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리 성지
충남 당진시 합덕읍 평야6로 135/http://www.sinri.co.kr
신리 성지 순교기념미술관
+ 루카 복음 9,23-26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말씀의 향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위주광영-爲主光榮) - 송지영 바오로 관리국 차장
우리는 평소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많은 용사들을 접하게 됩니다. 또한 '용사'라는 단어에서 흔히 떠올리게 되는 그들의 모습은,상의를 탈의한 채 멋진 근육을 드러내며 큰 칼을 쥐고 자신 앞에 마주하고 있는 상대를 강렬한 눈빛으로 응시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이런 일반적인 용사의 모습과 신앙 안에서의 용사의 모습은 많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특히 순교자 성월에 많이 부르는 가톨릭 성가 283번인 '순교자 찬가'에 나오는 장한 순교자이자 주님의 용사라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면,확연한 차이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신앙의 용사 즉,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용사란 바로 성인 순교자들을 가리킵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 성인 순교자들은 세상의 용사와는 분명히 다릅니다. 칼을 쥐거나 육체적인 강인함을 택하는 대신 신앙을 선택하고 하느님 그 자체인 십자가를 몸에 새기고, 하느님의 십자가를 통해 참 삶의 의미를 드러내고자 했으며,온마음과 생명을 다해 십자가의 신비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인들의 모습이 장한 신앙 용사의 모습이었음을,우리는 9월 순교자 성월 성가를 통해 다시금 기억하고 떠올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용사는 상대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목숨을 살리고 승리를 쟁취하는 존재이지만,신앙을 지닌 그리스도의 용사인 순교 성인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고 희생합니다. 또한 육체적인 승리를 선택하기보다 영적인 십자가의 신비 즉,하느님의 어리석음을 택하는 존재입니다. 세상의 용사는 상대에게 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만,하느님의 용사인 순교 성인들은 하느님을 버리고 세상의 것을 택하는 것이 가장 부끄러운 것임을 전 생애를 통해 증거합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더 가까이 동참하기 위해 십자가 신비에 자신의 삶을 봉헌하고 포기하면서,세상 모든 것을 이기고도 남을 하느님을 자신의 편으로 둡니다. 이러한 복음의 진리로 무장하고 세상에 맞선 하느님의 용사들이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 자랑스럽고 장한 신앙의 순교자들이 된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바로 세상의 힘보다는 하느님의 힘,하느님의 영광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위주광영-爲主光榮),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세상에 태어났음을 기억하는 한 주일이 되시길 바랍니다.
한국 천주교와 이웃 종교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 위원회 편찬-
80. 종교 간 대화의 상대는 누구입니까?
"모든 피조물은
저와 비슷한 존재를 사랑하고
모든 인간은 제 이웃을 사랑한다"(집회13,15)
그리스도인이 아닌 모든 종교인,곧 유다교,이슬람교,불교,원불교,유교,천도교,민족종교,도교,힌두교 등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종교 간 대화의 상대입니다.
이전에 가톨릭 교회는 이들을 '비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입장을 바꾸어 가톨릭 신자가 다른 종교인으로부터 비불교인이나 비무슬림 또는 비힌두교인 등으로 불린다면 어떤 느낌을 받겠습니까?
이러한 이유에서 가톨릭 교회는 '비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이 그리스도교를 기준으로 이웃종교인을 평가하는 표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비그리스도교' 대신 '다른 종교' 라는 표현이 사용되었고,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나라에서는 1998년부터 '이웃종교'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신자들은 이웃으로 한 사회 안에 살고 있는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을 진정한 대화의 상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와 교회를 잇는 길잡이>
미래는 있을까?
산소통을 짊어진 아이,산소호흡기로 숨을 쉬고 있습니다. 그런 아이 앞에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이 서 있고, 그의 손에는 돈뭉치가 들려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이에게 자랑스러운 듯 뭉칫돈을 건네며 말합니다. "너를 위해서 이 돈을 준비했단다.!"
초록이 없는 땅에서 살아야 하는 아이,그래서 인위적으로 산소를 흡입하며 살아야 하는 아이,과연 아이는 희망을 품고,아버지가 물려준 땅에서 살 수 있을까요?
가끔 마당에서 성당을 바라봅니다. 특히 늦은 저녁 성당은 달빛에 어우러져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자주 엉뚱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하느님을 찾는 백성이 오지 않는 교회,그래도 아름다울까?' '하느님의 거처인 지구를 훼손시키는 방식으로 교회가 운영되고 있다면,그 교회는 거룩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
전염병의 시대,사람이 오지 않습니다. 선포와 나눔이 없는 교회,아름답지 않습니다. 화석연료로 지탱되는 교회,거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랍습니다. 그것이 최선이고 다른 방법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악은 언제나 눈치채려 하지 않는 생각의 섬세함으로 활동합니다. 악은 이렇게 유혹합니다. "에이~~ 뭐,이 정도는···."
기후위기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이런저런 말은 많아졌는데 정작 에어컨은 끄지 않습니다. 성전의 거룩함과 아름다움을 드러낼 다른 방법은 찾지 않고 역으로 효율 좋은 냉난방기를 사들입니다.
아이들을 봅니다. 그리고 묻게 됩니다. '미래가 있을까?' 그리고 솔직한 마음의 소리는 이것입니다. '바보야! 미래는 없어!!!'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 대전교구 생태환경위원회-
주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주고 가신 마음
신뢰의 믿음
텅 빈 정의가 아닌
꽉 찬 희생
이 땅의 순교자들이여.
-글.그림 이순구 (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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