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20년 주보

연중 제22주일 2020년 8월 30일(가해)

모든 2 2020. 8. 30. 12:18

솔뫼 성지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솔뫼로 132/http : www.solmoe.or.kr

 

1906년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순교 60주년을 맞이하여 김대건 신부의 생가터를 고증한 후 2004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생가가 복원되었다.

 

 

+  마태오 복음 16,21-27

 

 <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자신을 버려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내게서 물러가라.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뒤를 따라오려면,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같을 것이다."

 

 

 

  <말씀의 향기>

 

  냉탕과 온탕 사이   -양웅석 필립보 서산동문동 보좌

 

  저는 코로나 상황 전에 사우나에 자주 가는 편이었습니다. 운동을 하고 사우나에 가서 몸을 담그고 나올 때의 그 개운한 기분이 굉장히 좋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냉탕과 온탕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을 즐겼는데 그러면 피로도 더 빨리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여기서 이 냉탕과 온탕을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이 말은 우리는 어떤 상황에 대해 분위기가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는 것을 빗대어서 표현하기도 합니다.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오늘 복음의 베드로 사도의 모습이 온탕과 냉탕을 오간다는 말에 꼭 들어맞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가리켜 교회의 반석이라고 하셨는데,이번 주 복음에서는 당신의 걸림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반석과 걸림돌,이 두 가지 상반되는 표현을 예수님께 직접 들은 베드로 사도는 그야말로 온탕에서 냉탕으로 갑자기 들어간 기분이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베드로 사도가 왜 예수님께 이런 말을 들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수난 받는 메시아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표현해보자면 예수님께서 세우시는 교회의 반석으로 자신이 영광을 받는 모습은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지만,그분의 수난과 고통에 함께 참여해야 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굉장히 선택적인 신앙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런 베드로 사도의 모습은 오늘날의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모습일까요? 아닙니다. 우리 안에도 분명 이런 모습들이 있습니다.

 

  우리들 역시도 편리하고 쉬운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 합니다. 어렵고 힘들고 귀찮은 신앙생활은 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면,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나의 십자가조차도 내가 지고 싶을 때만 지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우리앞을 걸어가시는데 우리는 예수님께 "먼저 가고 계시면 저는 나중에 천천히 가겠습니다."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우리의 삶도 냉탕과 온탕을 오갑니다. 늘 좋을 수만도 없고,늘 나쁠 수만도 없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입니다. 그런 삶 안에서 우리는 때론 반석의 모습도 때론 걸림돌의 모습도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중 어느 모습을 더 자주 보이나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각자 다르실 수 있지만,어느 모습이 더 참다운 신앙인의 모습인지에 대해서는 다들 같은 답을 가지실 것입니다. 그러니 이번 한 주간 지내시면서,우리가 가진 같은 답에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주님께 도움의 은총을 청하며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그분의 뒤를 따르는 발걸음을 떼어 보도록 합시다. 아멘.

 

 

<사회와 교회를 잇는 길잡이 사잇길>

 

그리스도인에게 사회교리는 상식

 

  살면서 가장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세례 받은 거라고 말한다. 첫 마음을 고스란히 이어오지 못한 반성은 있지만,지금까지 질문에 대한 답은 변함없다. 손꼽아 보니 빅토리아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 30년이 머지않았다.

 

  철학자 최진석 교수님은 '건너가기'를 시행하는 자가 건너가는 자신을 직접 경험할 때 매우 '신비한 요동'속으로 빠지는데 그것이 황홀경이라고 했다. 황홀경(ecstasy)은 정해진 현재의 상태(stasis)에서 다른 곳으로 건너가는(ex)자에게 오는 신의 선물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분의 삶을 따르겠다고 다짐하는 사람이다.

  신앙 체험은 신자수만큼 다양하겠지만 나의 황홀경은 사회교리였다.

 

  세례 받고 얼마 되지 않아 성서 공부도 하고 이것저것 관심이 많은 때 우연히 명동성당 주보에서 '노동 헌장'(교황 레오 13세 회칙,새로운 사태)강의 안내가 있어 가 봤더니 그것이 사회교리의 시작이었다. 교황님들의 문헌을 차례로 공부하고,믿을교리,지킬계명,성총을 얻는법 등 3년에 걸친 시간이 지금껏 교회에 발붙이고 있는 원동력이었다.

