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동문동 성당(서산지구)
본당 설립:1908.5.9 / 주보성인:수호천사
+ 마태오 복음. 5,1-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말씀의 향기>
"행복하여라!" -서용태 타대오 공주 중동 주임
오소서 성령님! 어느덧 2015년도 끝자락을 향해 가는 11월의 시작입니다. 날씨도 많이 추워지고 옷도 두툼해지는 요즘입니다. 추운 날씨에 몸도 따뜻하게 하여 건강히 지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따뜻해야 할 것은 세상과 이웃을 향한 우리들의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음이 따뜻하며 행복한 참된 그리스도인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믿고 삶 안에서 그분의 가르침을 실현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모든 서인 대축일은 이러한 그리스도인이 인생에 있어서 최종적으로 나아가야 할 목적이자 그 길을 제시하며, 큰 기쁨과 희망을 심어주는 대축일입니다. 또한 우리보다 앞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살아가신 성인들의 삶과 영성을 기뻐하고 기념합니다
'성인(聖人)'이라 하면 감히 이를 수 없는 경지, 우리와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인들은 우리와 같은 하느님의 창조물이요, 인간이셨고, 형제이며, 똑같이 나약하고 유한한 존재였습니다. 이처럼 성인들은 유한한 삶 안에서 무한하신 하느님만을 향해 살았던 것입니다. 곧 하느님 아버지만이 삶의 전부요, 행복의 근원이었습니다.
우리는 성인들을 통해 인간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내면에 이루어진 성덕을 통하여 참된 신화(神化), 곧 Deifcatil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에 희망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하느님 안에서 우리도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제시합니다.
이러한 성인들의 삶을 곱씹어 보면 인간적인 시선으로 행복한 삶을 사셨다는 단언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분들은 참으로 행복한 분들이셨습니다. 왜냐하면 행복의 기준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성덕으로 그분과의 참된 일치에 이러렀을 때에 행복하다는 사실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말씀에서 "행복하여라."는 말씀을 아홉 번 반복하시며, 사람들에게 참 행복을 선포하십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행복의 길에 이르기 위해서는 마음이 가난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참된 일치를 향하여 나의 마음과 삶에 하느님의 자리를 내어드리기 위해서는 자기 비움이 이루어져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성스러움의 조건이며 본질적인 것입니다. 성인들은 참으로 마음이 가난한 분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은 철저한 자기 비움을 통해 오로지 '사랑'으로만 투신할 수 있었고, 하느님께 삶의 전부를 내어드리며 일치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진정 행복에 이르는 길은 스스로를 온통 '나'의 것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으로 곧 사랑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열렬히 사랑하며 세상에 그 아버지를 드러내는 삶, 그것은 어느 순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이웃들을 향하여 그 사랑을 실천하는 순간에 우리 역사 역시 앞서가는 성인들의 길을 걷고 있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칙서
「자비의 얼굴」 해설(7)
정의와 자비는 싸우지 않는다.20항
정의와 자비는 대립하는 두 개의 실재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충만 속 정점에서 드러나는 유일한 두 차원의 현실이다. 성경은 하느님의 정의의 판관이신 하느님을 언급한다. 하지만 종종 정의의 본래 의미가 왜곡되고 그 깊은 가치를 모호하게 만들어 율법주의에 이르게 한다. 이를 극복하려면, 우리는 성경에서 정의가 하느님의 뜻에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정의는 하느님의 뜻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이 율법의 준수보다 신앙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한다. 예수님은 법 준수를 넘어 신앙의 중요성을 말한다.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이 의문을 제기한 바리사이들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그 의미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예수님은 사람들을 단순히 의인들과 죄인들로 나누는 율법의 준수를 정의로 여기는 관점에 맞서, 죄인들을 찾아 그들에게 용서와 구원을 주는 자비의 위대한 은사를 보여 주신다. 예수님은 자비를 해방 활동과 쇄신의 원천으로 여기셨기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거부당하셨다. 바리사이들과 다른 율법 학자들은 율법을 준수한다면서 사람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우고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가렸다. 율법 준수의 권유가 인간 존엄에 대한 배려를 막아서는 안된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재물이 아니라 신의다."(호세 6,6) 예수님은 몸소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 제자들에게 이제부터는 그 무엇보다도 자비가 삶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시고 이를 몸소 행동으로 보여 주셨다. 자비가 예수님 사명의 근본임이 드러난다. 자비는 율법을 형식적으로만 지키는 이들에게 도전이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뛰어넘으신다. 율법에서 죄인으로 여겨지는 이들과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는 그분의 깊은 자비를 깨닫게 된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려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가라 2,16) 바오로는 이제 율법이 아니라 신앙을 앞세우게 된다. 율법의 준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의롭게 해 주시는 자비로 구원을 가져다주신다. 성 바오로는 정의가 아니라 신앙을 첫자리에 놓는다. 하느님의 정의는 죄의 노예들과 억압된 이들을 해방하는 힘이 된다. 하느님의 의로움은 자비이고 정의는 용서다.(시편 51 [50],11-16)
-곽승룡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총장-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84)>
손수건 챙기셨어요?
