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흥동성당(대전중부지구)
본당설립:1919.3.3./주보성인:노동자의 성요셉
+ 마태오 복음. 28.16-20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
그때에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말씀의 향기>
복음화로 세상에 희망을 - 이창덕 마르코 천안성정동 성당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을 들었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현대인들은 모든 가치의 중심을 하느님 나라의 가치가 아닌 다른 데서 찾고 있습니다. 사회비평가 제러미 리프킨은 그의 저서「소유의 종말」에서 산업 자본주의가 현실세계에서 가상세계로,자기 발전과 자율의 삶에서 연기 연출의 삶으로 세상은 변화되어 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특징은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과거 니체는 자라투슈트라라는 사람을 등장시켜 "신은 죽었다."고 외쳤습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까지 하느님 나라의 가치로써 인정되던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의 가치 규범이 사람들에 의해서 죽었다는 말이고,사람들의 관심이 하느님에게서 다른 데로 돌려지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처럼 현대인들이 인생의 정치나 경제 문화와 사회 그리고 사상과 가치 면에서 그저 즐길 수 있는 것을 찾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혼란과 어둠이 초래되더라도 자신의 뜻에 맞기만 하면 선택하고, 다른 이가 위험에 빠지더라도 내 뜻에만 맞으면 투자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면서 사회에는 극도의 혼란과 어둠이 자리 잡아 가고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 주변을 보면 희망을 잃어버려 자살자가 늘고,희망의 날개를 꺾어버리고, 자신을 팽개쳐 버리듯이 사는 사람들도 늘어납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듣습니다. 즉 세상을 복음화하라는 명령입니다.
왜 우리는 선교를 해야 합니까?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는 부헨발트 수용소 해방 60주년 기념식에서 "나치의 만행에 대해 독일은 도의적,정치적 책임을 질수 있도록 이 시기의 역사를 정확히 기록하고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밝히면서 희생자와 가족들 앞에 머리를 숙였습니다. 이러한 행사는 매년 4월 나치 강제 수용소가 있던 독일 연방정부를 대표해 참석했습니다. 이러한 회개의 정신은 독일이 지닌 그리스도교 정신의 힘입니다. 그리스도교 문화는 항상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돌이켜 보며 회개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이 바로 복음화가 되지 않은 일본과 독일이 다른 길을 가게 되는 근본적 차이입니다.
우리나라가 복음화 된다고 하는 것은 곧 이러한 자기반성의 정신과 평화라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정신적 문화의 힘을 가르는 것이 되어야 하고,혼란과 어둠의 세상에 질서를 이루고,빛과 소금의 역할이 요청되기 때문이며,절망에 희망을 심기 위해서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칙서
「자비의 얼굴」 해설(5)
주님을 위한 24시간과 자비의 선교사 파견
하느님 자비의 특별한 경험을 지닌 가난이 우리를 복음 속 깊이 들어가도록 초대한다.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헐벗은 자에게 입을 옷을 주고,낯선 자를 반기며,아픈 이를 치유하고,감옥에 갇힌 이를 찾아 주며,죽은 자의 장례를 치러주기다. 또 자비의 영적 활동을 기억하고 실행할 것을 청한다. 의심 품은 자(믿음이 약한 자)에게 조언하고,신앙을 모르는 자에게 가르쳐주며,죄 지은이를 타이르고,역경 속에 있는 자를 위로하며,성낸 자를 용서하고,우리를 아프게 한 자를 인내로 견디며,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기다(15항).
교황님은 내년 사순 제4주일 이전 금요일과 토요일에 거행되는 주님을 위한 24시간에 모든 이를 초대한다. 젊은이들과 많은 이들이 고해성사를 통하여 주님께로 돌아가는 길,열심히 기도하며 살아가는 길,삶의 의미를 되찾는 길을 다시 발견하고,하느님의 위대하신 자비를 직접 깨닫게 될 것을 바란다. 고해성사는 고해자에게 참된 내적 평화의 원천이 될 것이다.