 

  인간의 존엄성,공동체,공동선,연대,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불평등,분배정의,협동조합 등등 이 낱말들이 소명이 되어 온몸으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올해는 사회교리며,정세미(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미사)를 하지 못했다. 코로나19라는 반갑지 않은 손님 때문이다. 정평위에서 실시하는 사회교리 이수자가 2700여 명이 넘고 보편교리로 자리를 잡기는 했지만,아직 낯선 시선으로 사회교리를 바라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사회교리는 하느님과 이웃사랑의 이중계명을 명료하게 밝혀 주고 하느님의 자비가 어떻게 세상에 선포되는지 알려 준다. 교황청에서 나온 가톨릭교회 교리서의 제3편 '그리스도인의 삶'이 사회교리이다.

 

  전례적으로 성모 승천 대축일이며 광복 75주년이 되는 날 광화문 광장에서 어이없는 일이 발생했다. 일장기가 웬 말이며 방역수칙을 어긴 채 집회에 나선 이들,코로나19확진자가 속출하고 있고 집단감염이라는 심각한 상황을 만들었다.

 

  이런 사회문제를 복음적 기준으로 보고 판단하고 어떻게 실천하면 좋을지 생각해 보면 어떨까?

 

                -홍성옥 빅토리아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그저

바라만 보다

하나 둘 셋

세월이 갑니다.

그것이

사랑인 줄은

마지막 호흡에서

알았습니다.

진정한 사랑들은

그랬었습니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땅에 쓰여진 신앙이야기

 

솔뫼성지(2)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지

매듭을 푸시는 성모님 경당

 

솔뫼 아레나 광장

 

  김대건 신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로부터 복자품, 1984년 교 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가톨릭 교회의 성인품에 올려졌다. 그로 인해 김 대건 신부에 대한 공경과 성역화 사업이 시작되었는데 솔뫼성지의 성역화는 합덕 지역 교우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합덕성당의 크램프 신부는 1906 년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순교 60주년을 맞이하여 김대건 신부의 생가터 를 고증하였고, 1946년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 기념비’를 세웠다. 1977 년 김대건 신부상을 봉헌하였고, 1983년 솔뫼 피정의 집을 완공하면서 솔뫼 성지는 신자들이 순례와 함께 피정을 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1만 5천여 평 의 소나무 군락지와 더불어 2004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생가가 복원 되었고, 기념관과 성당, 2011년 솔뫼 아레나, 2017년에는 매듭을 푸시는 성 모 신심을 기억하고 온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매듭을 푸시는 성모님 경당’을 봉헌하였다.

 

  내년 2021년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 2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 이다. 이와 더불어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 인물’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선정되어 유네스코 사상인 평등과 인류애를 위한 보편적 가치에 성 인의 삶이 공인받게 되어 한국 교회를 넘어 세계적인 인물로 알려지게 되었 다. 그로 인해 한국천주교회 차원에서도 2021년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 200주년 희년으로 선포했고, 교황청 내사원에서도 희년 전대사를 수여 하기로 해 2020년 11월 29일(대림1주일)부터 2021년 11월 27일(대림 1주일 전날)까지 희년으로 지내기로 결정하였다. 현재 솔뫼성지에서도 ‘천주교 복 합예술공간’을 건축 중이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기념 성당, 가톨릭의 다양한 미술품들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고 있다.

 

  솔뫼성지에 오면 함께 주변을 순례할 수 있는데 대표적인 순례길이 바로 ‘버그내 순례길’이다. 이 지역을 ‘버그내’라고 불렀는데 합덕의 구전 지명 중 에 하나였으며, 조선 시대에 큰 장이 형성되었던 곳이다. 삽교천 물줄기를 따라 내륙 깊숙이 포구가 형성되어 문화, 예술의 교류의 장이었으며 내포 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의 활동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집안의 신앙 이 꽃피웠던 곳이며, 서양의 선교사들의 입국로요, 활동무대였던 곳이다. 그리하여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탄생지인 솔뫼성지, 조 선 5대 교구장이었던 성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의 활동지와 교우촌, 박해 후 의 신앙공동체인 합덕성당을 잇는 순례를 통해 우리의 신앙도 함께 키워나 갈 수 있는 순례길이다. 이 성스럽고 역사와 문화적 요소가 풍요로운 이 길 을 순례하는 가운데, 우리 모두가 순례자임을 깨닫고 신앙 선조들의 신앙을 찾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성모주치의

