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산 성당(아산지구)
본당 설립:1985년 8월 19일 / 주보성인: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 마르코 복음. 12,38-44 <또는 12,41-44>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말씀의 향기>
하느님뿐 -안상철 미카엘 용전동 주임
어머니 품에 안겨 있을 때는 그렇지 않지만 제 발로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세상에는 조심해야 할 것들이 참 많습니다. 모든 일거수일투족에 위험을 불러올 수 있는 요소들은 상존합니다. 그런 위험에 빠짐으로 육체적인 불구가 될 수 있습니다. 더욱 위험한 것은 정신적인 불구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불구는 자신이 불구임을 잘 인식하면서 참으로 고통스럽게 어렵지만 그래도 삶을 내적으로 풍요롭고 아름답게 꾸며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신적인 불구자들은 세상 사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을지 모르지만 자신이 불구임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삶 속에 교만과 거짓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교만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정신적 불구이고 자신의 삶이 얼마나 거짓으로 가득한지를 깨닫지 못하는 정신적 불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될까 봐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당시의 율법학자들은 교회와 사회에서 민중들로부터 대단한 존경과 사랑을 받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고위 성직자나 정치인들에 한정된 어떤 특정한 집단과 부류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우리들 모두의 문제입니다. 존경받을수록 겸손해져야 합니다. 사랑받을수록 진실해져야 합니다. 흔히 듣는 이야기이기에 '나는 아니다'라고만 생각하면서 깨닫지 못하고 벗어나지 못한다면 나는 정신적 불구자입니다.
엘리야가 가난한 과부에게 음식을 먼저 얻어먹은 것은 하느님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존경을 받아야 할 분은 오직 하느님뿐임을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이웃으로부터 받게 되는 모든 것들이 하느님 때문임을 늘 깨닫고 겸손을 산다면 더 엄중한 단죄를 받는 사람들의 무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존경받을수록 겸손해지고,
사랑받을수록 진실해지고
프란치스코 교황 칙서
「자비의 얼굴」 해설(8)
자비보다 분노를 멈추게 하는 것이 하느님께 더 쉽다. 21항
자비는 결코 정의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에게 다가가시는 하느님의 활동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에게 참회하고 회개하여 믿도록 하는 많은 기회를 주신다. 호세아 예언자의 경험은 자비가 정의를 뛰어넘는 방법을 알려 준다. 이 예언자가 살았던 시대는 유다인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때였다. 이스라엘 왕국이 붕괴 직전에 있었다. 사람들이 계약에 충실하지 못하여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선조들의 신앙을 잃어버렸다. 인간의 논리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불충한 이들을 배척하시려 한다는 것이 타당해 보일 것이다. 이들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어겼으므로 그에 따른 형벌, 곧 유배를 당하는 것이 마땅하였다. "그들은 이집트 땅으로 돌아가고 아시리아가 바로 그들의 임금이 되리니 그들이 나에게 돌아오기를 마다하였기 때문이다."(포세 11,5) 그러나 이러한 하느님의 정의로운 질책 바로 다음에, 예언자는 어조를 완전히 바꾸신 하느님의 참모습을 드러내 보인다."에프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저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내버리겠느냐? 내가 어지 너를 츠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나는 네 가운데에 있는 '거룩한 이', 분노를 터뜨리며 너에게 다가가지 않으리라."(호세 11,8-9)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마치 이 예언자의 말씀에 주석을 다는 것처럼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께는 자비를 베푸시는 것보다 분노를 참으시는 일이 더욱 쉬우셨습니다." 하느님의 분노는 잠시이지만 그분의 자비는 영원하다.
하느님께서 정의에만 머무르신다면, 그분은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니시고 단지 율법 준수만 요구하는 인간과 같게 되실 것입니다. 정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경험에 비추어 보면 정의만을 요구할 때 결국 정의가 무너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자비와 용서로 정의를 넘어서신다. 그렇다고 정의를 깎아내리거나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 정반대다. 죄를 지은 사람은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는 끝이 아니라 회개의 시작일 뿐이다. 용서의 온유함을 느끼고 회개를 시작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정의를 거부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정의를 더 큰 차원 안에 두시고 이를 뛰어넘으신다. 거기에서 우리는 참된 정의의 바탕이 되는 사랑을 체험한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알지 못한 채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힘을 쓰면서, 하느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로마 10,3) 하느님의 정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은총으로 모두가 받은 하느님의 자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모두와 세상에 대한 심판이다. 이를 통하여 하느님께 우리에게 사랑과 새로운 삶에 대한 확신을 주셨기 때문이다.
-곽승룡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총장-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85)>
시간보다 시선
아이가 갓난아기였을 때에는
아직 말을 다 배우지 않아 소통하기 어렵고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면 부모로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아이와 눈 마주칠 시간이 없고
아이가 청소년이 되면 자기만의 세계를 갖게 되어
서로 겉도는 안타까움만 커지고
아이가 청년이 되어 취업을 하면 새벽에 나가
밤에 들어오니 얼굴 볼 시간이 없고
아이가 결혼을 하면 더 이상 나만의
아이가 아니기에 말 걸기도 부담스럽고
아이가 내 나이쯤 되었을 때에는
내가 기력이 없어 아이와 소통할 수 없습니다.