고해 성사는 하느님 아버지 자비의 참된 표지가 되라고 강조한다. 좋은 고해 사제가 되려면 우리 스스로가 먼저 하느님께 용서를 청해야 한다. 고해 사제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명에 참여하는 것이며,용서하시고 구원하여 주시는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표지가 된다. 고해 사제는 집으로 돌아오는 참회하는 아들을 끌어안고 그를 되찾은 기쁨을 드러내야 한다. 고해 사제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어떠한 상황에서 무엇보다 자비의 으뜸가는 표지가 되어야 한다.(17항)
교황님은 자비의 선교사들을 파견한다. 그들은 하느님 백성을 보살피는 교회의 어머니다운 배려의 표지가 되어 참으로 신앙의 근본이 되는 자비의 신비가 지닌 부요에 하느님 백성이 깊이 들어가게 해 줄 것이다. 그들은 용서를 구하는 이들을 따뜻이 맞아 주는 하느님 아버지의 살아 있는 표지가 될 것이다. 자비의 선교사들은 자신이 '자비로우시며 충실하신 대사제"(히브 2,17)이신 예수님으로 보일 수 있음을 깨닫고 자비의 부르심을 실행하여야 한다.
교황님은 형제 주교들이 이러한 선교사들을 초대하고 받아들여 그들이 확신에 찬 자비의 설교자가 될 수 있게 하기를 바란다. 교구가 만민 선교를 조직하여 이러한 선교사들이 용서의 기쁨을 전하게 격려한다. 주교들은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희년이 우리에게 선사한 은총으 시기에 하느님의 많은 자녀들이 하느님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 특히 사순 시기에 목자들은 열심히 신자들을 다시 불러들여,그들이 '은총의 어좌로 나아가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도록" 하기 바란다.(히브 4,16)(18항)
-곽승룡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총장-
<이충무의 행복나침반(82)>
분노에는 빠르시고 자애는 부족하나이다?
질병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 곁에서 그분들을 오랫동안 진심으로 돌봐준 호스피스 한 분이 제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세상과 작별하는 마지막 순간에 주로 어떤 말로 마지막으로 남기는지 아세요?"
생명의 촛불이 꺼져 가는 그 절박한 순간에,한마디 밖에 할 수 없는 그 최후의 순간에,과연 사람들은 어떤 말을 남기려고 했을까요? 그분의 대답이 점점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말인지는 모르지만 그 짧은 한마디보다 더 진실한 말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많은 분들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주식 투자를 좀 일찍 시작할 걸.. 땅을 사기 위해 좀 더 부지런히 돌아다녀 볼 걸... 아파트를 한 채 더 사둘러 장만해 놓을 걸.. 그 물건을 꼭 내 손에 넣었어야 할 걸..."
대신 약속이나 한 듯 대다수의 분들이 이런 말씀들을 남기신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좀 더 일찍 용서할 걸,먼저 미안하다고 말할 걸,용기를 내 사랑한다고 고백할 걸..."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그 마지막 말들을 통해서 그분은 정말 많은 걸 깨달았다고 하셨습니다. 저 또한 그 말들을 통해 제 자신의 삶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분노에는 더디시고 자애는 넘치시는 분,벌하시다가도 쉬이 마음을 돌리시는 분이라고 배웠는데.. 정작 제 자신은 분노에는 빠르고 자애는 턱없이 부족한 삶을 살고 있으니 이 얼마나 초라한 삶입니까?
하느님의 모습,그 어느 한 자락이라도 닮아야 하는 우리가 엉뚱하게도 점점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듯합니다. '도를 넘는 막말,살벌한 보복운전,어이없는 묻지마 폭력..'등과 같은 무시무시한 말들이 하루에도 수없이 우리 앞에 쏟아져 나옵니다.
