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짓골 성지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보령호로 238/htt[://daum.net/southnaepo)
좌대 포함 8m 높이의 순교자 현양비에는 '한빛이어라.임께 다다른 숨'이라는 뜻의 '광영위주치명(光榮爲主致命)이란 한자 구절이 새겨져 있다.
+ 마태오 복음 13,44-52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또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또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 놓고 앉아서,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제자들이 "예!"하고 대답하자,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말씀의 향기>
보물이 숨겨진 이유 -신백철 베드로 관저1동 주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숨겨진 보물의 비유 이야기를 말씀하십니다. 보물이라는 매개체를 가지고 비유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자칫 우리가 이 세상에서 생각하는 로또에 당첨된 것과 같은 일확천금의 이야기로 오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나오지 않고, 이야기가 중간에 끝나버리고, 그 다음 이야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세상의 보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인 풍요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었기에 더 이상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 기쁨은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나에게만 있는 보물이고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누구한테나 기쁜 소식으로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왜 기쁜 소식은 알아듣기도 어렵고 알아보기조차 어려울까요?
밭에 묻힌 보물이나 희귀한 진주는 쉽게 눈에 띄지 않습니다. 묻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농부와 상인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의 가치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최고의 가치를 발견했을 때 주저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도 알아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알아듣고 받아들이는 것은 온전히 우리의 선택과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 이야기는 하늘나라의 가치와 그 가치를 발견했을 때의 무한한 기쁨,그리고 그에 따르는 노력과 대가를 잘 보여줍니다. 보물이 어느 날 갑자기 거저 굴러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끊임없이 하늘 나라의 가치를 갈망해야 복음 말씀이 주는 기쁨을 알 수 있고,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발견한 사람은 자신이 누리던 거짓 평화와 소유를 포기하고 수고와 노력을 다하여 기쁘게 하느님 나라에 온전히 들어갑니다.
물론 하느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없지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 곧 성경은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는 곳간과 같습니다. 현명한 신앙인이라면 그때그때 살면서 필요한 해답을 말씀에서 찾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말씀의 곳간에서 오랫동안 숨겨진 보물을 발굴해 낼지도 모르고,그토록 애타게 찾던 진주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에서 기쁨을 찾기 시작한 이들은 이제 자기가 가진 모든 것과 말씀을 맞바꿀 것입니다.
한국 천주교와 이웃 종교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 위원회 편찬-
72. 무슬림 여성은 모두 머리를 가리는 히잡을 써야 합니까?
"종교간 관계,특별히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의 관계에서 상호 존중을 말하자면,우리는 다른 이의 종교,그 가르침을 상징과 가치들을 존중해야 합니다."(프란치스코,1434년/2013년 라마단 파재절과 경축 메시지)
히잡이란 머리를 가리는 스카프,또는 몸 전체를 가리는 긴 옷을 가리킵니다. 히잡의 작용이 법률로 의무화된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란 같은 국가도 있지만,무슬림 여성이 모두 히잡등을 써야 하는 것은 아니며,개인의 선택에 따른 경우가 많습니다.
쿠란에는 남성,여성 모두가 단정한 옷차림을 해야 한다고 나오지만 옷차림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없습니다.
73. 무슬림이 지키는 할랄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불안한 시대에,신앙인들은 전능하신 분의 종으로서 종교를 실천할 자유를 통하여 각 개인과 공동체의 확신을 존중하는 것을 보여 주어 무엇보다도 평화를 위하여 일할 의무가 있습니다."(교황청 종교간대화명의회,1428년/2007년 라마단과 파재절 경축 메시지,2항)
할랄(halal)이란 '허용된 것'이라는 의미로 종교적으로 허용되는 먹거리나 행위를 의미합니다. 무슬림에게 허용되지 않는 대표적인 먹거리는 이슬람법에 따른 도축 이외의 방법으로 죽은 동물의 고기,돼지고기,동물의 피,술 등이며 무슬림이 해서는 안 될 행위로는 우상 숭배,도박,점술,고리대금업 등이 있습니다.
