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1년 주보

사순 제4주일 2011년 4월 3일(가해)

모든 2 2021. 4. 4. 20:58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

(요한 9,10)

 

우리는 눈을 뜨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눈뜨게 되었는지.

그리고 주님께 청합니다.

주님은 나에게 다시 물으십니다.

무엇를 보려 하느냐?

 

세상에 밝을수록

우리의 눈은 얼마나 어두어지는지.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백 현 신부

 

 

  + 요한복음 9,1-41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하고 그에게 이르셨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그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이웃 사람들이,그리고 그가 전에 거지였던 것을 보아 온 이들이 말하였다.

"저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이가 아니가?" 어떤 이들은 "그 사람이오."하고, 또 어떤 이들은 "아니오 그와 닮은 사람이오."하였다. 그 사람은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그러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하고 묻자,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예수님이라는 분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신 다음,'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하고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 사람이 어디 있소?"하고 물으니, 그가 '모르겠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은 전에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바리사이들에게 데리고 갔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날은 안식일이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도 그에게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다시 물었다.

그는 "그분이 제 눈에 진흙을 붙여 주신 다음,제가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몇몇은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하고 어떤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하여,그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그들이 눈이 멀었던 이에게도 다시 물었다. "그가 당신 눈을 뜨게 해 주었는데,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그러자 그가 대답하였다.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유다인들은 그가 눈이 멀었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앞을 볼 수 있게 된 그 사람의 부모를 불러 그들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당신네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소?"

그의 부모가 대답하였다. "이 아이가 우리아들이라는 것과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것은 우리가 압니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누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었는지도 우리는 모릅니다.그에게 물어보십시오. 나이를 먹었으니 제 일은 스스로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의 부모는 유다인들이 두려워 이렇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하면 회당에서 내쫓기로 유다인들이 이미 합의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부모가 '나이를 먹었으니 그에게 물어보십시오."하고 말한 것이다.

그리하여 바리사이들은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다시 불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시오. 우리는 그자가 죄인임을 알고 있소."하고 말하였다.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제가 눈이 멀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것은 압니다."

"그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소? 그가 어떻게 해서 당신의 눈을 뜨게 하였소?"하고 그들이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다. "제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는데 여러분은 들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째서 다시 들으려고 하십니까?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그들은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말하였다. "당신은 그자의 제자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요.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아오. 그러나 그자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오."

그 사람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당신은 완전히 죄 중에 태어났으면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요?"하며,그를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그가 밖으로 내쫓겼다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만나시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하고 물으셨다. 그 사람이 "선생님,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하고 대답하자,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그는 "주님,저는 믿습니다."하며 예수님께 경배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몇몇 바리사이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말씀의 향기>

 

빛의 자녀로서 살아간다는 것  "어두운 세상에서 작은 빛으로 산다는 것" - 윤여옥 안토니오.해미 주임

 

  사순 제4주일은 기쁨의 주일이라고 한다.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여정을 잠시 쉬며 나머지 여정을 더욱 힘차게 걸어가기 위해서 다시 한 번 다짐을 하는 주일이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말씀에서 바리사이들은 계명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예수님을 모함하려 한다. 이에 비해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멀었던 사람은 체험에 근거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예수라는 분'(11절)으로 시작해서 '예언자'(17절)로, 다시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33절)에서 '주님'(38절)으로 예수님을 체험하게 된다. 그래서 바라사이들과 치유된 사람은 정면으로 충돌하고 결국에 치유된 사람은 회당에서 쫓겨났다는 내용을 복음에서 전하고 있다.

 

  오늘 복음말씀에서는 죄라는 용어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묵상하게 해 준다. 모든 병고의 원인을 자기나 조상의 죄로 생각한 이스라엘 전승과는 달리,자신의 완고함 때문에 "세상의 빛"(요한 9,5)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안식일 규정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인식일에 치유를 한 예수님은 죄인이며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 모른다고 단정한다. 즉,지식이나 상식에 구애된 그들의 눈에는 하느님의 "표징"이 발견되지 않는다. 이것이 "잘 본다'라고 주장하던 그들이 범하고 있는 잘못이며,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하시는 이유였던 것이다.

 

  복음서 저자가 당 시대에 바리사이들을 두려워하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기적치유 사회를 언급한 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오늘의 제2독서에 언급되어 있듯이 "빛의 자녀답게 살아 가십시오....열매를 맺지 못하는 어둠의 일에 가담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밖으로 드러 내십시오"(에페 5,8b,11)사도 바오로의 말씀과도 같이 그 빛을 언행을 통해서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격려하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어두운 세상에서 우리의 작은 빛의 삶은,우리 주위를 밝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빛의 삶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들은 다시 한 번 하느님의 편에 서서 매사를 바라보는 회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해보고 사순절의 마지막까지 뜻 있는 우리들의 나날의 삶을 보내야 할 것이다.

