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앙골 성지
충남 부여군 내산면 금지로 302/http : //cafe.daum.net/southnaepo
+ 마태오복음 13,1-23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어떤 것은 백 배,어떤 것은 예순 배,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귀로 듣고,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그러니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 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어떤 사람은 백 배,어떤 사람은 예순 배,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말씀의 향기>
씨앗의 생명력 -남광근 프란치스코 드살 천안청소년사목 전담-
오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느낍니다. 오늘 말씀 안에서 씨는 길가,돌밭,가시덤불,좋은 땅에 가리지 않고 다 뿌려 집니다. 씨를 일부러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에 뿌릴 사람은 없습니다. 열매를 맺기는 커녕 자라나기조차 어렵다는 것이 빤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씨는 좋은 땅에 심겨야 많은 열매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좋은 땅만을 가려 씨를 뿌리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말씀이라는 씨앗을,그곳이 심지어 열매를 기대할 수 없는 곳일지라도,거기가 길가든 돌밭이든 가시덤불이 무성한 곳이든 개의치 않고 뿌리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시기 때문입니다.
씨앗은 외형적으로는 작지만,그 안에 엄청난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땅을 뚫어 뿌리를 내리고 갖가지 장애를 겪어 내며 씨앗일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큰 나무가 되는 것을 보면 씨앗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에게 뿌려진 하느님 말씀이라는 씨앗은 세상을 움직이고 바꿀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과 같은 세상의 어두운 상황,각자의 절망스러운 처지가 하느님 말씀이 자라나고 하느님 나라가 확장되는 데에 어려움을 줄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마도 그것은 하느님 말씀에 담겨 있는 생명력에 대한 확신의 부족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습니다."(히브4,12)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심으신 씨앗은 어떠한 장애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아무런 희망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계획대로 자라나고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느님 말씀의 씨앗이 우리 안에 있다는 확신을 가지는 것,그리고 수풀 속에서 아무도 모르는 새 피어나고 있는 꽃을 발견하는 것처럼 우리 안에 살아 움직이고 있는 말씀을 찾아 그 힘을 느끼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한국 천주교와 이웃 종교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 위원회 편찬-
69. 이슬람교에도 성직자가 있습니까?
"무슬림과 그리스도인 종교 지도자들과 교사들이 우리 양대 공동체를 절대로 더 이상 갈등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를 지극히 존중하며 대화하는 공동체로 보여 주는 것이 저의 간절한 희망입니다."(요한 바오로 2세,무슬림공동체와 만남에서 행한 연설,3항,2001년 5월6일)
"종교 지도자의 과제는 무엇보다도 신앙의 진리와 올바른 태도를 가르치고,사회의 책임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의무를 알고 그 의무를 다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각 종교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우리는,사람들이 온전한 삶을 영위하고 하느님을 향한 수직적 차원을 이웃을 위한 봉사의 수평적 차원과 조화시키도록 돕습니다." (요한 바오로2세,예루살렘의 유다교,그리스도교,이슬람의 종교 간 만남에서 행한 연설,3항,2000년 3월 23일)
이슬람교에는 가톨릭 교회의 교황,주교,신부와 같은 성직제도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슬람교에서는 예배,혼인,장례 때에 공동체에서 존경받는 사람이면 누구나 예배 인도자를 뜻하는 '이맘'이 되어 회증을 인도할 수 있습니다.
이슬람교의 교리나 법률적인 지식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들이 이슬람교의 신학적 법률적 문제에 대한 의견을 내놓으며,그 가운데에서 존경받는 이들의 견해는 매우 큰 권위를 가집니다. 그렇지만 이들이 성직자는 아닙니다.
<사회와 교회를 잇는 길잡이 사잇길>
무관심에서 관심으로
지난해 한구 천주교 주교회의에서는 한국 전쟁이 발발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인 2020년을 맞이하면서,'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밤 9시 주모경 바치기 운동'(2019년 12월 1일~2020년 11월 28일까지)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 기도 운동에 나름대로 열심히 동참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요. 기도 운동에 동참하면서 생긴 제 삶의 변화를 짚어 본다면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기도를 봉헌하는 이 시간만큼은 갈라진 우리들의 형제,자매인 북한을 생각하고 그분들에게 온 마음을 쏟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북한에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적어도 하루에 한 번 북한을 생각하고 기도한다는 것은 제 삶에 있어서 조그마한 변화이며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내 안의 무관심을 관심으로 돌려놓을 때,조그마한 변화가 시작되는구나!"
우리는 흔히 남.북한이 당면해 있는 여러 가지 해결과제들을 논할 때,성과에 있어서 긍정적이고 좋은 변화가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를 원하기에 앞서 나는 그동안 얼마나 북한에 관심을 가지고,지속적이고 긍정적인 행동들을 이어 나갔었는지를 성찰해 보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남.북한의 관계 역시 개개인의 무관심이 관심으로 바뀔 때,비로소 변화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남한과 북한이 서로를 원수로 여기며 총을 겨눈 지 70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서로를 향한 대화와 소통,사랑과 협력보다는 미움과 불신,분노와 원망의 나날을 보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반도의 평화를 원한다면 이제는 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나 자신의 무관심이 관심으로 바뀔 때 가능합니다.
-김지훈 미카엘 신부 대전교구 민족화해위원회-
가슴속
깊은 주름에
남아 있는
한 줄의 편지글
"언제든
이 어미는 너를 사랑한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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