<사회와 교회를 잇는 길잡이 사잇길>
생육성과 함께 새로운 사고의 확장을 시도하자
지금까지 생육성 개념에 대해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의 요점이다.
첫째, 우리는 '생명의 전달'이라는 유일무이한 의도로부터 전개되는 기쁨과 순간들을 서로 연결시킴으로써 하나의 과정(생명을 열망하고,출산하고,돌보고, 가도록 내버려둠)에 포괄적인 접근을 시도할 수 있다.
둘째, '창조'안에서 바라보는 인간 생명에 대한 접근은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또한 생물학적 생명에 관한 문제를 인간문화 전체와 분리시켜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생명의 전달은 기술적인 문제만도,윤리적인 문제만도 아닌, 인간 개인과 공동의 운명과 함께 삶의 여러 의미와 문제들이 관련된 영적인 사안이다. 그리하여 이 문제는 인간학을 기초로 하지만 신학적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셋째, 생육성은 우리가 처음 접했을지 모르는 신앙의 사고의 틀이지만 너무나 명백한 이야기들로 인간학적인 차원에서 생명의 전수와 탄생(낳음)을 새롭게 생각하게 해 준다.
신앙의 차원에서 '낳음'은 그 원천을 하느님께 두기 때문에 신앙인은 '생명의 종'과 '낳음'의 관계를, 당신 자신 안에서 낳으시고 낳음을 받으시는 하느님께 대한 깊은 관상(觀想)에로 이끌어 주며 성(性)에 대한 성찰도 새롭게 고양시킨다. 마찬가지로 '생식'(procreation)이라는 단어에 창조주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과 연결하면,이 단어는 단순히 인간 종(種)의 재생산을 위한 방법이 아니다. 자신의 성을 실현하는 남자와 여자의 생식은 늘 일상의 작은 행복보다 큰 무엇이며,희생,자기증여,관대함을 포함하는 생명의 전달을 위한 본질적인 기쁨들 안에서 더욱 풍요로운 기쁨이 될 것이다.
넷째, 생육성은 성,부부,가정,생명의 전달 가운데 물질적이고 영적인 모든 형태에서, 그리고 교육,사회 생활에서,특히 생명이 상처받기 쉽고 위협당하는 곳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다. 여기에 보편성과 공동선이,세대 간의 계승이라는 가치들을 새롭게 마주한다. 창조주 하느님과 육을 취하신 말씀에 대한 우리의 신앙은 우리 자신의 실재를 마주하면서, 동시에 나눔과 생명의 돌봄과 보호,정의와 평화,자연보호에 대한 우리의 책임에로 이끌어 준다.
결국 생육성은 조각난 문제들을 잘 연결하도록 돕는다. ① 단순히 한편은 남성,다른 한편은 여성이 아닌 남녀 모두를,② 폐쇄적이고 개인적인 안락만을 추구하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모든 상호보완성을,③부부만이 아닌 가정을,④ 가정에서는 부부의 남녀관계만이 아닌 세대 간의 관계를 친형제자매뿐 아니라 친구들,주인,직장과 지역,그리고 주변동료들을,⑤가정만이 아닌 사회 안에서의 가정을,⑥ 우리 사회만이 아닌 민족,나라,국가,연방 등 인류 전체를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생육성은 생물학적 생명이나 현세적 삶뿐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과 이 세상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모든 실재들이 상호보완적 관계를 넘어 생명을 전달하는 기쁨에 다다르고 있음을 볼 수 있도록 이끌어 줄 것이다.
-이영일 야고보 신부 주교회의 생명운동본부 대전교구 담당-
너의 의미는 희망이 좋겠다.
새로움을 품은 네 모습은 희망이 맞다.
너의 의미는 사랑이 좋겠다.
사람과 사람들,사랑이 아니면 무엇이 있을까.
아무래도 너는 사랑이 좋겠다.
너는,또는 나는,
그리고 우리는
희망이고 사랑이었으면 좋겠다.
사랑과 희망이 강가의 작은 돌처럼
그렇게 흔했으면 좋겠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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