"요즘 젊은이들은 손수건을 안 가지고 다니지.
근데 자네 손수건의 진짜 용도가 뭔 줄 아나?
바로...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 주기 위한 거라네."
영화'인턴'의 주인공 70세 최고령 인턴사원 '벤'아저씨의 명대사입니다. 벤 아저씨의 집을 방문한 젊은 청년 인턴이
드레스룸에 가지런히 놓인 손수건들을 신기한 듯 바라보며 손수건이 왜 이렇게 많은지에 대해 물었을 때 들려준 멋진 대사죠.
손수건의 용도가 정말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 주기 위한 것인지 객관적으로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하지만 사실이면 어떻고,
그럴듯하게 꾸며낸 이야기면 또 어떻습니까? 관객들의 마음에 강한 울림을 준 것만으로도 손수건의 새로운 정의는 그저 아름다울 뿐입니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저는 단 한 번도 손수건이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 주기 위한 물건임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손수건을 챙긴다는 것은 다른 사람 앞에서 나 자신의 모습을 깔끔하게 유지하기 위한 준비일 뿐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벤'아저씨 때문에 상처 받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손수건을 내밀어 줍니다. 존재감을 인정받지 못해 속상해하는 직원에게는
'용기'라는 손수건을, 오갈 데 없이 집을 구해야 하는 동료 인턴에게는'배려'라는 손수건을 건네줍니다.
영화의 배경이 되고 있는 최첨단 패션 온라인 쇼핑회사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오로지 일에만 몰두하고 사람 사이의 소통은 망각하고, 각자 자신의 개성만 중시하며 타인에 대한 배려는 불필요한 노력으로
치부되는 우리의 모습...
이런 회사, 이런 현실을 바꾼 것은 대단한 전략이나 엄청난 혁신이 아니라 손바닥만 한 크기의 손수건 한 장이면 충분했습니다.
세상을 탓하며 한숨만 쉴게 아니라, 이제라도 옷장 서랍 깊숙이 넣어 두었던 손수건을 챙기며 삭막한 세상에 나서 보는 건 어떨까요?
-이충무 바오로 / 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행복하여라!
저희에게 내리신
주님의 사랑
행복하여라!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위령의 날에 - 김효태 바오로/유성 성당
영혼의 길은 연옥 속에 잠자는
신앙선조와 형제자매들은
타는 목마름 오랜 세월 갈구하며
새로운 감로수를 그리워하겠지
세속과 천당이란 관문은 숙명인지라
세속에서의 부(富)와 지위와 권력도
죽음의 기로에선 모두가 영욕일 뿐
마지막 가는 날, 주머니를 가지고는 못 가니
죽음의 관문에서 세속의 비늘을 벗고
죄를 뉘우치고 진실만을 토하며
용서와 화해로 사랑과 평화가 잉태되어
원점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지옥과 천국행의 희비도 엇갈리겠지
그러나 우리 신앙인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주님의 은총 안에서
귀천을 누릴 수 있는 심신은 준비되었을까
천국 문은 좁고 닫힌 문의 열쇠를 열어야 하는
험한 긴 터널을 통과해야만 하는 기적이다.
지금 연옥에서 떨고 있는 영혼을 위로하고
하느님의 품 안에 갈 수 있도록 청원기도 하여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얻기 위해
주님께 구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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