 

노년기 치아관리-2

 

  바야흐로 100세 시대이다. 평균수명이 늘어난 만큼 잘 먹어야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데, 그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치아 건강관리이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 면 자연스럽게 치아가 약해지고, 잇몸의 기능도 떨어져 음식 섭취가 쉽지 않으며 소화기능도 같이 저하되는 현 상이 나타난다. 또한 치아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노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치매와도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 다는 연구결과가 있을 정도로 치아관리는 중요하다.

 

틀니 전용 칫솔, 세척제 사용해 관리

 

  나이가 들수록 치아가 많이 닳고 깨지거나 소실될 수 있어 질기고 딱딱한 음식은 주의해야 한다. 치아가 소실 된 부분은 반드시 치료가 필요하며 최근 만 70세 이상 노인의 임플란트와 틀니의 보험 적용(2016년 7월 1일 이후 만 65세 이상 적용)이 가능하므로 상황에 따라 효과적인 보철치료를 진행할 수 있다. 여러 개의 치아가 상실돼 틀니를 착용해야 하는 경우에는 세균 번식이나 곰팡이를 방지하기 위해 깨끗하게 틀니를 관리해 줘야 한다. 틀니 전용 칫솔과 틀니 전용 세척제를 사용하는 것을 추천한다. 임플란트로 수복한 경우에는 정기적으로 치과를 방문해 지속적인 검진을 받아야 한다.

 

부드러운 칫솔, 치실, 치간 칫솔 등 이용하면 도움

 

  중년 이후 잇몸이 약해지면서 잇몸 질환의 발병률이 높아지고 치아 사이사이가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치아 사이로 음식물이 끼게 되면서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어 치실과 치간 칫솔 등의 구강 위생용품을 이용해 치아 사이사이를 깨끗하게 관리해 주어야 한다. 또한 나이가 들면서 잇몸이 약해지고 헐기 때문에 부드러운 칫솔이나 구강 세정기를 이용해 잇몸을 마사지하는 것이 구강건강에 효과적이다.

 

 

함께하는 이야기마당

 

하루를 종일(終日)처럼  -김진 대건안드레아 신부 (장재본당)

 

  종일 마태오 형님, 잘 갔어요? 눈부시게 빛나는 몸 으로 그토록 그리던 사랑이신 주님 품에 안긴 그 기분 은 어떠신가요? 뜨거운 폭염이 쏟아지던 8월 19일 수 요일 바로 오늘, 많은 형제 사제들과 흰 제의를 갖춰 입고 48세의 그 짧은 생을 마감하고 가는 길을 황망히 추모하면서 계속해서 눈가가 뜨거워지는 걸 막지 못 했습니다.

 

  형님, 집에 돌아와 기도 중에 잠시 그런 생각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바로 오늘을 사는 나에게 무 엇을 원하시는가? 매일 오늘처럼 사제로서의 하루를 선물로 받고 살아가는 나에게 무엇을, 어떤 삶을 준 비시키려 하는가? 주님을 따르기 위한 투신을 새롭게 합니다.

 

  오늘 형님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형님의 하늘 고향 을 향한 삶이 아니었더라면, 오늘처럼 매일 새롭게 초 대하시는 그분의 부르심에 앞으로도 아주 겸허히 ‘예.’ 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까. 삶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어 려움 중에도 그 ‘예.’라는 응답이 끝없이 이어져 간다 면, 결국 오늘의 이 이별이 하늘 고향에서는 영원한 만남으로 펼쳐져 있지 않을까.

 

  형님, 이처럼 죽음은 모든 것을 다시 새롭게 보게 하고, 이전과는 다른 보다 중요한 새로운 삶의 질서를 매일 선포되는 복음으로, 하느님 중심으로 만들어주 는 것 같습니다. 결국 죽음이 있기에 그 삶이 더욱 아름답게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형님, 소중한 깨달음을 주시고 가셨네요. 저 또한 매일 맞이하는 하루하루가 주님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기를, 그리고 이 세상 소풍을 아름답게 마친 다음 그토록 그리던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만남 속에 다시 재회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 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시편 2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