

 

외로움

 

  사람은 여럿이 더불어 살아간다. 여럿이 집단을 이루어 살아가는데 최초에는 가족을 이루고 나아가서는 마을,도시 등 집단을 이루고,크게는 국가를 이루어 살아나간다. 짐승들도 무리지어 살고 물고기들까지도 떼를 지어 다니며 살아 간다. 혼자서 외롭게 살기가 어렵기 때문인가 보다.

 

  여러 해 전의 일이다. 시베리아 벌목장에서 일하던 북한노동자 최씨가 북한 감시원의 눈을 피해 벌목장을 탈출하여 카자흐스탄으로 숨어들어 한 교포의 집에 숨어 있다가 동료 네 명과 함께 우리나라로 들어오게 되었다. 우리나라로 들어온 후에도 최씨는 서울과 카자흐스탄을 오가던 교포를 통하여 카자흐스탄의 교포 집에 숨어 있을 때 일년 반 동안 자기를 친오빠처럼 따르던 그집의 딸과 사랑을 속삭여 오게 되었다. 마침내 최씨는 사랑하는 그녀를 한국으로 불러들여 결혼을 하게 되었다.

 

  최씨는 회사에 취직을 해서 생활에 어려움이 없었고 영구 임대아파트에서 꿈같이 달콤한 신혼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내는 문화가 다르고 언어가 달라 주위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였고,유일한 말벗인 남편에게만 매달리며,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에 몸부림쳐야 했다. 딸을 낳고 고향에 다녀오기로 계획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지쳐 6개월 된 딸을 안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하고 말았다.

 

  최씨는 결혼을 하게되자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소유한 것처럼 보였다고 직장의 동료들이 말했다. 그런데,신혼의 단꿈이 채 깨기도 전에 싸늘한 시체로 변한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부등켜 안고 흐느끼며 몸부림치는 최씨를 차마 볼 수 없었다낟. 좀 더 참고 기다리지 못하고 자살을 택한 것은 처만 번 잘못한 일이지만,여섯 달된 아기와 함께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은 모녀도 불쌍하고 40의 나이에 새 보금자리에서 행복한 삶을 시작하다가 갑자기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잃고 넑을 잃게 된 최씨도 참으로 불쌍하다.

 

낯설고 먼 이국에 와서 고향에 대한 그리우,부모 친척에 대한 그리움,친구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사랑도 마다하고 자살이라는 막다른 길을 택한 것이다. 그렇게 외로우이란 죽음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는 신체 장애인이나 조금은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되었거나 또는 불의의 사고 등으로 어떤 한순간에 자기가 원치 않는 결함이 생겨 그렇게 불행한 사람이 된 것이지만, 그들도 모두 하느님의 사랑하는 자녀요 우리의 형제들이다. 그들 모두가 그러한 외로움 속에 버려지지 않도록 우리 모두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하겠다.

 

  가난하여 소외 받고,못나서 소외받고,힘없어 소외당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 김진태 니꼴라오 요셉.대전 가톨릭 문학회-

 

 

 

 

이 아침

이 하늘, 이땅을 딛고

호흡함에

 

묻어나는 기쁨으로

감사기도 드립니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