 

 

<나눔 살이 풍경>

 

꿈이 있는 동행

 

  지난 주에 소개된 교구 사회사목국에는 1998년에 설립된 사회복지법인 대전가톨릭사회복지회와 2008년에 설립된 충남가톨릭사회복지회가 있으며,2개의 전문사회복지법인을 통해 대전과 충남 어느 한 지역도 소외됨 없이 사회복지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대전.충남가톨릭사회복지회에서는 매년 여름과 겨울이면 아이들과 함께 캠프를 다녀옵니다. 산과 바다를 찾아가기도 하고 신나고 놀이동산과 스키장에 가기도 합니다. 매년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해가 갈수록 감동과 보람을 느낍니다. 보인들이 선택할 수 없었던 어려운 환경들을 잘 이겨내고 있는 우리의 아이들이 조금씩 자신들의 꿈을 이루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1998년에 시작한 아동청소년 지원 사업이 어느 새 13년째 접어들면서 소중한 열매를 맺고 있습닏. 유난히 아이를 좋아했던 유진이는 어느새 대학을 졸업해 어린이집 선생님이 되었고, 수줍음 많던 보람이는 자기가 도움 받은 걸 다시 보답하며 살고 싶다고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해 어느덧 3학년이 되었습니다. 대성이는 군대도 제대하고 대학도 졸업하여 좋은 직장 들어가더니 일찌감치 애기아빠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어려웠던 지난 시간들을 이겨내며 자신들이 꿈을 이뤄가듯 대전,충남가톨릭사회복지회도 예수님께서 꿈 꾸셨던 참사랑을 나누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 그리스도의 정신에 따라 소외받고 어려운 이웃들과 사라을 나누며 함께해 왔습니다. 아이들의 꿈을 까리따스성모회 어머님들께서 지지해 주셨듯이,대전,충남가톨릭사회복지회를 지지해 주시며 함께 사랑과 나눔을 실천해 오셨던 많은 분들이 계십니다.

 

  그 중 나눔의 샘 후원회님들은 오랫동안 대전.충나가톨릭사회복지회와 함께 이웃사랑을 실천하신 분들입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꾸준하게 후원해 주셨기에 대전교구 사회복지사업을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경제적인 이유로 후원을 중단하면서 정만 미안하다며 다음에 꼭 다시 후원하시겠다고 말씀해 주신 분,외국으로 이민가신다면서 통장에 자기 죽을 때가지 자동이체 될 만큼 후원금을 넣어놓고 가신다는 분들까지..나눔의 샘을 통해 큰 사랑과 행복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사회복지현장에서 주님 사랑의 꽃을 피우기 위해 노력하는 50여 개의 사회복지시설 종사자들 또한 대전 .충남가톨릭사회복지회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분들입니다. 각자의 삶에서 고통 받고 어려움에 처한 이웃들에게 먼저 다가가 전문적인 서비스를 지원하는 카리타스인들이 있기에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데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답니다.

 

  앞으로도 대전.충남가톨릭사회복지회를 통해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도록, 그래서 소외받고 어려운 이웃들의 행복한 꿈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동행해 주실 거죠?

 

대전교구 사회사목국(635-5111)/www.djcaritas.or.kr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

 

심부름과 서비스의 차이

 

불러서 답한 것보다

부르기 전에 답한 것,

그게 축복입니다!

 

 

  명언은 책에만 있는 것이 아니더군요. 여행 갔다가 점심 한 끼 때우려 우연히 들렀던 식당 기둥에도 있었으니까요. 처음엔 배고픔 때문에 밥상만 보였습니다. 배불리 먹고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찾으려 할 때서야 식당 기둥이 보였고, 그 기둥에 걸려 있는 액자가 눈에 들어 왔죠 그 액자 안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손님이 불러서 가는 건 심부름이고, 손님이 부르기 전에 가는 건 서비스다."

 

  마침 물 한 잔 달라고 할 참이었는데, 어느새 물통을 들고 오는 종업원을 보면서 저는 어째서 이 식당에 손님이 바글거리는지 감이 오기 시작 했습니다. 어째서 이 식당에서는 큰 소리가 들리지 않고, 분위기가 편안한지 알 것 같았습니다. 식당 안에 심부름꾼은 한 사람도 없고, 오로지 마음으로 배려하는 주인들만 가득했으니까요.

 

 

  이윤을 남겨야 하는 사장님의 경영철학이 담긴 말이었지만,저에겐 참으로 지헤가 가득한 명언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손님이 불러서 가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수동적으로 기다리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수동적으로 기다리다 사인이 오면 가서 주문을 받아 오면 되니까요. 하지만,부르기 전에 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언제나 섬세하게 손님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마음을 헤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이름을 불렀을 때, 그제야 주님께 응답하는 일은 우리 스스로를 심부름꾼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인생이란 거대한 식당에서 단지 심부름꾼이 아니라,그 누구에겐가 작은 기쁨이라도 전하는 서비스맨이 되려면,주님이 부르시기 전에 그 분의 마음을 일고 그 분이 기뻐할 일을 솔선해서 실천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부활절이 있는 축복의 달,4월... 올해는 심부름꾼의 꼬리표를 떼고 행복을 전하는 서비스맨으로 거듭 태어나보면 어떨까요? 그게 주님을 진정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일테니까요.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