그럼 대체 대화를 위한 최적의 시간은 언제일까요?
그런 시간을 찾아내기란 불가능해 보입니다.
바라보는 시선에 마음이 담기면
말하지 않아도 아이는 듣고 있고
말하지 않아도 아이의 말이 들립니다.
어떤 말을 할까를 고민하지 말고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를 돌아보면
그것이 바로 행복한 소통의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말씀보다
눈길을 먼저 주셨고,
그 시선 하나로 많은 말씀을 전하셨으며
등을 돌린 사람들에게도
그 시선을 거두시지 않았습니다.
그것만이 사랑의 유일한 끈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충무 바오로 /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살며시 내딛는
첫걸음
삶의
믿음의
진실의
한 발자국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함께하는 이야기 마당>
축복장
111곳의 성지순례를 마치면 축복장을 받는다.
이제 내가 축복장을 받게 되면서 죽음을 향한 믿음, 죽음마저 감내한 순교자들을 향한 감사와 찬미가 터져 나왔다. 관광이 아닌 성지순례는 위대한 순교자들의 정신과 고귀한 영성에 나를 성찰하고 나의 생활을 점검해 보는 은총의 시간이었다.
선조들의 굳센 믿음과 순교정신은 하느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기에 신앙의 증인으로 존경하며, 나는 천주교인의 자부심과 긍지도 가져본다.
나이 칠십이 넘어 퇴행성 관절로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나는 성지순례를 선택했다. 하느님께서 나를 초대해 주셔서 성지순례를 할 수가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나의 고통(부당하고 억울한 대우)을 보시고 111곳의 성지로 나를 부르신 것이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하느님을 증거 한 거룩한 곳이다.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순교 신심터는 이제 한국을 떠나는 나의 발목을 잡는다. 더러는 파손되고 손상된 성지를 순교자의 정신을 계승한 우리 모두가 성지 개발과 보존을 위해 관심을 가져야겠다.
처음 순례는 지인이 청양 다락골 성지로 인도하면서부터이다. 또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방한과 전대사 수여 성지가 지정되면서 성지순례를 시작했다. 결코 쉬운 여정은 아니었다. 미사 시간에 맞추려고 거리 조절, 높고 낮은 산, 악천우에 시달렸고 장거리는 1박, 2박, 숙박은 찜질방, 제주도에서는 70년 만에 오는 더위라고도 했다.
차도 가져가지 않아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니 애로가 많았다. 그러나 111곳의 성지순례는 나의 힘과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이었고 나를 사랑하시는 분의 응답과 말씀이셨다.
"용서는 구하는 자에게는 용서를 구해야 함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하느님께 이 축복장을 드려야겠다. 여러 교우들이 성지를 많이 순례하고, 주님의 은총이 항상 함께하길 기도해 본다.
-정문자 세실리아/논산 부창동성당-
차지 않는 그릇 - 정채봉 -
한 사람이 신께 빌었다.
쌀 항아리를 채워 주시고
과일 광주리를 채워 주시고,
고기 상자를 채워주시라고
하도 졸라대는 통에
신은 허락 해 주고 말았다.
그런데 쌀 항아리와 과일 광주리와
고기 상자를 주워 담으면 담는 대로
커지게끔 만들었다.
그 사람이 쌀 항아리 앞으로 가면
쌀이 저절로 생겼다.
쌀 항아리에 쌀을 퍼담는
그는 신이 났다.
한참 쌀을 담다 보면 쌀 항아리는
커지는데 고기 상자는 그대로인 게
그는 불만이었다.
이번에는 고기 상자 앞에 섰다.
이내 고기가 저절로 생겼다.
고기를 집어넣는 대로
고기 상자 또한 커졌다.
허나 과일 광주리가 그대로인 게
그는 또 불만이었다.
그는 과일 광주리 앞으로 갔다.
한 참 과일을 광주리 속에 담다 보니
쌀 항아리가 작아 보였다.
그는 다시 쌀 항아리한테로 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기 상자가 작아 보이지 않은가.
그는 고기 상자한테로 달렸다.
다음에는 또 과일 광주리한테로
달려갔으며.
이렇게 번갈아 쌀 항아리와 고기
상자와 과일 광주리를 채우다 보니
어느덧 죽는 날이 다가왔다.
그는 그제서야 문득 깨달았다.
게걸스러운 거지가 되어 살아온
자기 삶을.
그는 신께 항의하였다.
"어찌 이렇게 거지인 채로 살아오게
하였습니까?
신이 대답하였다.
"그건 내 탓이 아니라 순전히
네 탓이다.
꽉 차지 않아도 만족할 줄 알았으면
그렇게 살지 않았을 것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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