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리 성지
충남 당진시 합덕읍 평야6로 135/http://WWW.sinri.or.kr
+ 마태오 복음 18,21-35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주님,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하고 말하였다.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제발 참아 주게,내가 갚겠네.'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말씀의 향기>
주님의 자비 살기 -박정빈 레오 내동 보좌=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매정한 종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당시 한 탈렌트는 육천 데나리온이었고, 한 데나리온은 한 사람이 하루 일해 벌어들였던 일당이었습니다. 그러니 복음의 주인공은 엄청 큰 빚을 진 것이지요. 결국 그 돈을 갚지 못한 그는 왕 앞에 끌려옵니다. 왕은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빚을 갚으라 명령합니다. 그는 "제발 참아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라며 애걸합니다. 그러자 왕은 그 사람을 가엾게 여겨,그 많은 빚을 탕감해 줍니다. 큰 자비를 입은 것이지요.
그렇게 모든 빚을 탕감 받은 이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을까요. 왕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마음속에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왕으로부터 모든 빚을 탕감 받고 나가던 그는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동료를 만납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은혜와 넘쳐나는 감사를 표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이한 것이지요. 그의 동료도 그와 마찬가지로,꼭 갚겠으니 조금만 참아 주기를 애원합니다. 조금 전의 자신과 똑같은 모습이었기에,왕 앞에서 호소했던 자신의 모습을 충분히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기일을 연장해 주기만을 청했던 종에게 왕은 모든 빚을 탕감해 주는 큰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는 그 종이 이 일에서 배워 관대해지고,자비를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었지요. 그러나 종은 엎드린 동료를 보고서도 왕이 보여준 자비를 떠올리지 못했고 동료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그의 마지막 모습은 형리에게 넘겨져 평생을 감옥에 갇혀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갖은 욕심과 조건들,상황들에 따라 베풀어지는 우리의 자비와 다릅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그 사람을 바라보고,그 삶 안에 들어가 보다 나은 길을 가기를 원하시는 자비입니다. 미워하는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 싫은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은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그래서 용서와 그에 따르는 자비는 인간 한계를 넘어서서 하느님을 닮고,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초대이기도 합니다. 용서하지 못할 사람,용서되지 않는 사람,도저히 자비를 베풀 수 없을 것 같은 사람과는 피하거나 미워하는 것이 세상의 방법이지만,하느님의 방법은 품에 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주님으로부터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죄를 용서받으며 살아갑니다. 알면서도 지은 죄,모르면서 지은 죄, 행동으로 말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알게 모르게 상처 주고 상처 받고 살아갑니까? 하지만 주님께서는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청할 때 우리들의 죄를 더 이상 묻지 않으십니다. 지난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우리들의 죄가 크고 작음을 묻지 않으시고 자비를 허락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통회하고 마음 아파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얼마나 서로를 용서하고 자비를 나누며 살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이번 한 주간 주님의 자비와 사랑에 감사하고, 언제든 이를 누리면서 살 수 있도록 하느님 나라를 청하는 기쁨의 시간 되시면 좋겠습니다.
<사회와 교회를 잇는 길잡이 사잇길>
교회가 말하는 '평화'
우리는 평화를 말하고 있지만,우리가 말하고 있는 '평화'의 의미는 진정한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현재의 삶에 안주하고자 하는 소극적인 의미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말하는 '평화'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며,하느님의 계획에 부합하는 인간의 계획이기 이전에 먼저 하느님의 근본 속성입니다. 성경의 계시에게,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훨씬 넘어서서 생명의 충만함을 나타냅니다(말라2,5 참조) 그러므로 평화와 폭력은 공존할 수 없으며, 폭력이 있는 곳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실 수 없습니다.(1역대 22,8-9)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상에서의 삶을 마치며 떠나시기 직전,영적으로 남겨 주신 유언의 말씀에 다시금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예수님의 평화는 가장 먼저 아버지와 화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맡기신 직무를 통하여 이루어지며,평화의 선포로 시작됩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루카 10,5;로마 1,7 참조),그러므로 평화는 자기 형제자매들과 화해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가 하느님께 청하는 용서는 우리가 형제자매들에게 베푸는 용서와 관계있습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마태 6,12) 이 이중의 화해로써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의 사도가 될 수 있으며,따라서 예수님께서 참 행복에서 선포하신 말씀처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것은,사실 모든 사람에게 '평화의 복음'(사도 10,36;에페 6,15 참조)을 선포하는 일과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평화는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생겨나기 때문입니다.(이사 53,5) 그리스도의 희생은 십자가입니다.이 십자가를 통하여 분열을 극복하시고 평화와 화해를 회복하심으로써 '적개심을 없애시고'(에페 2,16)인류에게 부활의 구원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짊어진 사람들로서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민족 안에 이루어지기를 함께 노력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강승수 베드로 신부 대전교구 민족화해위원회-
매듭하나
풀어내는
용서(容恕)
당기면 조여지고
놓으면 풀어지는
용서라는 이름의
화해(和解).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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