숨막히는 현실에서 우리의 숨통을 트이게 할 유일한 길,용서와 자애의 .. 그 길에 나설 용감한 사람들을 하느님은 오늘도 쓸쓸하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충무 바오로 /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이 짧은
가을날의 아침을
빛나게 하는 것은
햇볕과 이슬과 바람
그리고
우리의 마음 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함께하는 이야기마당>
주보에 따사로운 애정을
나는 강산이 네 번 바뀌고 조금 또 남는 시공의 여울 변화 동안에 오로지 세종대왕께서 만들어주신 우리글 한글로 된 한국어문학을 가르치는 데 몸바쳤다. 그리고 고맙게도 교수로서 수훈될 수 있는 최상위격인 훈장까지 받는 영예 속에 정년퇴임도 하고 이제는 백수로 편히 숨쉬기 운동을 계속 이어가고 있으니! 이 부끄럽지 않은 삶이 주어진 것은 애오라지 하느님의 거룩하신 은총,작고하신 어머님의 크신 은혜,안해(아내)의 자상한 배려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한글은 참으로 오미자 같은 신묘하고 다양하게 풀이 될 수 있는 글자가 아닐 수 없다. 하나의 보기로 '걷다'를 보자, 단순히 '걷다'에서부터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나와서 죽음에 이르는 삶의 과정'을 뜻하는 깊이 있게 풀이되는 글이 우리 한글의 우수성인 것이다.
이 시대 우리는 엄청난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벌람하는 정보를 어떻게 우리 생활에 활용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가름된다 하겠다. 이는 성스러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주님을 믿고 사랑하며 따르고 의지하는 신앙생활에서도 매한가지다.
보다 풍요로눈 신앙생활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주님을 영접하는 미사참례와 영적기도 등이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성서나 교회 서적 또는 정기 간행물을 살펴보는 일 또한 중요하다.
그러나 과연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소중히 여길까 하는 생각을 하다보면 금시 회의에 빠지게 된다. 물론 이러한 나의 생각이 기우일 수도 있다. 어차피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하느님과의 관계에 충실하면 되는 것인데 무슨 교회서적이 어떻고 정기간행물들이 어떻고 또 그 정보가 뭬 대단하고 소용이 있느냐는 생각을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자녀된 이들이 아버지 집을 늘 깨끗하게 하고 아버지의 사업을 도와가면 그 외 모든 일들을 어김없이 따라해야하는 일은 마땅한 도리요 의무요 권리다.
한 주간 동안 있었던 우리 가톨릭 교회의 이모저모 등을 자세히 알 수 있고 참다운 신앙생활을 위한 길라잡이 역할을 해주는 주보週報에 대한 관심과 배려,지원은 곧 우리 자신에 대한 관심과 배려,지원이 되는 것이다.
실로 세계 속의 으뜸인 한글로 만들어지는 '주보'속에는 믿음을 살지게 하는 신부님 강론,여러 미사 안내,건강한 청소년 교육,가정성화 교구와 각 본당 소식,교구장님 일정 및 행사 안내,각종교육프로그램 소개 등 진정 필요하고 알찬 보물과 다름없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김선호 마르코/가수원성당-
<짧은 시 모음>
풀꽃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아버지의 나이 / 정호승
나는 이제 나무에 기댈 줄 알게 되었다.
나무에 기대어 흐느껴서 울 줄 알게 되었다.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걸어들어가
나무의 그림자가 될 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왜 나무 그늘을 찾아서
지게를 내려놓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강물을 따라서 흐를 줄도 알게 되었다.
강물을 따라 흘러가다 절벽을 휘감아 돌 때가
가장 찬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해질 무렵에
아버지가 왜 강가에 지게를 두
종아리를 씻고 돌아와서
내 이름을 한번씩 불러보았는지 알게 되었다.
바람이 오면 / 도종환
바람이 오면,오는대로 두었다가
가게 하세요.
그리움이 오면, 오는데로 두었다가
가게 하세요,
아픔도 오겠지요
머물러 살겠지요
살다가 가겠지요
세월도 그렇게 왔다 갈거예요
가도록 그냥 두세요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방울 없고 씨앗 한톨도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서 나간다
한 뼘이라도 여럿이 모여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때까지
푸르게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앞 수천개를 이끌고서
결국은 그 벽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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